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증세와 약값·의료비 인하, 윤석열 정부 눈엔 안 보이나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한계는 있지만 체감 물가에 영향 미칠 인플레이션 감축법 내용

미국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목적은 물가만이 아니라 탄소 배출도 줄이는 데에 있다. 여기에 소요되는 막대한 재정은 대기업 증세로 충원한다. 증세는커녕 재벌과 대기업 법인세를 깎아주지 못해 안달이 난 윤석열 정부의 방향과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한국 정부와 방향이 반대인 건 여러 대목에 걸쳐 있다. 지난 4월에 전기료는 킬로와트시(kWh)당 6.9원 인상한 데 이어 3개월 만인 7월에 kWh 당 5원을, 오는 10월에는 또다시 4.5원을 인상해 올해만 최소 15.1%가 오르게 된다. 전기료에 이어 가스비를 비롯한 공공요금이 줄줄이 인상되며 인플레이션을 정부가 부추기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정부가 제약회사와 처방약 가격을 협상해 약값을 인위적으로 인하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했다. 글자 그대로 '인플레이션 감축'을 위한 정책수단을 도입한 것이다.

콧대 높은 제약회사 이윤을 침해

이 법안에 따르면 정부의 처방약 가격 협상권 제도는 2026년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2026년에는 10종의 처방약에 대해, 2027년과 2028년에는 각각 15종의 처방약에 대해, 2029년에는 20종의 처방약에 대해 정부가 제약회사와 협상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었다.

미국인이 1년에 지출하는 약값만 5000억 달러, 하지만 이것도 의료비 전체의 10%에 불과하다. 즉 미국인 전체가 1년에 무려 5조 달러에 달하는 의료비를 지출하는데 이는 미국 국민총생산(GDP)의 20%에 달하는 규모다. 미국 제약회사와 의료기관, 민간보험사로 연결되는 구조가 얼마나 미국인 상대로 폭리를 취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포인트 아닌가.

하지만 법안 시행 시점이 너무 늦다는 점, 협상할 수 있는 처방약 수가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높은 약값에 대한 통제수단이 매우 느슨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장 자주 사용되면서도 높은 가격의 처방약 수가 아주 많지는 않다는 점에서, 이 정도의 개혁 조치만으로도 전체 처방약 가격을 25% 낮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물가인상율 상회하는 약값 인상분 환급

그뿐이 아니다. 물가인상율, 그러니까 인플레이션 비율보다 약값 인상율이 높은 경우 내년부터 제약회사는 물가인상율을 상회하는 인상분을 환급하도록 했다. 정부가 주요 처방약에 대한 가격 협상권을 행사하고, 물가인상율을 상회하는 약값 인상분을 리베이트 형식으로 환급하는 조치는, 매우 부분적이고 제한적이긴 하지만 일종의 '가격 통제' 조치로 볼 수 있다.

'가격 통제' - 사실 코로나19와 함께 우리는 이런 정책수단을 자연스럽게 겪어 왔다. 마스크나 코로나 진단 자가키트 공급에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가격이 폭등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가 가격을 통제해오지 않았던가.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처방약 가격 협상과정에서 약값의 '최대 공정 가격(maximum fair price)' 즉 가격의 상한선을 설정함으로써 이 가격 이상으로 판매되지 않도록 통제하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약값을 맘대로 정해 엄청난 독점 이윤을 누려온 콧대 높은 제약회사의 이윤에 정부가 직접 손을 대겠다는 것이다.

최근의 인플레이션은 주로 코로나와 전쟁으로 인해 공급 측면에서 발생하고 있다. 특히 자본이 독점을 형성한 영역에서 가격을 마음대로 올리면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방식의 인플레이션을 감축하기 위해 비록 제한적이나마 가격 통제 정책을 사용한다는 점은 우리에게도 시사점을 주는 바가 있다.

메디케어(Medicare) 본인부담금 상한 설정

메디케어(Medicare)는 미국 연방정부가 지원하고 운영하는 건강보험으로 65세 이상의 노인들, 그리고 65세 미만이더라도 특정한 장애나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 프로그램이다. 메디케어 혜택을 받는 미국인 이용자 수는 약 6,500만 명에 달하며, 이 서비스 본인부담금의 한도액(out-of pocket cap)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메디케어 본인부담금 한도액(out-of pocket cap)을 2000달러로 설정해 노인과 장애인들의 의료비용 부담을 경감시켜주는 조치를 담고 있다. 연간 2000달러 이상의 약값을 지출해온 메디케어 가입자 부담이 완화될 뿐만 아니라, 2024년부터 2029년까지 메디케어 보험료 인상률을 연간 6%로 제한되도록 하였다.

