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기아-현대없는 삶에 익숙해지고 있다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러시아 시장에서 한국을 대체한 중국

2022년 3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함께 서방의 대러시아 경제 제재가 시작되었다. 2014년 크림반도 강제 병합 때 내려진 대러시아 경제 제재는 금융서비스와 주요 러시아 경제인, 관료, 정치인 등이 그 대상이었고 전략물자 수출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과 러시아 내수 시장의 잠재력 덕분에 제재의 효과는 제한적이었고 러시아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크진 않았다.

이와 달리 2022년 3월의 대러시아 제재는 서방으로부터 러시아 사회를 완전히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국제은행결제망 SWIFT에서 러시아 금융기관 대부분이 차단되었고, 러시아 물품의 수입 금지 및 러시아에서의 서방 기업의 경제활동 역시 중단됐다. 국제은행결제망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기업활동을 극도로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미국과 EU의 러시아 경제 제재는 2014년의 제재와는 달리 효과를 보이는 듯했다.

소련 붕괴로 이념에서 벗어난 러시아 사회를 상징하던 맥도날드가 러시아에서 철수했고, 러시아인들이 사랑했던 애플의 상품과 온라인 서비스도 러시아 시장에서 사라졌다. 아디다스, 나이키, 이케아, 유니클로 등 서방 상품들도 마찬가지였다.

▲ 맥도날드 매장에 들어선 러시아 패스트푸드 <브쿠스노 이 토치카>(맛있으면 그만) ⓒ브쿠스노 이 토치카 홈페이지 갈무리

생필품, 유통망, 식품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 사라진 서방의 주요 상품 중 하나가 자동차다. 러시아의 부유층들이 즐겨 탔던 독일 자동차와 중산층에게 인기 있었던 기아와 현대 차동차가 러시아 시장에서 사라졌다.

2018년 러시아 자동차 시장에서 한국은 가장 높은 점유율을 기록했다. 2010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시 외곽에 15만평 규모의 생산 공장을 설립한 현대 자동차의 투자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연간 20만대 이상을 생산하고 판매했던 기아와 현대 자동차는 2022년 경제 제재와 함께 러시아 시장에서 급속도로 사라졌다.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러시아 소비자들은 낯선 자동차 카탈로그를 살피고 있었다. 모든 서방 기업의 자동차 생산과 수입이 금지되었고 현재 러시아에는 중국 자동차만 수입되고 있다.

2023년 중국의 자동차 회사들이 러시아 시장에 쏟아낸 자동차 상표들은 그 수가 너무 많아 기억하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창안자동차(Changan), 체리(Chery, Exeed, OMODA, Jetour), 이치(FAW), 장화이(JAC) (DFM), 광저우자동차(GAC), 지리(Geely, Livan), 만리장성(Great Wall, Skywell, Tank, Haval), 홍치(Hongqi), 둥펑자동차(Voyah) 등 중국 자동차의 물결이라고 할 정도이다.

불과 2년 전인 2021년에 Haval, Chery, Geely, Changan 같은 중국 자동차 브랜드가 러시아 시장에 판매한 차량은 총 8만 대가 되지 않았다. 같은 해 기아와 현대가 30만 대를 팔아 한국은 러시아 자동차 시장에서 최대 판매국이었다. 2018년 러시아 시장에서 중국 자동차의 점유율이 2%대였음을 고려하면 러시아 시장에서 중국 자동차가 존재감을 보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2022년 중국 자동차가 러시아 시장에서 30% 가까운 점유율을 기록한 것은 러시아 경제 제재 때문이었다.

중국 자동차 기업들은 독자 브랜드로 러시아 시장에 진출할 뿐 아니라 러시아 자동차 기업에서 합작 형태로도 생산하기 때문에 러시아 자동차 시장에서 중국 자동차는 1년 만에 지배적 위치를 차지했다. 이대로라면 2023년 중국 자동차의 러시아 시장 점유율은 40%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 기아 셀토스를 대체하는 체리 자동차의 하위 브랜드 OMODA C5. ⓒOMODA 홈페이지 갈무리

자동차 시장 외에도 러시아 시장에서 한국이 오랫동안 부동의 1위를 차지한 영역이 생활가전이었다. LG는 한국 기업임에도 러시아 국민 브랜드에 선정될 정도로 러시아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2021년 러시아 냉장고, 세탁기 시장에서 판매 대수와 판매량에서 1위는 LG였지만 2022년은 중국 하이얼이 1위를 차지했고, 2023년 러시아 시장에서 한국산 생활 가전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될 것이다.

1998년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고 일본과 유럽의 기업들이 러시아 시장을 떠났을 때 한국 기업들은 러시아 소비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2022년 러시아 경제 제재를 기회로 한국 기업들의 자리를 중국 기업들이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한번 잃은 시장을 되찾는 것은 새롭게 개척하기보다 더 어렵다.

중국이 해외 인터넷으로부터 자국민을 차단했다면, 러시아인들을 고립시킨 건 미국이었다. 서방 기업이 러시아에서 활동하지 않으면서 러시아 정부의 통제를 받는 정보통신 회사들이 등장했고, 러시아 내의 반전(反戰) 움직임이나 양심 있는 언론인들의 언로가 막혀 버렸다.

2023년 현재 러시아 경제는 어떠한 혼란의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상점의 매대에는 러시아와 중국에서 생산된 소비재, 공산품이 부족함 없이 진열되어 있다. 러시아인들은 애플과 맥도날드, 기아-현대와 LG, 삼성이 없는 삶에 익숙해지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고립시켜 전쟁을 유리하게 끝내려 했던 미국의 전략은 실패했고, 오히려 경제 제재의 대가는 기업이 치르고 있다. 그 어느 국가보다 무역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가 이 경제 제재로 얻는 가치와 이익은 무엇일까?

1853년 크림전쟁에서 벌어진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이 1904년 2월 러일전쟁까지 이어졌고 이 세계적 대립 속에서 지난 세기 우리 민족은 나라를 잃기도 했다. 새로운 냉전의 장막 앞에서 다시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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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중국문제특성화' 대학을 지향하면서 2013년 3월 설립된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은 중국의 부상에 따른 국내외 정세 변화에 대처하고, 바람직한 한중관계와 양국의 공동발전을 위한 실질적 방안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산하에 한중법률, 한중역사문화, 한중정치외교, 한중통상산업 분야의 전문연구소를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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