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이 재난이다! 주거권 보장, 지금 당장!' 지난 10월 1일 '세계 주거의 날'을 맞아 서울역 일대에서 울려 퍼진 시민들의 외침이다. 지난 8월 8일 폭우로 희생된 분들을 추모하고, 기후재난이 가난하고 아픈 이들에게 더욱 가혹한 현실이 드러났음에도 공공임대주택 예산을 대폭 삭감하는 윤석열 정부를 규탄하는 자리였다.
서울시는 이들의 목소리보다 더 빨리 움직였다. 그러나 이들의 바람처럼 서민들의 주거권을 보장하는 후속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수조 원 대의 토목사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서울시는 9월 24일 강남역 일대와 도림천, 광화문 등 서울의 3개 지역에 대심도빗물저류배수시설(빗물터널)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기본계획 용역을 발주했다. 폭우 참사가 난 지 48일만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앞으로 서울의 6개 침수취약 지역에 대심도빗물터널을 추진하기로 한 지난 8월 10일 오세훈 서울시장의 신속한 발표 덕분이다.
긴급재난상황에서 역할을 아직 숙지 못한 윤석열 대통령도 목동빗물펌프장 내 신월빗물터널을 8월 23일 둘러보며 거들었다. 다음날 환경부는 "도시침수 및 하천범람을 방지하는 기반시설 대책으로 도림천 지하방수로, 강남역·광화문 대심도 빗물터널 등 3곳의 선도사업은 예비타당성조사 면제를 통해 우선 추진하고, 단계적으로 전국으로 확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토목공학 대책 비판하면 사이비라는 서울시
서울시의 이처럼 빠른 대응은 폭우만 내리면 '오세이돈'이라고 조롱받으며 오세훈 시장에게 쏟아지는 책임론을 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월 빗물저류배수시설이 건립된 양천지역의 경우 침수피해가 전혀 발생하지 않은 반면, 빗물저류배수시설이 없는 강남지역의 경우 대규모 침수피해로 이어진 것"이라는 오세훈 시장의 비교는 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급기야 오세훈 서울시장은 9월 19일 서울시의회 시정질의에서 과거 대심도빗물터널을 반대했던 인사들에게 '사이비 전문가'라며 몰아세우며 책임을 전가하는 적반하장까지 보였다.
이번 수도권 폭우로 피해가 컸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서울시의 대응은 적절했는가? 서울시가 침수취약지역을 관리하는 동안 어떤 부족한 점이 있었나? 대심도빗물터널은 도시침수에 얼마나 효과적인가? 대규모 지하 토목사업으로 인한 문제점은 없는가? 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서울기술연구원(8월 24일)과 서울시(9월 14일)가 잇따라 개최한 두 차례 토론회로 갈음해 버렸다. 이 자리는 방재토목사업에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전문가와 용역사 대표, 전직 공무원들이 자리를 채웠고, 주최 측의 의도대로 오세훈 시장이 주창한 대심도빗물터널 사업 추진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결론을 깔끔하게 내렸다.
그러나 9월 14일 서울시가 마련한 토론회에서 대심도빗물터널의 장단점에 대해 발표하기로 한 서울기술연구원의 윤선권 연구위원은 개인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그래서 신월빗물터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실제로 다뤄진 바 없다. 대심도빗물터널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토론회에 핵심 내용이 빠져버린 것이다.
서울기술연구원이 2020년에 발표한 '신월 빗물저류배수시설 방재성능향상을 위한 모니터링 방안'에 따르면, 신월빗물터널은 서울의 대표적 침수취약 지역 중 하나인 강서구 화곡동과 양천구 신월동, 신정동, 목동의 17.93㎢ 유역의 침수 대응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신월빗물터널의 실제 영향 범위는 "3.15㎢에서 최대 5.08㎢로 전체 유역의 28%"에 불과하다. 게다가 만약 시간당 100㎜의 강우가 내리면 25분 만에 32만 톤의 저류용량이 가득 차 버리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득 찬 빗물을 양수기로 모두 빼내는 데는 4.46일이 걸린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지난 8월 8일 최대 시간당 59㎜가 잠깐 내리고 30분 만에 시간당 40㎜ 이하로 잦아든 양천구 일대의 상황과 시간당 110㎜ 이상의 폭우가 30분 이상 내리고 이어서 시간당 60㎜ 이상으로 2시간 30분 넘도록 쉼 없이 퍼부은 강남역 일대의 상황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따라서 신월빗물터널과 같은 성능의 시설이 강남역 일대에 있었다 하더라도 침수를 막을 수 없었을 거란 결론에 이른다. 침수시간을 수십 분 늦출 수 있어서 대피를 위한 골든타임은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도 오세훈 시장은 폭우 3일 만에 "당초 대심도 빗물저류배수시설 건설 계획을 복원하는 근본적인 치수 대책"을 추진한다며, 토목시설의 효과를 과장했다.
