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전등 의지해 머리 자르지만 러시아 침략은 무엇도 빼앗지 못해"

NYT, 전력 부족 상황서 일하는 키이우 노동자들 취재…공습 땐 지하철역 '공용 노트북' 사용도

사무직 노동자는 수시로 정전이 일어나는 탓에 하루에도 몇 번씩 건물과 건물 사이를 옮겨 다니며 전기가 들어오는 사무실을 찾는다. 전기와 통신이 연결된 곳을 찾아 주차장이며 백화점이나 식품점을 떠돌며 일하기도 한다. 미용사는 손전등에 의지해 머리를 자르고 정전으로 드라이어 작동이 안 돼 손님을 젖은 머리로 돌려 보내야 하는 날도 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일을 해 나가는 것은 러시아 침략이 우크라이나 일상의 어떤 부분도 바꿀 수 없고 어떤 것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저항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키이우 노동자들은 말한다.

<뉴욕타임스>(NYT)의 11일(현지시각) 보도를 보면 지난 가을부터 이어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력 시설 폭격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주민들에겐 정전이, 그리고 정전에도 불구하고 모든 업무가 제대로 굴러가도록 안간힘을 쓰는 것이 일상이 됐다. 키이우의 한 정부 조직에서 일하는 올라 도로페예바(40)는 정전 탓에 하루에 3곳의 사무실을 옮겨 다니며 일한다. 지난 10일에도 일과 중에 전력이 공급되는 다른 사무실로 이동하기 위해 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던 그는 매체에 "모두가 각자의 최전선"을 지키며 일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매체는 많은 키이우 사람들이 악조건에서도 일을 계속해 나가기로 결심한 이유로 생계 유지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사회가 제대로 기능하게 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꼽았다고 보도했다.

매체는 백화점이나 식품점 등 키이우의 여러 상업시설이 전기와 통신이 공급되는 무료 업무 공간을 노동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고 전했다. 백화점 가구 전시 공간에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대형 업무 공간이 생겼고 식품점엔 앉아서 일할 수 있는 의자와 함께 전력을 끌어 쓸 수 있도록 연장선이 여기저기 설치됐다. 상업시설 주차장 또한 차 안에서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인터넷 연결을 제공한다. 키이우 지하철역엔 공습을 피해 지하로 대피한 상황에서도 원격으로 업무를 볼 수 있도록 공용 노트북까지 마련됐다.

다른 수십 명의 노동자들과 함께 백화점에 마련된 임시 업무 공간에서 일하고 있던 기술 기업 소속 디자이너 아르템 쿠드리아(28)는 매체에 "아침에 출근했더니 사무실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여기로 왔다"며 "삶이 파괴되는 도전에 직면"한 상황에 "저항"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주에도 정전 탓에 3일 동안 이 공간을 이용했다.

언어치료사인 예브헤니아 흐룰렌코(30) 또한 집에 전기가 끊겨 백화점에 마련된 업무 공간을 찾았다. 이날 화상 수업을 진행한 그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전기가 끊겨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이곳으로 와야 한다"고 매체에 말했다. 그는 수업을 받는 이들도 이 상황에 점점 적응하고 있다며 의뢰인들이 "처음엔 전기가 끊겨 강의를 취소했지만 이젠 '5분만 기다려 주세요, 발전기가 있는 가까운 카페로 이동할게요'라고 말한다"고 설명했다. 매체는 이 임시 업무 공간에 회계사·상담사·사진가 등 다양한 이들이 갑작스런 정전을 피해 모여 일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원격으로 일할 방도가 없는 자영업자들은 업장에 발전기를 들여놓기도 했다. 키이우의 한 미용실에서 일하는 미용사 안나 폴리보다(32)는 정전이 시작된 지난해 가을부터 동료의 손전등에 손님의 머리를 손질하다 결국 모든 예약을 낮시간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매체에 말했다. 정전으로 드라이어를 작동시킬 수 없어 손님들은 머리가 젖은 채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그러나 "화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모두 사정을 이해했다"며 손님들이 발길을 끊지 않고 계속 미용실을 찾아 주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말 업주가 발전기를 들여 놓아 미용실에 다시 불이 들어 오고 드라이어도 작동시킬 수 있게 됐다.

매체는 정보기술(IT) 기업 등에서도 사무실에 자체 발전기를 들여 놓고 위성통신서비스인 스타링크를 활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IT 기업 기술자인 세르히 티텐코(34)는 "전력이 필요하면 발전기를 사고 차 배터리라도 끌어 쓴다. 친구들 중 아무도 떠나지 않고 이곳에 남아 일하려고, 그리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매체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전력망이 작동하지 않는 경우에도 인터넷 서비스 제공자들이 전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 끝에 이달 둘째 주 키이우에서 모바일 데이터를 통해 인터넷에 접속한 사람 수가 러시아 침공 한 달 전인 지난해 같은 기간에 맞먹는다고 덧붙였다.

폴리보다는 자신이 일을 해 나가는 것, 그리고 전쟁이라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황에서도 "평범한 사람들이 머리를 자르고 손톱을 다듬고 커피를 마시고 극장에 가는 평범한 일을 하며" 일상을 지켜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그 자체로 "저항 행위"이며 "전쟁 반대" 의지를 표출하는 것이라고 매체에 말했다.

▲지난 6일(현지시각) 공습 경보가 울려 지하철역으로 대피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주민들의 모습. 많은 주민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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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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