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자본주의로 원만하게 전환됐다면

[경제지리학자들의 시선] 포스트 사회주의 체제 전환 관점에서 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전 세계가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긴 터널의 출구를 기대하기 시작할 즈음 발발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 경제는 다시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것 같다.

2021년 봄부터 우크라이나 접경지역에 병력을 집중시키고 군사적 압박을 시작한 러시아는 2022년 2월 24일 이른 아침,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Київ)를 비롯한 북동부 도시 하르키우(Харків), 중부 도시 드니프로(Дніпро) 등을 공습함으로써 전쟁을 본격화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양측 군인은 말할 것도 없고 우크라이나의 무고한 민간인 사상자 수도 크게 늘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현실화' 된 것은 최근이지만, 분쟁의 씨앗은 이미 오래전에 뿌려졌으며 비교적 가까운 역사 속에서도 그 근간을 찾아볼 수 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로 중동부유럽(Eastern and Central Europe)과 구소련(the former Soviet Union)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민주화, 시장화 요구에 직면하여 기존의 질서가 완전히 뒤바뀌는 '포스트 사회주의 체제 전환'을 겪어왔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크라이나는 1991년 8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합(USSR: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줄여서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고, 같은 해 12월 소련은 좀 더 느슨한 연합체인 독립국가연합(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으로 해체됐다.

지정학-지경학적 관점(geo-political and geo-economic perspective)에서 바라본 우크라이나 또한 일반이 주목하기 훨씬 이전부터 학자들의 많은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었다. 유럽과의 관계에 있어서 유럽의 경계선이 동쪽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지, 우크라이나가 유럽에 포함될 수 있을지에 관해 의문이 제기되었던 지역이며, 정치학자들은 언젠가 일어날지도 모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분쟁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여왔다.

분쟁에 대해 객관적 시선이 필요하다

지난 3월 1일 <포브스>는 이번 전쟁을 두고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소셜 미디어 전쟁(social media war)이라고 평가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소셜 미디어 채널들을 통해 도움을 요청하고, 투쟁의 결의를 다짐하는 성명을 발표하거나 각국 대표들 앞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시민들도 스마트폰으로 전쟁의 참상을 촬영하고 소셜 미디어에 업로드하여 전세계 사람들과 공유한다. 소셜 미디어는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얼굴, 슬픔과 분노를 기존 미디어보다 훨씬 빠르고 생생하게 전달함으로써 서로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연결하고, 연대할 수 있게 한다. '#standwithUkraine'와 같은 해시태그를 달거나 스카프나 리본, 티셔츠에 우크라이나 국가의 형상이나 깃발, 문구를 새겨 넣어 연대 의식을 표현할 수도 있다.

이런 방식으로 자국민에게 전쟁의 참상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을 우려한 러시아는 반러시아 행보를 보인 소셜 미디어 매체를 차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라디오나 텔레비전, 차세대 소셜 미디어조차도 이 전쟁 이면에 감춰진 본질을 모두 보여주지는 못한다.

미디어가 종종 묘사하는 '푸틴에 대한 악마화(demonization of Putin)'라든지 푸틴과 러시아를 간단히 동일시해버리는 방식들은 당면한 문제를 보다 냉철하게 바라보고 해결하는 데 도리어 방해가 될 때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가 어려운 것 같다.

포스트 사회주의 체제 전환은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은 포스트 사회주의 체제 전환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중동부유럽과 구소련, 더 넓게는 중국과 베트남처럼 과거에 중앙집권적 계획 경제 체제를 채택했던 국가들이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로 대표되는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였는데, 이를 '포스트 사회주의 체제 전환'이라고 하고, 이를 공간적 측면에서 연구하는 분과 학문이 바로 '포스트 사회주의 체제 전환 지리학(geographies of post-socialist system transformations)'이다.

경제지리학자 에이드리언 스미스(Adrian Smith)는 포스트 사회주의는 체제 전환 시점 이전과 이후가 '단절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 국가 사회주의 체제의 유산이 이후 발전 경로에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는 '연속적'인 전환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단선적 이행'과 '연속적 전환'을 구분하였다.

처음에 주류 경제학자들은 중동부유럽과 구소련에서 발생한 자본주의로의 체제 전환 과정을 '단선적 이행'의 관점에서 파악했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등의 국제 금융 기관은 자유화(liberalization), 안정화(stabilization), 민영화(privatization)를 특징으로 하는 구조 조정 성격의 정책 패키지를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 사실상 강제적으로 수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자본주의로의 체제 이행을 계획했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이전의 관행들로 점철된 국가 사회주의 체제의 유산은 빠르게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중동부유럽과 구소련에서 시장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승리라는 목표는 균등하게 달성되지 않았다. 현실 속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은 '공통의 공간(common space)'을 만들어내기보다는 민족 정체성과 과거 사회주의 제도의 유산, 기존 권력 구조의 영향을 받아 지역별, 국가별로 상이한 혼성적인 사회 구성체(hybrid social formation)를 만들어냈다.(1)

새롭게 도입된 시장 경제 제도가 이전보다 더 나은 삶을 보장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의 청사진을 그려줄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다면 몰라도, 체제 전환 과정에서 중동부유럽과 구소련의 많은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은 '이행 침체(transitional recession)'라고 불리는 극심한 경기 침체를 겪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이들 국가에서 시‧공간적으로 다양한 신자유주의 변종이 나타나면서 사회적 배제와 불평등을 심화시키기도 한다.

