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공식기관 최초로 한국군 '베트남 민간인 학살' 인정

베트남 학살 피해자 국가배상 소송 승소 … "영혼들 안식 얻어"

"(학살 사건 피해자의) 영혼들도 이제 안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너무도 기쁩니다." - 베트남전 퐁니 마을 학살 사건 생존자 응우옌티탄(63) 씨의 승소 소감 중 일부

법원이 베트남 전쟁 당시 벌어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을 인정하고 정부의 배상을 명령했다. 국내 공식기관이 베트남전 당시 민간인 살해를 '개인의 일탈'이 아닌 '군의 작전수행 과정에서 벌어진 학살사건'으로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68단독 박진수 부장판사는 7일 베트남 퐁니 마을의 학살 생존자인 응우옌티탄 씨(63)가 한국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 대해 원고의 일부승소를 판결했다.

대법원 판례에 따라 변론종결 시점 이전의 지연이자 청구가 일부 기각됐지만, 재판부는 원고가 청구한 손해배상 청구액인 3000만 100원에 대해 이를 넘어서는 4000만 원 상당의 위자료가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응우옌티탄 씨의 소송대리인단은 이에 대해 "사실상 전부승소 판결과 같다"라며 "이 판결이 대한민국의 정부기관이 피해자에게 보내는 최초의 1호 사과문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7일 오후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소송 대리인단과의 영상통화를 통해 승소 소감을 전하고 있는 응우옌티탄 씨. ⓒ프레시안(한예섭)

" 베트남전 52년만에 소송 "명확한 불법"

원고 응우옌티탄 씨는 1968년 당시 한국군 총격으로 인해 상해를 입은 피해 생존자이자 집단 학살 과정에서 가족을 잃은 유가족이기도 하다. 학살사건 당시 그의 나이는 8세였고, 소송은 사건 이후 52년이 지난 2020년 4월 처음 시작됐다.

<한겨레> 등 국내 언론과 시민단체가 '1968년 당시 파월한국군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 1대대 1중대 소속 군인들이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 마을에서 70여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의혹을 최초로 제기했고, 베트남 현장에서 그들과 인연을 맺은 응우옌티탄 씨가 한국정부를 대상으로 한 소송을 결심했다.

이날 판결의 최대 쟁점은 '작전 수행 중인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는가'에 대한 사실 인정 부분이었다. 재판부는 소송이 제기된 이래로 약 3년 동안 참전군인, 당시 현장을 목격한 베트남인, 퐁니 사건을 취재해온 국내 언론인에 대한 증인신문 등의 절차를 밟았다.

정부 대리인 등 피고 측은 퐁니 마을 민간인 학살이 한국군이 아닌 위장 공산군 등의 소행이라고 주장해왔지만, 재판부는 수집된 증거로 미루어 볼 때 "한국 군인이 베트남 민간인을 강제로 모이게 한 다음 총으로 사살"했음이 인정된다고 봤다. 사실관계 인정 이후 필요한 행위의 불법성 여부에 대해서도 "명확한 불법행위"라고 명시했다.

재판부는 사건 발생일로부터 50년 이상이 지났기 때문에 "소멸시효가 완성됐다"는 정부 측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리인단 소속 박진석 변호사는 이날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문경학살 사건 소멸시효에 대한 대법원의 판례가 참고가 됐다"고 설명했다. 당시 대법원은 정부 측의 △학살사건에 대한 정부 차원의 은폐·조작 시도 △유가족의 진상조사에 대한 방해 행위 등을 이유로 '정부 측의 소멸시효 주장은 권리남용'이라고 판결했다.

"희생된 74명의 영혼들에 위로가 될 것"

그 동안 국방부 등 정부 공식기관은 '퐁니 사건'에 대해서도 이와 유사한 태도를 보여 왔다는 것이 대리인단의 설명이다. 실제로 퐁니 마을의 피해자들은 지난 2019년 4월 한국을 방문해 △사실인정 △사과 △피해회복 등을 요구하는 집단 청원서를 청와대에 제출했지만, 같은 해 8월 국방부는 '청원인들이 주장하고 있는 민간인 학살은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는다'라며 이를 거부한 바 있다.

대리인단 소속 이성경 변호사는 "그간 한국정부는 해당 사건이 '공산군 군인들의 위장사건'이라고 주장하거나, '민간인 학살이 아닌 공산군 및 협력자들에 대한 작전행위'였다고 주장해왔다"라며 "그러나 사건을 살펴보면 0세, 2세 아이들까지 사살된 기록이 있다. 교전이 아닌 명백한 몰살이자 학살사건"이라고 설명했다.

대리인단의 임재성 변호사는 "원고 측이 청구한 배상액 '3000만 100원'은 소송을 제기하기 위한 최소 액수"라며 "원고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배상 액수가 아니라 학살 사건의 인정과 사과였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간 국내에선 파월한국군 군인 개인의 전시 강간, 민간인 살인에 대한 형사재판은 있었지만, '한국군의 작전수행 과정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정부 공식기관이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리인단은 "비유하자면 산업재해에서의 업무관련성이 인정된 것과 같다"라며 "이번 국가배상 판결은 한 부대에 의한 집단적 학살을 (국가의 책임으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판결 직후엔 원고인 응우옌티탄 씨도 승소 소감을 전했다. 베트남 현지에서 영상통화를 통해 기자들 앞에 선 그는 "오늘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뻤다", "희생된 74명의 영혼들에게도 오늘의 기쁜 소식이 위로가 될 것"이라며 거듭 감사의 뜻을 전했다.

아래는 응우옌티탄 씨의 소감 전문

"오늘 소식을 듣고 저는 너무 기뻤습니다. 뛸 듯이 기뻤습니다. (학살 사건의) 영혼들이 저와 함께 하며 저를 응원해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퐁니 학살사건으로 희생된 74명의 영혼들에게도 오늘의 기쁜 소식이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혼들도 이제 안식할 수 있을 것 같아 저는 너무도 기쁩니다.

저는 희생자 분들과, 저와, (다른) 피해자 유가족들에게 오늘 이 소식이 아주 기쁘고 위로가 된다는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이 투쟁이, 이날 판결을 통해서 (드디어) 끝나는 걸까, 그런 생각도 하면서 오늘 이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한국의 변호사 분들, 그리고 한국 친구들, 시민 분들과 기자 분들까지 저에게 많은 도움 주셨습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분들과 오늘 이 기쁨을 함께 누리고 싶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제 저도 퐁니 마을 주민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나누겠습니다. 지금 저는 너무도 행복하고 기쁩니다. 너무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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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예섭

몰랐던 말들을 듣고 싶어 기자가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겁하고, 조금이라도 더 늠름한 글을 써보고자 합니다. 현상을 넘어 맥락을 찾겠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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