대심도빗물터널은 책임 면피용 시책
이처럼 연속 강우 상황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대심도빗물터널을 근본적인 대책이라고 호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해 5월 21일 반포천유역분리터널 공사현장을 찾아 "강남·서초 일대에 침수 피해를 본 분들이 안심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홍수 예방을 위해 수백억대 토목공사를 했으니 안심하라고 한 말을 곱씹으니, 2014년 가라앉는 배를 떠나기 전 어린 학생들에게 남긴 "가만히 있으라"고 한 어른들의 말이 떠오른다.
올 여름 폭우 참사 전만 하더라도 정부 및 지자체 산하 연구기관의 방재전문가들은 "기후변화로 인한 초과강우에 대응하려면 토목사업과 같은 기존 구조적 대책으론 한계가 있으며, 예측하기 어려운 재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선 비구조적 대책 마련에 힘써야 한다"는 취지의 보고서들을 쏟아냈다. 이는 2006년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경험한 미국 사회가 리질리언스(회복탄력성)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예산을 들인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불투수면적의 증가로 인해 비올 때 급격히 늘어나는 비의 양을 줄이려면 공원녹지를 비롯한 투수면적을 늘여 빗물을 땅속으로 흡수해야 한다는 말은 누차 강조됐다. 그럼에도 오히려 도심 (재)개발의 방향은 층고를 높이고 용적율을 늘여 건물주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방향으로 가속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선 3.3㎡에 수천만원 하는 강남땅에 흙과 녹지를 활용한 자연기반해법을 적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순환을 최대한 유도하기 위한 저영향개발기법도 필요하지만, 이미 개발된 도시에서 효과적으로 적용한 사례는 드물다.
과거 마구잡이 도시개발 과정에서 서울의 주요 하천은 콘크리트 박스처리 되어 도로 밑으로 감춰졌다. 경부고속도로가 반포천 위를 덮고 가로지르며 서초동에서 반포동으로 넘어가는 물길의 통수단면을 좁혔지만 이제 와서 누굴 탓하랴. 강남역에서 서초삼성타운으로 통하는 지하연결통로를 만드느라 하수관로를 좁히고 굽힌 게 드러나자, 이를 바로 잡으려고 120억 원의 예산을 들였지만 누구하나 책임진 이 찾을 수 없다.
기후재난은 토목사업으로 대처 불가
재난은 가장 낮은 곳부터 덮쳤다는 절규는 사무치게 한다. 한편으론 강남역 근처 이름난 아파트 앞 맨홀에 빠져 못 돌아온 남매의 죽음은 앞으로 맞이할 기후재난에 안전지대란 과연 있는가를 되묻게 한다. 어느 목숨하나 귀하지 않은 것은 없다. 안타깝게도 서울시의 계획대로 2027년 대심도빗물터널이 완공되더라도 강남역 일대는 여전히 침수취약지역이다. 만약 2022년 8월 8일과 같은 폭우가 다시 내리면, 적어도 1시간 이상은 침수상태를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늘어나는 토목 난개발로 기후위기를 심화하면, 더욱 강한 기후재난이 닥칠 것이다. 따라서 토목사업으로 다가오는 기후재난을 "근본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말이다.
2019년 5월 20일, 서울시는 '침수예측시스템' 뿐 아니라, 이에 따른 80개 침수시나리오에 대한 침수위험도를 마련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침수취약 가구에 대한 돌봄 지원도 약속했다. 만약 서울시의 약속이 지켜졌다면 신림동 반지하 가구의 세 모녀를 구할 수 있었을까? 침수취약 가구를 돌보겠단 약속은 2022년 10월 6일에 발표한 '더 촘촘한 수해안전망 추진전략'에 다시 등장했다. "이번 공사만 완료되면, 안심해도 된다"며 결코 끝나지 않는 희망고문을 날리는 것보다, 한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는 대피 시나리오와 인명구조 계획을 꼼꼼히 짜두는 것이 더욱 절실하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