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덕에 세상에 나온 '박헌영 이야기'

['박헌영의 아들' 원경 대종사 이야기] 58~59화

58. 박정희와 박헌영

"스님, 박갑동 선생님이 스님을 뵙고 싶다고 해서 모셔 왔습니다."

잊혀진 좌익 독립운동가에 관심이 많아 원경과 가깝게 지내던 안재성 작가(나중에 <이현상평전>과 <박헌영평전>를 쓴)가 2008년 어느 날 만기사에 박갑동 씨를 모시고 왔다. 

박갑동은 일제시대부터 공산당운동을 했으며 해방 후 조선공산당 기관지인 <해방일보>기자를 했고 박헌영의 측근으로 박헌영이 월북한 뒤 지하에서 남로당을 이끌었다. 그는 한국전쟁 때 북한으로 넘어갔지만 1953년 남로당 숙청에 당해 수용소 생활 후 1957년 북한을 탈출해 일본에서 생활하며 '북한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 원경은 만기사를 찾은 박갑동과 아버지 박헌영과 박정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원경스님

"박 선생님, 어서 오십시요. 원경입니다."

"박갑동입니다. 이정 선생님의 자제분을 이렇게 뵈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저도 이렇게 빈승을 찾아주시니 감사하고, 이정 선생님과 같이 일하신 어른을 뵈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실례지만 올해 춘추가 어찌되시지요?"

"제가 1919년생입니다. 3.1운동 직후에 태어났지요."

"이정 선생님보다 19살 어리시네요. 그러시면 올해 아흔이시네요."

"아마 그럴 겁니다."

"연세에 비해 너무 건강하십니다."

"1953년 김일성 밑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그런 것 같습니다. 57년에 북한을 탈출해 다시 태어났으니… 이제 오십 둘인 셈이지요. 하하하"

인사가 끝나자, 원경은 박갑동 씨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선생님을 뵈면 꼭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선생님이 1973년과 1974년 <중앙일보>에 남로당 이야기를 연재하면서 이정 선생님 이야기를 6개월가량 쓰셨잖습니까?"

"예. 맞습니다."

"당시 김지하가 '오적'이란 시를 썼다가 감옥을 가고 유신의 칼날이 시퍼렇던 시절인데 이정 선생님 이야기가 이렇게 주요 일간지에 매일 연재되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당신이 북에서 탈출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글을 어떻게 실어줄 수 있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어찌된 사연인지, 이렇게 뵙게 됐으니 한번 여쭤 보고 싶습니다."

"아 그렇게 생각하실 만합니다. 제가 생각해도 이상하니까요."

"그렇지요?"

"예. 제가 일본에 있는데 중앙정보부 사람이 찾아와서 '각하께서 선생님을 한번 보고 싶다고 하시니 시간이 되실 때 한국에 한번 들어가시지요'라고 하는 게예요."

"중앙정보부가요?"

"예. 그래서 한국에 들어와 박정희를 만났습니다. 청와대에 들어가 박정희를 만났더니 '당신이 박헌영 선생을 잘 알고, 기자 출신이기도 하니, 박헌영과 남로당에 대해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 줄 수 있느냐'고 부탁하는 것이에요. 헌데 조금 있다가 <중앙일보>의 이병철 회장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러자 이 회장에게 '이 분에게 지면을 주고 최고대우를 해주라'고 지시하더라고요. 그래서 쓰게 된 것이지요. 정말 대우를 너무 잘 해줘, 고료로 아파트를 세 채나 샀습니다."

"아니 이정 선생님 이야기를 박정희가 쓰라고 부탁했다는 것입니까?"

원경은 너무도 놀라서 되물었다.

"그렇다니까요. 그게 아니면 유신시대에 이정 선생님 이야기를 어떻게 쓸 수 있었겠어요. 쓰다가 기억이 안 나면 중정(중앙정보부)에 부탁해 자료를 받았고 쓰고 나면 남산에서 읽어보고 걸러서 내보냈지요."

이제 유신시대에 박헌영 이야기가 일간지에 등장한 수수께끼가 풀렸다.

"진짜 재미있는 것은 이제부터입니다. 박정희가 과거 남로당원이었던 것은 알지만 이정 선생님에 대해 박헌영이 아니라 '박헌영 선생'이라고 불러, 깜짝 놀랐습니다. 헌데 이어서 자신이 해방정국에서 박헌영 선생의 8월 테제를 읽었는데 감동을 받았고 자신의 인생의 세계관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박정희가 8월 테제에 감동을 받았고 8월 테제가 자신의 세계관이 됐다고 하니,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어요."

