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금수에서 드러난 '분열된 유럽'…힘 받는 '우크라 영토 양보론'

프·독·이 협상 추구에 동유럽 반발…미국서도 '우크라에 선 그어야' 목소리

유럽이 가까스로 러시아산 원유 부분 금수에 합의했지만 이 과정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유럽의 분열이 가시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 지도자들이 빠른 휴전을 위한 러시아와의 협상 재개로 방향을 튼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유럽 국가들의 반발이 거세다. 바다 건너 영국과 미국은 비교적 강경한 입장을 취해 왔지만, 미국 내부에서도 우크라이나에 '명확한 선'을 일러주라는 의견이 나오는 등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빠른 휴전을 위한 우크라이나의 양보'를 주장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로이터> 통신 등 외신을 보면 30일(현지시각)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이날 브뤼셀에서 회의를 가진 EU 정상들이 러시아산 원유를 부분 금수하는 조치에 합의했다고 밝혔다. 미셸은 소셜미디어(SNS) 트위터에 "이번 합의로 러시아산 원유 수입의 3분의 2가 즉시 차단돼, 전쟁기계(러시아)의 막대한 수입원이 끊긴다"고 설명했다. EU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위원장도 이날 EU가 올해 말까지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90%까지 줄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조치에서 해상 운송을 통한 수입은 전면 금지됐지만 러시아에서 벨라루스를 지나 폴란드, 독일, 슬로바키아, 헝가리, 체코 등으로 이어지는 드루즈바 송유관을 통한 수입은 예외적으로 허용됐다. 러시아산 석유의 3분의 2는 해상운송을 통해 유럽으로 들어오고 나머지 3분의 1은 송유관을 통한다. 폰데어라이엔은 송유관이 지나는 독일과 폴란드의 경우 자발적으로 송유관을 통한 수입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고 덧붙였다. 송유관을 통한 러시아산 석유 의존도가 높은 헝가리 등의 강한 반발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조치는 러시아에 대한 EU의 6번째 제재 조치로 원유 수입 부분 금지뿐 아니라 러시아 최대은행인 스베르방크를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제외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한 달 가까이 표류하다 가까스로 도출된 이번 합의안에 대한 반응은 러시아산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독일이 출혈에도 불구하고 제재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는 등 추가 제재에 대한 강한 압박이 느껴지던 제재 계획 발표 당시와는 사뭇 달랐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30일 원유 금수가 물론 장기적으로는 러시아에 손실을 입히겠지만, 당장 러시아의 자금 조달에 타격을 주지는 않을 것으로 봤다. 매체는 에너지데이터업체 케플러(Kpler)를 인용해 5월 러시아의 일일 원유 생산량이 전달에 비해 20만배럴 늘었다며, 세계 구매자들이 브렌트유보다 배럴당 30달러 가량 싸게 살 수 있는 러시아산 원유를 구매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으며 특히 인도는 5월에 하루 70만배럴 이상이 원유를 구매하고 있다고 전했다.  매체는 또 이번 제재에 반대해 온 헝가리의 석유회사 MOL의 정제수익이 러시아산 원유 할인으로 치솟았다고 전했다. 매체는 구매자들이 점점 제재에 무감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영국 일간 <가디언> 칼럼니스트 사이먼 젠킨스는 이 매체에 30일 원유 금수를 포함한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는 "득보다 실이 많다"며 제재와 이에 따른 러시아의 가스 공급 중단, 흑해 봉쇄 등으로 식량과 에너지 가격이 급등해 세계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희생양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제 제재는 불가피하게 그 피해를 러시아 외부로 확장시킨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헝가리 등의 반발을 받아들여 송유관 공급을 제외한 해상 운송 석유만 금수하겠다는 이번 조치와 이를 도출해내기 위한 과정에서 겪은 진통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유럽 내부의 분열을 강조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쟁 초 비교적 단결된 강한 제재 목소리를 냈던 유럽 각국은 전쟁이 장기화하며 국민들의 관심이 전쟁 자체보다 전쟁의 여파로 급등하는 생활비 문제로 이동하며 어떤 방법으로든 빠른 휴전을 이끌어 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 전쟁 초반에 거의 주목받지 못했던 '휴전을 위한 우크라이나의 양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최근 힘을 받는 이유다. 지난주 헨리 키신저 미국 전 국무부 장관의 발언은 이 논의를 수면으로 올리는 촉매가 됐다. 키신저는 23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 연설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경계선은 개전 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어야 할 것"이라며 두 달 내 협상이 재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키신저가 말한 '개전 전 상태'는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장악하고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방의 루한스크와 도네츠크 지역을 비공식적으로 통제했던 상황을 뜻하는 것으로 우크라이나 쪽엔 실질적인 영토 포기를 의미한다.

