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빨갱이 새끼 중'
“원경아, 네가 용주사를 맡아 이끌어나가라."
"아니 큰 스님, 무슨 말씀을! 저는 용주사 같은 본사 주지 같은 것은 안 합니다."
원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화성에 있는 용주사는 조계종의 25개 교구 중 제2교구의 본사로 신륵사를 비롯한 경기도 지역의 절들을 관장하는 막강한 절이다.
"이놈아! 네 아버지는 아버지고, 너는 너다. 네가 태어나 죄지은 것이 없는데 뭐가 문제이냐? 너는 승려로서 문중의 대표의 지시를 잘 따르면 되는 것이다. 너는 절 밥 먹은 지가 몇 년이고 내 밑에서 공부한 것이 몇 년인데 아직까지도 그런 문제를 떨어내지를 못 했느냐?"
"큰 스님, 그래도 세상이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용주사 주지를 하면 시비를 걸 사람이 많습니다."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참았다. 1983년의 일이다.
"원경, 우리 좀 보세."
얼마 뒤 같은 문중은 아니지만 평소 가깝게 지내던 도반이 종로 조계사 옆 여관에서 보자고 연락이 왔다. 나가 봤더니 가까운 중들 몇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제일 가까운 친구가 입을 열었다.
"너 이 새끼, 나쁜 놈!"
갑작스러운 욕에 원경은 놀랐다.
"야 인마. 갑자기 왜 욕을 해?"
"너 이 새끼, 빨갱이 새끼라며?"
원경은 가까운 중들이 자신을 빨갱이 새끼라고 욕하자 충격을 받았다.
"너 이 새끼야! 빨갱이 새끼가 무슨 본사 주지야!"
원경을 용주사 주지를 시키려는 송담스님의 계획이 동료들 사이에 색깔론을 불러온 것이다.
"야 이 새끼들아, 나 주지 안 할 테니 걱정들 마."
원경은 박차고 일어나 여관을 나왔다. 하지만 마음이 씁쓸하기만 했고 몇 년 전 일이 생각났다.
"원경, 너 큰 스님 옆에서 장난치지 마!"
서북청년단이라는 극우단체 출신으로 같은 문중에 있던 한 스님이 보자고 해서 한정식집에 가자 그는 준엄한 얼굴로 경고했다.
"뭐라고?"
"큰 스님 옆에서 알랑거리는 것 관두지 않으면 내가 다 까발려 버릴 거야!"
"뭘 까발려?"
"너 인마, 박헌영 아들인 것 내가 모를 줄 알아?"
"이 개자식이!"
원경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 놈의 배를 발로 차버렸다.
"아야야!"
고통에 신음하는 그의 배를 발로 밟고 말했다.
"야 박헌영이라니! 박헌영이 니네 집 아들 이름이냐! 이 개새끼가!"
"아이고, 나 죽네!"
"너 인마, 네가 그러면 내가 겁먹을 것 같아? 웃기지 마! 나, 세상에 태어나 죄지은 것 없어. 내 아버지 아무데다 갖다 붙이지 마!"
흥분을 가라앉히고 자리로 돌아가 술을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쓰러졌던 스님도 일어나 자리에 앉자, 그에게 술을 한잔 따라줬다.
"우리 아버지에 대해 네가 뭘 아니? 우리 아버지에 대해 그렇게 막 말하지 마라."
"내가 잘못했다."
47. 교통사고
"정각, 괜찮니? 살았냐?"
1983년 봄 원경은 김성동과 함께 원주에서 평소 매우 가깝게 지내던 김지하와 만나 식사를 했다(이때까지는 김지하가 재야민주화운동 세력과 같이 했었다). 식사 후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사고를 내 골짜기로 차가 구르고 말았다. 이차선 도로에서 중앙선을 넘어 추월해 달려오는 트럭을 피하다가 핸들을 너무 꺾어 골짜기로 구른 것이다.
김성동은 머리를 다쳐 뇌수가 밖으로 흘러내린 채 신음하고 있었다. 아직 죽지는 않은 것이다. 원경도 핸들에 가슴을 부딪쳐 가슴 통증이 장난이 아니지만 차에 불이 나기 전에 김성동을 도피시켜야 했다. 헌데 김성동은 손으로 흘러나온 뇌수를 만지려 했다. 원경은 놀라 허리띠를 끌러 김성동의 손을 뒤로 묶고 등에 업었다. UDT 출신답게 자신이 부상을 당하고도 김성동을 업고 골짜기를 올라왔다.
