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무너진 하늘>
"손석학(스님은 필자가 정년퇴임한 2018년경부터 필자를 그렇게 불렀다), 코로나19에 잘 지내시지요? 언제 지방 내려가실 일 없나요?"
"내일 지방 답사 가는데요."
"아 그러시면, 지나가는 길에 절에 들르세요. 드릴 것이 있어서요."
다음 날 만기사를 들렀다. 2021년 초의 일이다.
"스님, 저 왔습니다."
"어서 오세요. 이거 받으세요."
스님은 책 세 권을 건네주셨다. <무너진 하늘 : 혁명과 박헌영과 나> 1, 2, 3권이었다. 책을 받자마자 대강 훑어보니 해방정국을 그린 만화였다.
"야~ 일제시대에 이어 드디어 해방정국도 만화로 만들었군요. 이정 선생님의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6권의 만화로 그린 것도 대단한 작업인데 거기에 해방정국까지 만화로 만들었네요."
"일제시대로 끝낼 수는 없잖아요."
"일제는 독립운동이라 시비 걸 수 없지만, 해방정국은 정말 논쟁적인데 어떻게 다루었나. 기대가 되네요."
"유병윤 화백이 고생을 많이 했지요."
"스님도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저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요."
"그래도 이게 보통 일인가요."
"다 부처님이 도와주셔서 가능했다고 봅니다."
"일제시대를 다룬 만화<경성아리랑>도 아예 제목을 <만화 박헌영>으로 바꾸셨데요?"
"그렇습니다. <경성아리랑>은 낸 뒤 책을 읽은 지인이 연락을 했어요. 박헌영 선생님 이야기인데 제목을 <박헌영>으로 하면 되지, <경성아리랑>이 뭐냐고. 맞는 이야기더라고요. 그래서 바꿨습니다. 이제 눈치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손석학, 소생이 이 만화를 만드는 이유를 아세요?"
"만화가 대중적으로 쉽게 내용을 알릴 수 있기 때문 아닌가요?"
"맞는데 그것만은 아닙니다. 빈승이 만화를 만드는 이유가 두 가지에요. 하나는, 손석학 말대로, 만화라는 대중적인 형태를 통해 이정 선생님의 삶과 생애를 알리고 싶은 거예요. <이정 박헌영전집>은 학자들 같은 전문가들을 위한 것이고 그것을 끝내고 나니 선생님을 대중적으로 알릴 방법이 무엇인가, 고민을 하다가 만화를 그리기로 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요?"
"학자들이 보니까, 아무리 내가 자료를 주고 해도 자기들 입맛에 맞게 글을 쓰더라고요. 그것이 아닌데 싶은 것도…. 그래서 내가 이정 선생님 이야기를 학자들을 거치지 않고 직접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이런 깊은 뜻이 있었나요? 그것까지는 생각 못 했습니다."
"학자라는 분들이 이상하더라고요. 자료나 사진을 어렵게 구하면, 필요하니 가서 쓰고 꼭 갖다 주겠다고 하고는, 한 번도 돌려주는 것을 못 봤어요."
"그런가요? 같은 학자로 할 말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두산그룹의 창립자인 박승직 선생님이 친일파 명단에 오르고 그랬는데, 박승직 선생님이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의 자금창구였어요."
"박승직이요?"
"예. 특히 박승직이 한국 최초의 근대기업인 박승직상점을 만들었는데 이를 통해 무역을 했어요. 그래서 소련이 보내주는 공산당 자금 등을 이를 통해 들여와 이정에게 전달한 것이에요. '눈물 젖은 두만강'도 작사가 김용환 선생이 이정 선생님이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잘 탈출했다는, 박승직에게 보내는 암호였던 것이고요(2022년 3월 29일자 28회 눈물 젖은 두만강 참조). 따라서 표면으로 드러난 박승직의 친일 행각만 보고 그를 친일파라고 낙인찍는 것은 잘못이에요. 이 같은 사실을 친일 인명사전 만드는 지인들에게 알려줬는데도, 제 주장이 물증이 없다고 박승직을 친일파에 넣었어요. 그게 물증이 있겠어요? 답답한 일입니다."
"안타깝네요. 어떤 과정을 통해 검증을 했는지 모르지만, 학자라는 것이 원래 그렇습니다."
"하여간 전집에 이어 만화도 냈으니 이제 한산스님이 빈승에게 남긴 숙제를 대강 끝낸 것 같아요. 세상이 좋아지면, 아버지의 자료를 만들어 역사적으로 평가받게 하라는 숙제 말입니다."
"정말,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예. 이제 평생의 빚을 갚았다는 생각이 들고 저 세상을 가도 이정 선생님과 한산스님을 떳떳하게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사실 그동안 이 일을 하느라고 엄청나게 돈이 들어갔어요. 특히 요즈음 재정적으로 어려워 만화작업을 마무리하는데 애를 먹었습니다."