프·독·이 빠른 휴전 유도…동유럽국들 "푸틴을 어떻게 믿나" 반발

유럽연합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인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는 확전 방지와 빠른 휴전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 하다. 마리오 드라기 이탈리아 총리는 이달 10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만난 뒤 협상을 촉구했고 이달 초 러시아에 굴욕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와 함께 28일 푸틴과 한 전화 회담에서 협상 재개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푸틴의 빠른 회담을 촉구하기도 했다. 프랑스 대통령궁인 엘리제는 자료를 내 이날 양국 정상이 푸틴에 세계 식량 위기를 피하기 위해 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 곡물수출을 허용하고 우크라이나 수출항인 오데사 봉쇄를 풀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소련의 지배를 받은 적 있고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동유럽 국가들은 이를 납득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마르코 미켈손 에스토니아 의회 외교위원장은 마크롱과 숄츠의 푸틴과의 전화통화를 두고 "프랑스와 독일의 지도자들이 부주의하게 러시아에 새로운 폭력행위의 길을 열어 주고 있는 것이 놀랍다. 왜 주요 유럽국에 대해 전쟁을 벌이고 있는 푸틴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생각하는가"라며 "전화를 끊고 서둘러 우크라이나 여행을 예약하라"고 소셜미디어에 지적했다. 아르티스 파브릭스 라트비아 부총리 또한 소셜미디어에 "정치 현실과 괴리돼 있고 수치심을 느껴야 할 서방 지도자들이 많은 것 같다"고 썼다. 가브리엘리우스 란드스베르기스 리투아니아 외무장관은 29일 "침략자에게 영토를 점유할 기회를 주는 것은 이런 일이 다른 곳에서 또 일어날 수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은 지난 22일 "불행히도 최근 유럽 내부에서 우크라이나가 푸틴의 요구에 굴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며 "오직 우크라이나만이 스스로에 대해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영국도 강경한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리즈 트러스 영국 외무장관은 26일 푸틴에 대한 "유화정책"에 대해 경고하며 동맹이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데 "후퇴"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싱크탱크 유럽외교협의회(ECRF)의 동유럽연구팀인 더넓은유럽프로그램의 이사를 맡고 있는 마리 뒤물랭은 27일 ECRF에 지금과 같은 교착상태가 지속될 경우에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안보 보장과 러시아와의 협력 여부를 두고 유럽은 분열할 수 밖에 없지만 영토 양보 안을 두고는 "더 심각한 분열이 초래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현재 영토 포기 주장에 반발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향후 불가피하게 영토 포기에 동의한다 해도 무력으로 영토를 얻고 결국 (러시아가 보유한) 핵무기가 영토를 지킨다는 선례를 남기는 협상에 많은 EU 회원국들이 동의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부국은 러시아에 대한 억제만 생각하는 데 반해 다른 일부 국가는 유럽의 안정화 전략을 수립하는 데 어떤 형태의 협약으로든 러시아가 포함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이번 전쟁이 "전쟁의 결과와 관계 없이 유럽을 계속해서 분열시킬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방이 형식상으로는 우크라이나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말하지만, 실질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미국이라는 분석이다. 미국의 지원 없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지속 수행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금까지 비교적 강경한 입장을 피력해 왔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국 내부에서도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명확한 선을 제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증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26일 우크라이나가 말하는 '침공 전' 상황으로의 회복, 즉 루한스크와 도네츠크에서 러시아군을 밀어내고자 하는 희망조차 우크라이나의 능력 밖이라는 전문가들의 우려가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돈바스 지역에서 러시아군을 밀어내려면 통상 3배에 가까운 병력이 필요한데 이 같은 일은 실현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매체는 우크라이나가 자국군 사상자수를 기밀로 취급하고 있다고도 덧붙엿다. 매체는 앞서 19일 편집위원회 의견에서 바이든이 "젤렌스키와 그의 국민들에게 미국과 나토가 제공할 수 있는 무기, 자금, 정치적 지원에 한계가 있음을 명확히 해야 한다"며 "우크라이나 정부의 결정은 얼마나 더 큰 파괴를 견뎌낼 수 있는지에 대한 현실적 평가에 기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매체는 "협상 국면으로 들어서면 요구되는 영토에 대한 뼈아픈 결정을 해야 하는 건 우크라이나 지도자"라고 강조했다.

▲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운데)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각) 동북부 도시 하르키우를 방문, 군인들로부터 현장 설명을 듣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러시아의 침공 이후 수도 키이우를 떠나 전투 일선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신화=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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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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