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영정 앞에 9권 전집을 바치다

['박헌영의 아들' 원경 대종사 이야기] 56~57화

56. 대원각

"조봉희에서 김영한으로 소유주가 바뀌었네!”

성북동에 위치한 7000평의 최고급 요정 대원각의 등기부 등본을 보고 있자, 원경은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1950년 3월 예지동 아지트를 떠나 한산스님과 함께 들렀던 기억으로부터 고모 조봉희와 누이 김소산의 추억, 그리고 한산스님이 들려준 말들이었다.

"대원각은 이정 선생님이 한 독지가가 준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서 언니인 조봉희 여사에게 맡겨서 조선공산당 운동에 필요한 비자금 관리에 사용하던 곳이란다.”

"대원각은 아버지(익산갑부 김병순)가 어머니(조봉희)에게 사준 것이란다."

서로 모순된 이야기로 무엇이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고모 조봉희가 법적으로는 소유주였고 운영했던 요정이었다는 점이다. 헌데 이를 관리하던 딸 김소산이 한국전쟁 중 처형을 당하면서 운영에 문제가 생겼다.

대원각에는 본명이 김영한이고 자야라고 부르던 기생이 있었다. 자야는 함흥 요리집에서 일하던 시절 함흥의 교사였던 시인 백석과 사랑에 빠져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줬고 3년간 동거했다고 주장하는 여자였다(이에 대해 백석 연구자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 조봉희로부터 김영한으로 이름이 바뀐 대원각 등기부 등본 ⓒ원경스님

"어머님이 나에게 '나는 이미 가게에서 손을 뗀 상태고 소산이가 운영을 해왔는데 좌익 활동으로 조사를 받으러 가며 자야에게 잠시 가게를 맡아달라고 했는데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다'면서 '나중에 자야에게 너나 병삼이에게 돌려달라고 해라'고 말씀하셨다."

한산스님은 병삼이에게 이 같은 사연을 전해주며 "네가 크면 대원각을 챙겨서 좋은 일에 쓰라"고 당부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 하에서 요정정치가 꽃 피우면서, 대원각은 삼청각과 함께 '대한민국의 3대 요정'으로 번창했다. 1970년대 들어 가호적을 획득하고 1980년대 들어 자신도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사회도 민주화가 되면서, 원경은 이제 대원각을 돌려받을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헌데 등기부를 떼어 보니 소유주가 조봉희로부터 김영한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 이제는 길상사로 변한 대원각 ⓒ손호철
▲ 이제는 길상사로 변한 대원각 ⓒ손호철

"어찌된 일인가 일아 보니, 자야가 1950년대 정계의 거물인사인 이○○의 애첩으로 지내며 그를 통해 등기를 자기 앞으로 옮겨 놓은 것이에요. 그래 빈승이 자야를 만나 등기부를 보여주며 대원각이 당신 것이 아니라 내 고모인 조봉희 것이며 고모님이 '한산스님이나 내가 나중에 챙기라'고 하셨다며 달라고 했지요. 그러자 자야가 빈승의 말을 받아들이고 대원각을 조만간 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대원각을 돌려받으면, 그곳에 한국전쟁의 희생자들을 달래는 절을 하나 짓고 시민학교를 세워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려고 합니다."

원경은 가까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말하며 의욕에 부풀었다.

"머리가 아프네요."

"스님 무슨 일이 있나요?"

"대원각 때문에요."

"자야가 돌려주기로 했다면서요? 마음이 변했나요?"

"마음이 변한 게 아니라, 대원각을 빈승이 받으면 엄청난 세금을 내야하고 사회적으로도 말이 많을 것 같아 빈승이 수계를 한 용화선원에 기부하는 형식으로 돌려받는 것이 좋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 자야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러자고 했습니다."

"헌데 뭐가 문제예요?"

"용화사의 송담 스님이 대원각이 이정 선생님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껄끄러워서인지, 안 받겠다고 사양하시네요. 그래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하네요. 게다가 자야가 대원각을 넘기는 대신에 백석장학금으로 50억 원을 내라고 하니, 빈승이 그런 돈이 어디 있습니까?"

이처럼 문제가 꼬인 사이, 1997년 자야는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감동을 받았다며, 시가 1000억 원이 나가는 대원각을 덜컥 법정스님에게 기부해 버렸다.

"천억을 준다고 해도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합니다."

자야가 대원각을 기부하며 말해 화제가 된 말이다. 법정스님은 이 자리에 길상사라는 절을 지었고 자야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지어주었다.

이와 관련, 원경스님은 2010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절이 아버지 박헌영의 비자금으로 지어진 곳이며 자야가 자신에게 돌려주기로 약속하고도 갑자기 말을 바꿨다고 주장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 땅을 내가 운영하지 못하는 것도 인연이자 업보지요. 나의 작은 그릇에 담기 어려운 큰 내용이 오려고 하자 인연이 일부러 뒤틀린 것 같습니다."

57. <이정전집>

"한산 스님, 드디어 제가 숙제를 해 냈습니다. 아버님도 이제 편히 눈을 감으십시오."

2004년 봄, 원경 스님은 대웅전에 이정 박헌영의 영정사진을 놓고 눈물을 흘렸다. 이정의 사진 앞에는 9권의 두툼한 책이 놓여 있었다. 원경의 필생의 과제였던 <이정 박헌영 전집> 아홉 권을 출간한 것이다.

