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 안 됩니다", 그런 장관 한 명만 있어도…

[프레시안 books] <시대의 조정자>, 보수와 혁신의 경계를 가로지른 한 지식인의 기록

"각하, 안 됩니다. 저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평화롭게 수습하겠습니다."

1994년 현대중공업 파업 사태가 길어지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검찰총장까지 참석한 확대 국무회의에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공권력 투입을 선언한 것인데, 그 자리에서 노동부 장관이 손을 번쩍 들고 황급히 만류했다. '합리적 조정자'의 동분서주에 힘입어 파업은 다음 날 평화롭게 해결됐다.

"문민정부에서 노동부는 노사 간 분규의 공정한 중재자가 돼야 한다"는 소신을 관철한 남재희 전 장관의 일화다.

"제가 폭력과 협박, 공갈이 난무하는 산업현장을 정상화하지 못하면 국민께 세금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 산업현장에서 폭력과 협박에 터를 잡은 불법을 놔두면 그게 정부고 국가냐."

최근 비공개 간담회에서 나온 윤석열 대통령 발언을 대통령실이 굳이 보도자료로 알리고 '유튜브 쇼츠(짧은 동영상)'로 공개했다. 고용노동부를 포함해 32개 부처·청 공무원 150여 명이 참석한 간담회였다. 대통령의 질주에 방지턱은 보이지 않았다. '윤 대통령의 요리법'을 묻는 질문은 있었다고 한다.

남 전 장관의 자전적 회고록 <시대의 조정자>(민음사)에 윤석열 정부에 관한 직접적인 제언은 담겨있지 않다. 하지만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에 적대적인 의식을 거리낌 없이 쏟아내는 윤 대통령이 곱씹어 볼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

일례로 2013년 박근혜 정부가 철도노조 파업 진압을 명목으로 민주노총 본부에 공권력을 투입했을 때, 남 전 장관은 "왕조시대 임금 사냥터에서 사냥감을 몰아세우는 야만적 행위와 달라야 한다"고 질타했다. 노동운동의 집단적 의사 표출은 "헌법이 보장하는 결사·집회의 자유라는 법 타령을 제쳐놓고 말하더라도, 솔직히 말해서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이기적 사회집단 간의 조직적 힘의 균형과 상호 견제라는 정치행동"이기 때문에.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그는 "언론에 보도되지 못한 숱한 노동 애사(哀史)"를 분쟁 과격화의 배경으로 이해하며 "기업 측의 행태는 과연 정상적인가 하는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민주노총을 향해선 "강경 투쟁 노선을 늦추어 온건한 유연 노선을 택했으면 한다"고 충고하며 균형점을 찾았다.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프레시안

'보수와 혁신의 경계를 가로지른 한 지식인의 기록(부제)'은 언론인 20년, 4선 국회의원, 노동부 장관으로서 군사정부와 민주화 이후 정부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원로의 세심한 관찰록이기에 현재의 집권세력이 반추할만한 현대정치사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부르짖는 보수정당을 향한 18년 전 남 전 장관의 비판은 지금 봐도 날카롭다. 취임사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윤 대통령에 대한 충고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당연하게 대전제로 하고 있는 것을 왜 그렇게 유별나게 강조하는지 모르겠다. (…) 문제는 그 뉘앙스와 스펙트럼이다. 정책을 입안, 집행함에 있어서 구체적인 선택지의 문제다. 디테일의 문제다. (…) 실업, 사회 안전망, 경제성장, 노사 관계 등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제시하고 논의해야지, '자유민주주의' 타령은 금이 간 레코드판에서 들리는 소리 같다. (…) 그것은 변형된 매카시즘의 일종이 될 것이며, 한편으로는 혹시라도 재벌을 대변하려 한다면 몰라도 학술적 통용 가치도 없는 슬로건일 뿐이다."

매번 반복되는 '친(親)기업' 정책에 그는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기업의 혁명적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정부에 의한 조절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면서 "공정 경쟁은 물론이고 공공성과 사회연대를 위한 제반 조절이 정치의 발전"이라고 했다.

이 조정자의 지론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복지정책을 위해 기업에 대한 부담은, 우리나라의 경우 확대되어야만 한다. 그런 것을 하는 것이 국가다. 그럴 때 '국가란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까지 된다"는 것이다. '약자 복지'를 내세우면서도 법인세 인하 등 적극적인 감세 정책으로 역주행하고 있는 현정부가 되새겨볼만 하다.

이명박 정부 출범 즈음 남 전 장관은 "크로니즘"(정실주의)을 경계했다. 그러면서 "평생을 이윤만을 목적으로 하던 기업 CEO가 정치 CEO가 될 때 대단한 영재라 하더라도 일을 그르칠 우려가 있는 것이다"고 했다. 이 역시 정치 경험 없는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의 권력운용에 '검찰공화국'이란 비판이 제기된 현실이 겹쳐 보인다.

더욱이 이전 정부와 야당을 향해 칼을 빼든 검찰이 정치 한복판을 장악한 현실에서, 남 전 장관이 최장집 교수의 표현을 빌어 'RIP 정치(Revelation : 폭로, Investigation : 조사, Prosecution : 기소)', 즉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를 우려한 점도 눈에 띈다.