그뿐이 아니다. 내년(2023년)부터는 메디케어 가입자의 인슐린 본인부담 지출 한도를 월 35달러로 제한해 인슐린을 사용하는 수백만 명의 메디케어 가입자를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수많은 당뇨병 환자를 보유한 미국에서 그동안 악명 높았던 인슐린 가격 일부 통제에 나선 것이다.

본인부담금과 인슐린 지출 한도를 설정한다면, 만일 실제 비용이 이보다 늘어날 경우 누군가는 부담을 해야 한다. 정부와 메디케어가 부담할까? 아니다. 처방약 제조업체의 책임을 대폭 늘리게 된다. 메디케어와 환자의 부담이 늘지 않도록 기업의 책임을 강화한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오바마 케어 지원 3년 연장

오바마 케어(Obama Care) - 공식 명칭은 '환자 보호 및 적정 부담 보험법(Patient Protection and Affordable Care Act, ACA)'으로 미국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한 건강보험 개혁법이며 2014년 1월부터 시행된 바 있다.

노년층과 차상위 계층에겐 정부가 기존에 제공하던 무상 의료보험 제공 대상을 확대하고, 더 나아가 전국민 의료보험 토대를 쌓아보자는 포부도 있었지만, 공화당의 극심한 반대로 최종적으로는 한국과 같은 공적인 사회보험 가입이 아니라 민간보험 의무가입 정책으로 귀결되었다.

이 오바마 케어 가입자 1300만 명에 대한 정부 보조금이 올해 연말로 종료될 예정인데,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통해 정부 보조금 지원을 3년 연장해 가입자들이 2025년 말까지 건강보험료 대부분을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가입자 1인당 연간 약 800달러(100만원 남짓) 가량의 부담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며, 정부 보조금을 3년 연장 시행하는 데에 640억 달러의 예산을 배정되었다. 또한 메디케어·메디케이드 서비스 대상자에 대해 백신 무료 접종할 수 있도록 혜택도 추가된다.(메디케이드(Medicaid) 역시 메디케어처럼 연방정부가 지원하는 의료 서비스인데, 메디케어가 주로 노인과 장애인층을 대상으로 한 것인 반면 메디케이드는 주로 저소득층과 아동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전국민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한국의 경우 백신 무료 접종이 매우 당연한 서비스지만, 그러한 제도를 갖고 있지 못한 미국의 경우 연방 정부가 지원하는 의료 서비스인 메디케어·메디케이드 등을 통해 유사한 혜택을 제공하도록 재정을 투입하기로 한 것이다.

윤석열 정부와 비교되는 정책 방향

내년 건강보험료가 또 오른다. 보험료율이 올해보다 1.49% 인상된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달에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를 열어 결정한 결과이다. 직장가입자가 부담하는 월 보험료는 평균 2069원 인상되고 지역가입자의 세대당 보험료는 평균 1598원이 인상된다.

전기요금과 가스요금은 올해 거의 분기별로 인상되고 있는 상황이다. 채소와 야채를 비롯한 식자재 가격도 폭등해 당장 식당에서 먹는 밥값이 지난해 대비 1000~2000원씩 올라 체감 물가 인상률은 이미 두자릿수에 도달한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의회가 통과시킨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여러 의미에서 윤석열 정부의 정책방향과 비교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증세는 절대 안 된다며 부동산 관련 세금을 죄다 깎아준 데 이어 대기업 법인세도 줄여주자고 한다.

하지만 인플레이션 감축법은 다양한 정책 도입에 필요한 비용 대부분을 대기업 증세, 법인세 인상으로 해결하고 있다. 여기에 처방약 가격 협상권, 물가인상율 상회하는 약값 인상 환급, 건강보험 개혁과 정부 지원 확대 정책이 보태져 실질적인 물가인상 억제의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공적 건강보험 체계를 갖지 못한 미국이라 이러한 개혁조치들 모두 명백한 한계를 가진 것이다. 전기차와 청정 연료 사용 지원을 통해 에너지요금 인상분 일부도 정부가 부담하는데, 결국 정부 부담분은 대기업 증세로 충당하기에 사실상 기업 책임이 강화된다.

약값과 에너지가격을 제외한 생필품에 대한 가격 통제까지 도입된 것은 아니어서 한계는 분명히 있지만, 현재와 같은 인플레이션이 극심한 상황에서 서민들이 가장 부담스럽게 느낄 수 있는 비용이 의료부문 부담금과 에너지가격이라는 점에서 '체감 물가'를 줄이는 데에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틈만 나면 한미 동맹을 부르짖는 한국의 위정자들은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으로부터는 배울 생각이 없는 걸까? 전기차 보조금 문제만 눈에 보이고, 대기업 증세와 약값·의료비 인하를 위한 조치에는 눈을 감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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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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