"그러셨겠습니다."
"예. 만기사가 신도도 적고 의욕적으로 시작한 납골당도 잘 되지가 않아서요. 그러다보니 예전에 자주 만들었던 저녁자리도 뜸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많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 이제 별로 안 남아 쓸쓸합니다. 빈승이 잘 나갈 때, 정각(김성동 작가)이 '그래봐야 돈 떨어지면 다 떠날 사람들이니 자제하라'고 충고했던 것이 가끔 생각납니다(2022년 5월 10일자 52회 '이정상' 참조). 그래도 손석학, 김세균교수가 자주 찾아와줘서 고맙습니다. 허유 화백, 심지연 선생, 양승태 선생, 최갑수 교수도 그렇고."
"별 말씀을요. 사실 예전에는 방학마다 이것저것 글 쓴다고 외국을 다니느라고 7월 19일 이정선생님 제사도 참석을 못 하는 등 자주 찾아뵙지 못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외국에 못 나가니 자주 찾아뵙게 되네요. 그래서 요즈음 불교의 연기법이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코로나19 덕분에 외국에 못나가 한국현대사 기행도 하고 스님도 자주 뵙게 되니까요"
"손석학, 김 교수 등과 식사라도 자주 하고 여행이라도 가고 그래야 하는데 그동안 필생의 숙제하느라고 재정적으로 어려워 여행도 못 갔습니다. 이제 대강 숙제 끝났으니 같이 여행이나 다닙시다. 사실 빈승이 죽기 전에 꼭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지요?"
"오로라에요. 우주의 신비이기도 하지만 허공 속에 정처 없이 떠도는 빛이 그동안 정처 없이 떠돈 제 영혼의 질주를 보는 것 같아 꼭 보고 싶네요."
"아~ 제가 여행을 진짜 많이 다녔는데, 오로라는 저도 아직 못 봤습니다. 아이슬란드나 노르웨이를 가야 할 것 같은데 코로나19 풀리면 갈 수 있게 연구해 보겠습니다."
63. 자신의 흔적을 찾아서
"스님, 코로나19에 잘 지내시지요?
"예. 빈승은 괜찮습니다. 손석학이 외국을 못 가는 대신에 한국현대사기행을 쓰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주 좋은 기획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런데, 이정 선생님 생가 주소가 예산의 어디지요? 정확한 주소 좀 알려주세요. 현대사기행 충청 편에 이정 선생님 이야기를 준비 중인데 생가를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특히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7월 19일 이정 선생님 제사에 사람들이 모이기도 어려울 것 같으니 대신 생가나 가볼까 하는데요."
"그래요? 같이 가면 되지요. 19일은 저 혼자라도 선생님 제사를 지내야 하니 안 되고, 내일 시간 되세요?"
"그러시면 고맙지요. 내일 아침 8시까지 절로 가겠습니다."
2020년 7월 15일, 원경스님은 나, 그리고 동행한 심지연 교수, 최풍만을 데리고 예산의 박헌영 생가, 박헌영이 자란 산양면 국밥집터, 박헌영이 다닌 대흥초등학교 등을 다니며 설명해줬다.
"우리 사회주의운동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학자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지요?"
"그 운동이 엄청난 비밀을 요구했던 만큼, 많은 경우 가족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러면서 원경은 이정과 조봉희, 한산, 김소산, 김해균이 연결되어 있음을,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도 정태식이 친척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설명했다.
스님과의 한국현대사 기행, 원경의 흔적을 찾는 기행은 이렇게 시작했다.
"지리산도 중요하지만, 회문산과 가마골을 알아야 빨치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요."
보름 뒤, 억수같이 퍼붓는 폭우로 이현상이 사살된 하동 빗점골 답사를 포기하고 남원 뱀사골 꼭대기에 위치한 해발 650미터의 와운마을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원경스님이 말했다. 다음 날, 일정에 없었던 전북 순창에 있는 회문산과 전남 담양의 가마골로 향했다.
"여기에 남로당 간부들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어요. 여기서 아이들과 노래 부르고 놀던 생각이 나요. 이중 심사를 해서 북한으로 보냈는데…."
가마골에서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스님의 표정에는 애잔함이 어려 있었다(2022년 3월 11일자 18회 가마골 참조).
"손석학, 이번에는 어디로 답사 갑니까?"
"제주도요."
"아 그래요. 빈승도 같이 갑시다. 빈승이 언제 제주도를 다시 갈 기회가 있을지 모르니, 시간을 내겠습니다. 사실 빈승이 20대 때 제주도에서 5년 이상 살았습니다."
"아 그러셨어요? 5년 이상이면, 오래 사셨네요."
