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가스프롬 임원 잇단 사망…"러 정부 비자금 연관" 의혹

6명 대부분 자살 처리…"사망자 중 재무 흐름 잘 아는 이들 적어도 2명"

우크라이나 침공 뒤 서방 제재에 맞서 러시아가 에너지를 무기화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가운데, 올 들어 러시아 국영 가스기업 가스프롬 등 에너지 기업 전현직 임원들의 사망 소식이 잇달아 전해진다. 대부분의 죽음이 자살로 처리됐지만, 일각에선 가스프롬과 러시아 정부 사이 비밀 자금 흐름이 있다며 내역을 아는 임원들이 암살당했을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지난달 18일 가스프롬의 자회사인 가스프롬방크의 전 부사장이자 러시아 정부 관료를 역임한 블라디슬라프 아바예프(51)가 모스크바 자택에서 아내와 13살 딸과 함께 주검으로 발견됐다. 러시아 국영 <타스> 통신은 아바예프가 총을 손에 쥔 채 발견됐으며, 아내와 딸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아바예프 가족의 죽음으로부터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지난달 19일엔 스페인 카탈루냐에 위치한 별장에서 러시아 천연가스 회사 노바텍의 전 임원이었던 세르게이 프로토세냐(55)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프랑스 보르도에서 부활절 연휴를 보내고 있던 세르게이의 대학생 아들 페도르(22)의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스페인 경찰은 세르게이와 그의 아내, 18살 딸이 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유서는 없었고 세르게이의 몸에서 혈흔도 발견되지 않았다. 스페인 경찰은 초기 조사에서 일단 세르게이가 그의 아내와 딸을 죽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하면서도 세 명 모두 살해당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페도르는 영국 매체 <데일리메일>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공주'라고 부르던 여동생과 사랑하는 어머니를 해쳤을 리 없다. 그 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아버지가 그들을 해지지 않았다는 것만은 안다"고 말했다.

노바텍 또한 1997년부터 2015년 사이 자사에 근무했던 세르게이의 가족 살해 및 자살 관련 추측은 "진실과 상관이 없다고 확신한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아바예프와 프로토세냐는 각 4억달러(약 5100억원) 이상의 재산을 보유한 러시아의 신흥재벌(올리가르히)로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러시아 제재 명단엔 없었다.

이들의 죽음으로부터 두 달 반 전인 1월30일엔 가스프롬 고위관리자 레오니드 슐만(60)이 상트페테르부르크 부근 자택에서 유서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다음 날인 2월25일엔 가즈프롬 전직 관리자 알렉산드르 튤랴코프(61)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자택에서 유서를 남기고 주검으로 발견됐다. 3일 뒤엔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석유 및 가스 업계 억만장자 미하일 왓포드(66)가 영국 남부 서리에 위치한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지난 2일엔 가스프롬 소유의 리조트 크라스나야 폴랴나 임원인 안드레이 크루코프스키(37)가 절벽에서 떨어져 사망했다고 <도이치벨레>가 전했다. 매체는 불과 석 달 여 만에 일어난 잇단 죽음이 위장 자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관련설 등 온갖 추측을 낳고 있다고 보도했다.

추측의 배경에는 2020년 야당 정치인 알렉세이 나발니에 대한 독살 시도를 비롯해 러시아 정부가 반대파에 대해 극단적 탄압을 일삼았다는 의혹이 있다. 2017년 미국 언론 <USA Today>는 3년 간 최소 38명의 푸틴 반대자가 사망하거나 실종됐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뒤 가해진 러시아에 대한 제재로 인해 재산상 손실을 입은 러시아 신흥재벌들은 공개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 왔다. 지난달 19일 틴코프은행 등 온라인 금융 사업으로 큰 돈을 번 올레그 틴코프는 소셜미디어(SNS)에 우크라이나 침공을 "미친 전쟁"이라고 비난했다. 3월 러시아의 알루미늄 대기업 루살 창업자인 올레그 데리파스카는 우크라이나에서의 갈등이 "광기"라며 부정적 견해를 밝혔고 러시아에서 가장 큰 민영 은행인 알파뱅크의 창립자이자 억만장자 은행가인 미하일 프리드먼도 전쟁은 양쪽 모두에게 비극이라며 전쟁 반대 의견을 표명했다. 

다만 <도이치벨레>는 올 들어 사망한 신흥재벌 중 공개적으로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비판 목소리를 낸 사람은 없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연구에 전문성을 갖춘 폴란드 싱크탱크인 바르샤바연구소는 지난달 24일 홈페이지 게시글에 가스프롬 전현직 임원들의 연이은 죽음이 "의심스럽다"며 "사망한 임원 중 적어도 두 명은 회사의 재무 흐름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다"고 썼다. 연구소는 게시글에서 "러시아 정부와 연관된 일부 고위 인사들이 국영 기업(가스프롬) 부패의 흔적을 덮으려는 것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스웨덴 경제학자이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경제고문을 지낸 바 있는 안데르스 아슬런드는 <뉴욕포스트>에 "누가 이를 지시하고 누가 시행하고 있는지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청소'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나한테는 러시아 정부의 살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슬런드는 이 매체에 러시아 소식통으로부터 2021년 말, 그리고 3월 초 러시아 정보기관이 에너지 산업 임원의 이름이 포함돼 있는 두 개의 명단을 작성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 정부가 에너지 산업 내부자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포함해 러시아 정보기관에 의해 수행되는 비밀 작전의 자금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고 의심하고 있다고 봤다.

아슬런드는 "그 명부는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에 의해 푸틴에게 전해졌고 푸틴은 훑어보지도 않고 명단에 있는 모든 이의 제거를 승인했다"며 "푸틴은 가스프롬과 가스프롬뱅크를 통해 많은 자금을 조달한다. 그곳에서 일하는 임원들은 이 비밀 자금에 대해 모두 알고 있다. 가스 부문은 러시아에서 가장 부패한 부문"이라고 덧붙였다.

▲지난달 18일(현지시간) 가스프롬의 자회사인 가스프롬방크의 전 부사장이자 러시아 정부 관료를 역임한 블라디슬라프 아바예프가 주검으로 발견된 러시아 모스크바 현장 근처에서 러시아 경찰이 걷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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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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