구소련의 체제 전환 과정, 그러니까 소련이 해체되면서 등장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체제 전환 과정의 특징은 무엇일까? 우선, 중동부유럽과 구소련에서 나타난 체제 전환 과정을 유형화한 연구에 따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체제 전환 유형은 '기존 국가 사회주의 체제 하의 네트워크가 지속(the endurance of pre-existing networks)되고 새롭게 강제된 경제적 합리성에 대해 저항하는 기존 제도가 단절(the insulation of institutions)되는 유형'에 가깝다.(2) 

새롭게 도입된 자본주의 질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자, 체제 전환에 대한 암울한 전망이 커지면서 개혁을 추구하던 세력이 권력을 잃고 쇠퇴하였고, 그 자리를 국가 사회주의 체제 하의 엘리트들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정치 개혁을 통해서 민주적 정권교체가 보장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권위주의적 정부는 언론을 통제함으로써 자신들이 계속해서 정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체제 전환에 대한 성과와 기대가 희미한 상황에서 친서방적이며 시장 개혁을 추구하는 정당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어려워진다. 러시아 체제 전환 과정에 대해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러시아의 경우, 체제 전환은 시장 경제 옹호자들이 약속했거나 희망했던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다. 구소련 체제를 경험했던 대다수 주민들은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삶이 과거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예견했던 삶보다 더 나빠졌다고 느낀다. 미래에 대한 전망은 암울하다. 중산층은 초토화되었고, 정실(情實) 자본주의와 마피아 자본주의가 새롭게 등장했다."

우크라이나 역시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충격요법(shock therapy)'으로 불리는 급진적인 시장 개혁 프로그램을 채택하면서 극심한 '이행 침체'를 겪었다.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파탄 지경에 이르렀고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으로 평생 모은 저축은 휴지 조각이 되어 버렸다. 체제 전환을 통해서 더 나은 삶을 기대했던 사람들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이 틈새에서 반동적(反動的)인 민족주의가 등장했다.(3)

국가 사회주의 계획 경제 체제에서 시장 자본주의로의 체제 전환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건전한 제도 구축과 개혁에 대한 사회 구성원의 동의와 자발적인 노력, 거시 경제 안정화를 위한 자금 지원 등의 여러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의 국제 금융 기관들은 체제 전환 초기에 러시아가 간절히 원했던 안정화 기금에 대한 지원 결정을 자꾸만 미뤘다.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는 그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1992년은 미국 대선을 앞둔 해였는데, 재선에 도전한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이 상대 후보로부터 '대외 정책 대통령'이라는 비난을 받아 러시아에 대한 자금 지원과 같은 중요 대외 정책 결정을 주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부시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하고, 1993년 1월에 빌 클린턴(Bill Clinton)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둘째, 당시 미 국방부는 방위계획 지침을 작성하면서 러시아를 미국의 잠재적 경쟁상대로 규정했다. 애초부터 러시아는 (다른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은 몰라도) 유럽연합이나 북대서양조약기구의 회원국이 될 나라로 점쳐지지 않았다. 현시점에서 당시 미국의 속마음을 알 수 없지만, 최소한 백악관 고위 관료들은 러시아를 진정으로 도와주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나가면서

역사에서 '만약'이란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만약'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자본주의로의 체제 전환 과정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러시아에서 푸틴과 같은 통치자가 그렇게 오랫동안 권력을 쥘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도 폴란드나 체코, 슬로바키아 등과 같이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포스트 사회주의 체제 전환이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임을 보여준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미소 간 이념 대립은 종식되고 신자유주의가 주도하는 세계화에 의해 세계 경제 공간이 균등하게 재편된 것처럼 보였지만, 현실은 다양한 경제 체제들이 공존하는 복잡한 그림을 만들었다.

“나는 단지 살고 싶단 말이에요!”라고 절규하는 우크라이나 주민의 얼굴이 떠오른다. 러시아는 지금 당장 우크라이나에 대한 폭력을 멈춰야 한다. 생명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 필자 주석

(1) John Pickles, 2010, The Spirit of Post-Socialism: Common Spaces and the Production of Diversity, European Urban and Regional Studies, 17(2), pp. 127~140

(2) John Pickles and Adrian Smith, eds., 1998, Theorising Transition: The Political Economy of Post-Communist Transformations, Routledge.

(3) 알렉스 캘리니코스, 로잘리, 김준효, 이원웅 외 저, 우크라이나 전쟁: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각축전, 2022, pp. 107~108.

■필자 소개

김부헌 박사는 현재 서초고등학교에서 지리교사로 재직 중이며, 포스트 사회주의 체제 전환 지리학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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