"예, 아마도 젊었을 때 머문 곳 중 가장 오래 머물렀을 겁니다."
2020년 9월 초, 원경스님은 나, 김세균 교수와 함께 제주도에 도착했다.
"기사양반, 어숭생저수지로 갑시다."
제주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원경은 한라산 중턱에 있는 어숭생저수지로 가자고 했다.
"어숭생, 다 왔습니다."
저수지를 바라보는 스님의 눈이 평소와 달리 촉촉해 보였다.
"제가 국토건설단에 끌려와 여기에서 노숙하며 1100고지 공사에 투입되어서 곤욕을 치렀습니다."
"스님이 박정희 때 강제노동수용소인 국토건설단에 끌려가셨어요?"
처음 듣는 소리라 놀라 물었다.
"예."
"제가 스님 인터뷰 다 읽었는데, 그런 이야기는 안 나오던데요?"
"너무 창피해서 지금까지 인터뷰에서 얘기 안 했습니다."
스님은 나와 김 교수를 서귀포근처 하논오름 근처로 인도했다.
"이 절이 4.3 때 불난 절을 제가 1968년 내려와 중건한 절입니다. 이 절 짓고 도장 만들어 방황하는 동네청년들 운동 가르치고 하다가 동네깡패들의 신고로 국토건설단에 끌려갔지요."(2022년 4월 12일자 37회. 반란의 섬 제주도, 2022년 4월 15일자 38회 강제노동수용소 참조)
"손석학, 가는 길에 금산 들렀다 갑시다."
"금산이요?"
"예. 이현상 생가 들렀다 갑시다."
고 노회찬 의원 고등학교 동창으로 그를 오랫동안 후원해왔고 굴양식을 하고 있는 장석 시인의 초청으로 원경스님, 김세균 교수와 통영에 가서 잘 대접을 받고 올라오는 길에 스님은 금산에 들르자고 했다.
"스님, 이현상 생가라면, 외부리로 가겠습니다."
금산이 도착해, 답사를 하러 1년 전 가본 적이 있는 외부리로 가려고 하자, 스님은 말렸다.
"아니 거기 말고 저기 인삼센터에 들릅시다."
"아이고, 스님 오랜만에 들르셨네요."
"김 사장, 인사하세요. 이 분이 빈승이 좋아하는 김세균 교수입니다. 얼마 전 상처도 하고 몸이 허하니 좋은 한약이나 좀 지어주세요."
김 교수가 요즈음 건강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약을 지어주고 싶었지만 한약 지으러 가자고 하면 안 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이현상 생가를 간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스님의 따뜻한 마음과 섬세함에 가슴이 뭉클했다.
"스님, 한국현대사기행도 다 끝났고 코로나19도 진정되어 가니 내년(2022년) 초에 이정 선생님 흔적을 찾아가는 답사를 하고 싶은데요.
"그러세요?"
"예. 북한을 못 가는 것이 문제지만, 3.1독립운동 후 밀항한 일본, 그리고 거기서 독립운동 위해 찾아간 상하이, 고려공산청년회 운동을 한 베이징, 국내 잠입을 시도하다가 체포된 중국국경도시 단둥, 일제 감옥에서 똥을 먹고 병보석으로 석방된 뒤 두만강을 넘어 탈출한 러시아의 하산, 하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향했던 시베리아 횡단열차, 이정 선생님이 공부한 모스크바레닌국제학교,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중 일제에 붙잡힌 상하이 베이징로, 상하이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온 나가사키와 시모노세키 등을 한 바퀴 돌아보고 조선공산당 창립 100주년이 되는 2024년에 맞춰서 책을 낼까 합니다. 관련된 정보가 있으면 알려주세요."
"그래요. 그런 여행이면 저하고 같이 가야지요."
"시간도 많이 걸리고 고된 여행이 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무조건 시간을 내겠습니다. 꼭 같이 가고 싶습니다."
"아~ 그럼 잘 됐습니다. 스님, 헌데 기획이 하나 더 있습니다."
"뭐지요?"
"이 종이 좀 보시지요. 제가 여러 자료를 보고 스님이 태어난 청주 무심천으로부터 지리산 제주도 등 스님이 거쳐 간 장소를 뽑은 것입니다. 여기를 돌면서 답사를 해 스님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데 같이 다니시며 설명을 해주시지요."
"무슨 중이 자기 이야기를 남깁니까!"
"스님, 스님 개인의 이야기가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기록입니다. 스님처럼 한국현대사에 의해 기구하게 산 사람이 있습니까? 이를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
"꼭 남기셔야 합니다."
"얼마 뒤인 12월 13일 조계종 종정 선거가 있어요. 그 때까지는 바쁘고 선거 끝나면 바람도 쐴 겸 같이 돌아다닙시다."
일주일 뒤인 2021년 12월 6일 원경스님은 입적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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