1957년 이정이 김일성에 의해 비극적인 처형을 당한 지 47년 만에, 원경이 음독자살을 시도한 뒤 한산스님이 1963년 울릉도로 데려가 "이정 선생님의 전집을 만들어 역사의 평가를 받게 만들어주는 것이 너의 책무"라고 말한 지 41년 만에, 드디어 전집을 출간한 것이다.

▲ 10년 간의 노력 끝에 2004년 9권으로 출간된 이정 박헌영 전집 ⓒ손호철

"우리가 한국현대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로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잊힌 박헌영의 전집을 만들어 역사적으로 복권시켜 주는 것입니다."

1993년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현 명예교수), 윤해동 박사(현 한양대 교수) 등은 원경스님과 마주앉아 박헌영의 저술과 관련자료를 모아 이정 박헌영 전집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역사문제연구소가 출범하고 1991년 원경스님이 러시아를 방문해 이복누나와 러시아의 관련 학자들을 만나고 온 것이 촉발쇠가 됐다. 이렇게 시작된 작업이 무려 11년이 걸린 것이다.

서 교수가 총지휘를 하고 윤 박사가 실무를 총괄한 이 작업은 한국의 진보적인 한국사 연구자들이 거의 모두 동원된 방대한 작업이었다. 사장되고 숨겨져 있는 자료들을 모으는 것부터 큰 문제였다. 이 작업만 1993년부터 1996년까지 3년이 걸렸다. 일제시대와 해방정국의 각종 언론에 실린 기사들과 경찰 및 정보기관에 있는 관련문서를 발굴하고 입력했다.

▲ 역사문제연구소에서 <이정 박헌영 전집>의 실무를 총괄했던 윤해동 박사(왼쪽에서 두번째)가 연구소 운영에 대해 이이화, 박원순 등과 논의를 하고 았다. ⓒ원경스님

"국내만이 아니라 지구 위에 흩어져 있는 모든 자료들을 수집합시다."

서 교수는 특유의 딸깍발이 정신으로 꼼꼼한 자료 수집을 요구했다. 한국전쟁 중 미국이 노획해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 북한의 문서들은 복사를 허용하지 않아 일일이 손으로 베껴 쓸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건 보물단지네!"

사회주의운동사를 공부하고 있던 임경석 박사(현 성균관대 교수)는 '한국사회주의 운동의 기원'에 대한 박사학위논문을 끝내고 박헌영의 일대기를 써달라는 역사문제연구소의 청탁을 받고 1994년 러시아로 날아갔다. 임 박사는 모스크바의 코민테른(공산주의인터내셔널) 문서보관소에서 박헌영이 1928년 감옥에서 병보석으로 석방되어 두만강을 넘어 소련으로 탈출한 뒤 국제레닌학교 입학을 위해 직접 작성한 영문 자기소개서 등 60년이 지난 보물 같은 박헌영 관련 자료들을 보자 놀라움에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거기에는 박헌영뿐만 아니라 한인공산주의운동에 대한 너무도 많은 귀중한 자료들이 숨겨져 있어 임 박사는 전율을 느꼈다. 원경스님은 박비비안나, 러시아 유학생 전현수 씨 등을 통해 여러 주요한 자료들을 구입할 수 있었다.

▲ 전집의 일환으로 임경석 박사가 집필한 <이정 박헌영 일대기>

"이게 무슨 자야?"

"이래서 3년 내에 끝내겠어?"

자료를 수집했지만 상태가 나빠서 독해가 불가능한 것들이 많았다. 번역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3년 내에 모두 끝내려던 작업은 자료수집에만 3년이 걸리고 말았다.

일차적인 자료수집이 끝나자 이를 고치고 분류하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는 어느 정도 시대를 이해하고 자료의 성격을 아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작업이라 현대사를 전공한 대학원생들이 동원됐다.

"이걸 이대로 출판했다가는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지요. 시대적 배경과 의미를 설명한 해제가 필요합니다."

"맞습니다."

"아이고~ 그러면 작업은 더 늦어지는데요."

"경비도 훨씬 많이 들어가고요."

"경비 걱정은 마시고 제대로 된 책을 만들어주세요."

원경은 경비걱정을 말라며 작업을 격려했다. 원래 <역사비평사>가 전집출간을 책임지기로 했지만 경영난에 빠지면서, 모든 경비를 원경이 지원했다(원경스님과 매우 가까운 한 분은 "스님이 대원각과 관련해 거액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했다"며 그 돈이 전집작업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경비만이 아니라 작업이 여러 이유로 중단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원경이 나서 힘을 불어 넣고 위기를 앞장서 돌파해나갔다. 그러나 재정적 어려움, 작업의 어려움에 컴퓨터 파일이 손상되는 사고까지 겹쳐져, 박헌영의 출생 100주년인 2000년에 출간하려던 계획은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10년간의 작업 끝에 2004년 9권의 전집이 완성됐다. 1~3권은 박헌영 자신의 저술, 4~7권은 관련 자료들, 8권은 증언과 회고록, 9권은 임경석 박사가 쓴 박헌영 일대기와 사진자료로 편집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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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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