"이정 선생님의 8월 테제를요? 8월 테제라는 것이 아직 한반도는 사회주의혁명을 할 단계가 아니라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 단계이니 완전한 민족독립, 농지개혁 등 농업혁명, 출판, 결사, 사상의 자유 등 민주주의 투쟁을 하고 2단계에 들어서 사회주의 혁명에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지 않습니까? 박정희가 해방 후 남로당원으로 활동했지만, 이 같은 주장이 자신의 세계관이 됐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주장인데요."

"그렇습니다."

"허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다만 박정희가 이정과 남로당에 대한 글을 쓰라고 한 것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등 남북협상 국면에서 한국 공산당운동의 정통은 김일성이 아니라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이며 김일성은 이정 선생님을 처형한 나쁜 놈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해방정국에서의 남로당, 그리고 이에 관련된 자신은 김일성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여간 박정희 덕분에 이정 선생님 이야기를 써서 그 분에 지고 있던 빚은 조금은 갚은 것 같고, 그 글 덕분에 이렇게 죽기 전에 이정 선생님 자제분까지 보게 되니 평생 가져온 마음의 짐을 하나 더 덜었습니다."

▲ 서슬퍼런 유신시절 박정희는 박갑동을 청와대로 불러 박헌영 이야기를 연재하도록 조치했다. ⓒ자료사진

59. <못 다 부른 노래>

"이 세상에 태어나 인연 맺은 모든 분들께 삼가 이 책을 바칩니다."

2010년 원경은 자신의 고희를 맞아 이정 박헌영 선생의 53주기인 7월 19일에 <못 다 부른 노래>라는 시집을 출간했다. 오랫동안 김지하, 황석영 등 내로라하는 문인들, 예술가들과 어울려 오며 몰래 비장의 언어로 시를 써온 것이다.

▲ 2010년 고희 기념으로 출판한 시집 <못 다 부른 노래>

원경은 그동안 써온 200여 개의 시를 모은 이 책을 내면서 "어릴 때부터 백석의 시집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세상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으나 ('네가 성장하며 낙서한 글을 보면 저항적 연구가 많으므로 지금부터 글 쓰는 것을 삼가야 할 것이다'라는) 한산스님의 말씀을 따르느라 그동안 숨겨놓았던 낙서들을 꺼내놓게 되었는데 내 삶의 언어로 자연스럽게 써놓은 것이 '못 다 부른 노래'가 되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이 시집은 박헌영 선생의 동지이자 스님을 어린 시절부터 보호하고 길러주셨으며 스님을 부처님에게 인도하신 한산(김제술)스님에게 바치는 원경스님의 마음의 기록이면서 또한 스님과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올리는 큰 절 이기도 하다.'

발간사의 한 부분이다. 이동순 문학평론가는 이 책의 해설에서 원경의 시들의 특징을 '천진무구, 그리움과 기다림의 비가'라고 요약했다. 어찌 시뿐이라! 그의 삶 자체가 천진난만, 그리움과 기다림의 비가였다.

'절집 사람이 도는 닦지 않고 무슨 속한들과 그렇게 교분을 나누게 되었을까? 득도라는 것이 별건가, 원래 시정에 도가 있는 법이지. 그는 박헌영 선생의 남은 혈육으로서 태어나서부터 속세를 떠난 뒤에도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속내를 숨기고 살아와야만 했거니…. 그가 유행가조로 수더분하게 마음속의 응어리를 틀어낼 것이니 숙연하게 들어줄 작정이다.'

시집에 대한 황석영작가의 화답이다.

▲ 시집 출판기념회에서 인사하는 원경 ⓒ원경스님

-귀뚜라미-

아비가 죽었나 자식이 죽었나

찬란한 태양도 보이지 않고

밝은 달도 보지 않고

귀뚜라미는 땅속 깊숙이 숨어서 운다

남몰래 혼자 운다

적막강산에 고독을 짠다

(후략)

-통곡-

수많은 별빛

무성한 오늘 밤에도

이렇게 통곡하지 못하는

서러운 삼백예순 기원을

조용히 가슴속에 불을 놓고

흐느끼고 있는 영혼

기적은 빗겨가고

저녁노을 비친 하늘 아래

노래도 가고

꿈도 가고

표백된 울음 따라서

눈물에 더럽혀진 얼굴

오로지

그 한 이름 불러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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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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