'여학교 독극물 공격'에 이란 최고지도자 "엄중 처벌" 경고했지만…

최소 52곳 여학교서 1000 명 이상 피해…여학생 '히잡 시위' 참여 보복 의혹

이란 여학교 연쇄 독극물 공격 사건에 대해 당국이 거듭 조사를 천명했지만 인권단체는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사건이 지난해 '히잡 시위'에 여학생들이 적극 참여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의혹이 나오며 미 백악관은 사건이 유엔(UN) 조사 대상에 포함된다고 밝혔다.

이란 반관영 <ISNA> 통신은 6일(현지시각)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최고지도자가 이날 식목일 기념 연설 말미에 최근 여학생들의 "중독" 사건을 언급하며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라고 비판했다고 보도했다.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는 "이 범죄의 가해자로 밝혀질 경우 엄중히 처벌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철저한 조사를 촉구했다. 

같은 날 골람호세인 모세니 에제이 이란 법무장관은 가해자들에게 사형 선고가 가능한 "지상에서의 부패"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는 동시에 "사건 관련 여론을 교란시키거나 거짓을 퍼뜨리는 자들"을 심문하기 위한 특별 법원이 설치될 것이라며 단속에 나섰다. <AP> 통신은 이날 여학교 중독 사건을 지속적으로 보도해 온 한 이란 언론인이 체포됐다고 덧붙였다. 

▲ 6일(현지 시각)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가 테헤란에서 식목일 기념 연설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사건 피해자 1000명 이상 추정여학교 폐쇄 노린 공격일수도

이란에선 지난해 11월 30일 수도 테헤란에 남쪽으로 120km 가량 떨어진 쿰의 한 학교에서 18명의 여학생들이 호흡 곤란·메스꺼움·현기증 등의 증상을 호소하며 병원으로 이송된 뒤 3달 여 간 전국 여학교에서 유사한 사건이 이어지고 있다. 학생들이 증상 발현 전 귤·썩은 생선·세제 냄새 등 불쾌한 향을 맡았다고 증언함에 따라 독극물 공격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란 정부는 전날 전국 52곳 여학교에서 비슷한 사례가 보고됐다고 밝혔다. 영국 <BBC> 방송에 따르면 이란 개혁주의 언론 <에테마드>는 이란 31개 주 중 25개 주 127곳의 학교에서 중독 사건이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사건 피해자는 1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공식적으로 보고된 사망자는 없다.

당국은 일련의 사건이 여학교 폐쇄를 노린 공격일 수 있다고 시사한 상태다. 지난달 26일 유네스 파나히 이란 보건부 차관은 여학생들의 "화학물질 중독"을 밝히며 "일부 세력이 학교, 특히 여학교 폐쇄를 원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사건을 조사 중인 아흐마드 바히디 이란 내무장관은 4일 "의심스러운 표본"이 발견됐다고 밝혔지만 구체적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중독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를 인용해 학생들이 농약 등 살충제에 들어가는 성분인 유기인산염에 약하게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외신들은 이번 사건이 아프가니스탄에서 2010년 전후로 수 차례 발생했던 여학생 중독 의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고 상기시켰다. 당시 정부 등의 조사에서 독극물은 검출되지 않았고 여성 교육에 반대하는 무장 세력이 배후에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진상을 밝혀지지 않았다.

이번 사건이 지난해 '히잡 시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여학생들을 표적으로 삼은 보복성 공격이라는 의혹도 제기된다. 지난해 9월 쿠르드족 여성 마흐사 아미니(당시 22살)가 히잡을 부적절하게 착용했다는 이유로 지도순찰대에 끌려간 뒤 의문사한 것을 계기로 이란 전역에선 수 개월 동안 반정부 시위가 지속됐다. 이 과정에서 여학생들은 교내에서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초상을 공개적으로 모욕하거나 히잡을 벗고 거리 시위에 나서는 등 시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해 말부터 정부가 시위 참여자에 대한 사형을 집행하면서 시위는 잦아든 상태다.

지난 1일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은 내무부에 여학생 연쇄 중독 사건 조사를 지시했고 6일엔 관련 조사를 위한 태스크포스(TF) 구성까지 지시했지만 인권단체는 벌써 조사 결과에 회의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지난 2일 "이란 당국이 여학생 중독 보고에 대해 즉시 투명하게 조사해야 한다"면서도 이란 정부의 "이란 시민, 특히 여성과 소녀들의 기본권을 존중하지 않은 오랜 역사를 감안할 때 진실된 조사와 적절한 조치가 시행될 희망은 거의 없어 보인다"고 우려했다.

지난해 반정부 시위 배후에 외세가 있다고 주장했던 이란 정부는 이번 중독 사건 뒤에도 외부의 "적"이 있다고 시사했다. 이란 관영 <IRNA> 통신을 보면 5일 라이시 대통령은 각료 회의에서 사건 관련 보고를 받고 "학생들을 위협하기 위한 적의 새로운 음모"라고 말했다. 통신은 2일 이번 사건이 잦아들어가는 반정부 시위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서방이 획책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조사가 지연되며 여학생들이 점차 학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됐다고 <가디언>이 전했다. 매체는 지난주 쿰 지역 한 교사가 현지 언론에 총 250명의 학생 중 50명 만이 등교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영국에 기반을 둔 이란 매체 <이란인터내셔널>은 6일 몇몇 교원 및 학생 단체들이 7~8일 연쇄 중독 사건 진상 조사를 요구하는 시위를 예고했다고 보도했다. 매체는 전국교사연합이 성명을 내 여학교 독극물 테러가 "여학생과 가족들에게 공포를 심어 여성·생명·자유 운동(히잡 시위)을 분쇄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는 강한 의심이 든다"고 비판했다고 전했다. 

학부모들은 이미 학교며 지역 교육청을 찾아 항의 시위를 벌이는 중이다. 영국 BBC 방송은 북부 라슈트 지역 교육청 앞에서 시위 중인 어머니들에게 보안군이 최루탄을 쐈다는 주장이 소셜미디어(SNS)에 게재됐다고 보도했다.

백악관 "여학생 중독 사건, UN 조사 대상"…다시 '복장 단속' 고삐 죄는 이란

미국 백악관은 이번 사건을 유엔이 조사할 수 있다고 밝혔다. 카린 장 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6일 브리핑에서 "이란 소녀들이 단지 교육을 받고자 한다는 이유로 독극물에 중독될 가능성이 제기된 것은 부끄럽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며 "중독 사건이 반정부 시위 참여와 관련돼 있다면 국제진상조사단의 조사 권한에 포함된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유엔 인권이사회는 이란 반정부 시위 대응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 침해를 조사하기 위해 국제 진상조사단을 구성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한편 히잡 시위 뒤 한동안 강력한 복장 단속을 시행하지 않았던 이란 정부는 다시 단속을 강화할 의지를 표명했다. <로이터> 통신은 6일 에제이 장관이 "히잡을 벗는 것은 이슬람공화국과 그 가치에 적대감을 표현하는 것과 같다. 이런 비정상적 행위에 가담하는 사람은 처벌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이날 <IRNA>는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의 명령으로 반정부 시위 가담자를 포함해 8만 명 이상의 죄수 사면이 이뤄졌다고 보도했다.

▲5일(현지시각) 이란 서남부 아바단의 한 병원에서 독극물 공격에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이란 여학생을 의료진이 돌보고 있다. 사진은 온라인에 게재된 영상을 갈무리한 것.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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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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