또한 "(이명박 대통령은) 노무현 정권이 너무 인기가 없어 그에 대한 반대 여론을 업고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기에 무엇이든 노 정권의 것은 부정하고 보자는 기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역학 작용은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면서도 "미국 부시 정부가 클린턴 정부를 부정하기 위해 ABC(Anything But Clinton) 방침을 택하여 실패했음을 교훈으로 삼아야겠다"고 했다.

특히 남 전 장관은 이명박 정부의 외교적 급변침을 지적하며 "그동안 한미 관계가 '훼손'되었으니 '복원'한다 운운의 말들이 나왔다. (…) '훼손', '복원' 운운하며 왜 우리가 그 책임을 스스로 뒤집어쓰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만에 하나 노무현 대통령의 경솔한 발언 등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 해도 우리가 그렇게 떠드는 것은 외교의 하지하책이 아닌가"라고 일갈했다.

그의 지적에 입각하면, 문재인 정부와 가장 선명한 차별화 기조로 치닫고 있는 윤석열 정부의 "한미동맹 복원" 역시 '누워서 침뱉기' 외교에 다름 아닌 국내정치용 슬로건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북한 문제'에 관해서도 남 전 장관의 조정자적 인식이 돋보인다. 그는 "북한은 '실패한 체제'", "한반도에서도 공산 체제는 명백히 파국에 직면하고 있다"고 여러 차례 규정한다.

다만 "패자에게 상처를 감추고 그나마의 명예를 지킬 커튼을 쳐 주는 아량을 보여야 한다"며 "우리의 북에 대한 태도는 북이 '좋아서'가 아니다. 북이 '좋지 않지만'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북의 안정적 변화를 통해 장기적으로 민족의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부득이 그러는 것"이라고 보수의 강경론을 달랬다.

즉흥적으로 쏟아내는 다변보다 참모들이 작성해준 '말씀자료'에 의지하는 편이 국정에 해롭지 않다는, '대통령의 말'에 관한 남 전 장관의 평도 흥미롭다.

"대통령의 말은 정말 중천금이다. 노태우 대통령은 모든 말을 참모가 숙고하여 써 준 '말씀 자료'에 의지해서 했다. 그래서 말씀 자료를 써 주던 참모가 이임하는 자리에서 한 말이 바로 그 참모가 마지막으로 써 준 말씀 자료대로였다는 촌극까지 있었단다. 그렇다고 노태우 대통령을 그런 일로 하여 낮게 평가하는 사람은 없다. 좀 심했다 싶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히려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입 때문에 나오는대로 말을 하여 실수를 일삼은 노무현 대통령이 문제가 아닌가."

'소용돌이'가 일상인 한국 정치에 지도자로서 대통령의 위상에 관한 남 전 장관의 서술이 특히 인상적이다. 

"우리 사회가 민주사회를 지향한다면 다원사회가 되어야 하고 대통령도 그런 다원사회의 여러 지도자들 가운데서의 여러 손가락 가운데 첫째 손가락으로 꼽는 지도자 정도에 그쳐야 하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지지자 동원 정치를 우려했던 것이지만, 극렬한 '팬덤 정치'에 기울어진 지금의 야당이 새겨들을만한 제언도 담겨있다. 남 전 장관은 "운동 정치에서는 민중의 욕구를 도에 넘게 자극하기 마련인데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그 격앙된 욕구의 파도에 삼켜버려질 우려도 있게 된다"며 "민중의 욕구를 고양시키는 데도 절제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대문자'로 시작하는 개혁보다는 '소문자'로 시작하는 많은 개혁들을 통해 민주화를 공고히 하고 민생을 보살피는 일"을 주문하며 "보수주의일지라도 그 상대적인 가치를 인정하고 서로 경쟁하는 것이 의회주의의 원리"라고 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무인 정권' 시대의 기록을 비롯해 책에 담긴 '3김(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에 대한 인물평은 남 전 장관이 다양한 위치에서 그들과 겪은 인연을 소재로 엮어 정치 거목들의 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부산으로 선거구를 옮겨 낙선한 '바보 노무현'과 우연히 마주친 일을 떠올리며 "그 노무현과 대포 한잔 못 나누고 헤어진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고 한 회상에선 애잔함이 전해진다.

보수정당에 몸담아 정치활동을 하면서도 '1980년 광주'를 '폭동'에서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는 등 남 전 장관의 정치 역정에는 '체제 내 리버럴'이라는 평가가 뒤따른다. 책 서문에서 그는 "당시의 시대 상식에 맞추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라고 자평했다. 겸양일 텐데, 그런 장관, 그런 정치인이 절실한 요즘이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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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구

2001년에 입사한 첫 직장 프레시안에 뼈를 묻는 중입니다. 국회와 청와대를 전전하며 정치팀을 주로 담당했습니다. 잠시 편집국장도 했습니다. 2015년 협동조합팀에서 일했고 현재 국제한반도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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