"저기 오는 화물차를 세워 줄 테니 빨리 원주병원으로 가세요."
신고를 받고 경찰차가 출동했지만 이들이 얼마나 피투성이였는지 경찰차에 태우지 않고 화물차를 세워줬다. 원주기독병원 응급실에 김성동을 내려놓고는 반혼수상태로 병원을 나왔다.
"스님, 치료 안 받고, 어디 가세요?"
사고가 난 차가 얼마 전 미군에게 산 중고차인데, 아직 명의이전도 제대로 하지 않아 보험처리 등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선 김지하 집으로 가서 상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혼수상태로 집을 찾을 수 없어, 시내를 헤맸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중이 피투성이로 비틀거리며 거리를 헤매니 사람들이 놀라 다 피했다. 원경은 한참을 헤매다가 김지하 집으로 들어가 "지하야!" 부르고 기절했다. 이 난리 통에도 김지하는 온몸이 붉은 피투성이인 원경을 보고 "역시 원경, 너는 빨갱이야"라고 놀렸다(이후 김지하는 술자리에서 ‘원경 빨갱이인 거 알아?’라고 계속 놀렸다고 한다).
"여기 어디에요?"
김성동이 삼일 만에 눈을 뜨자 문익환 목사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정각스님, 이제 살아나셨네요? 다행입니다. 듣자하니, 어제 기자들이 찾아와 연재하는 <풍적> 원고를 찾느라고 정각스님 배낭을 뒤지고 난리가 났었다고 하더군요."
원고 이야기를 듣자, 김성동의 머리에는 원경과 지낸 시절들, 그리고 사고 과정이 빠르게 지나갔다. 칠장사와 수원포교당에서 만난 뒤 원경과 김성동은 급격하게 가까워졌다. 원경이 예산, 김성동이 보령으로 둘 다 뿌리를 충남지역에 두고 있었다. 원경이 자신의 아버지(김봉한)가 비선조직으로 일하다가 처형당한 박헌영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뒤 둘은 같은 아픔과 한에 혈육 같은 사이로 발전했다.
"많이 먹으라."
기회가 되면, 원경은 김성동을 중국집 골방으로 데려가 중국요리를 시켜주거나,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으면 삼선간짜장 곱빼기라도 시켜줬다. 한마디로, 삼촌이나 친언니 같았다.
김성동은 1975년 종교소설 현상모집에서 당선된 <목탁조> 때문에 승려직을 박탈당했고 이어 쓴 <만다라>로 떠오르는 문제 작가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김성동은 1983년 봄 아버지를 넣은 그 시절 헌걸찬 정신의 움직임을 다룬 <풍적>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1회분 연재를 마치고 2회분 원고를 쓰기 위해 방황을 하다가 인천 용화사에서 원경을 만났다.
이 만남은 인천의 운동권 이호웅, 최원식, 황석영과 끝없는 술자리로 이어졌다. "글을 쓰기 위해 제주도로 가려니 김포에 내려 달라"고 한 뒤 잠이 들어 깨어보니, 제주도가 아니라 원경이 주지로 있던 여주의 흥왕사였다.
"원주 가서 김지하나 만나고 오자고."
정신을 차리고 글을 쓰려고 펜을 들자, 원경은 싫다는 김성동을 반강제로 차에 태워 원주로 향했다. 그 결과는 대형사고였다.
한편 김지하 집에서 정신을 차린 원경은 통증에도 불구하고 옷만 갈아입고 이태원으로 향했다. 의료보험 처리를 하려면 차를 판 미군의 서명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원경은 이태원을 한 달 간 뒤져, 차를 판 미군을 만나 보험처리를 했다. 그 결과, 김성동의 의료비도 해결이 됐고 거액의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박헌영 선생님은 우리 아버지 죽이더니, 원경은 나를 (뇌가 반이 날아간) 반뇌아 병신으로 만들었지요. 2대에 걸쳐 잘 하는 짓이지요."
김성동은 자신의 아버지가 박헌영의 비선조직으로 일하다가 한국전쟁이 나자 산내 골령골에서 이승만 정부에 의해 처형된 사실을 빗대어 두고두고 이 같이 말했다.
"갈비뼈가 9개나 부러졌습니다. 이 상태로 돌아다녔다니, 사람이 아닙니다."
보험 문제가 해결되자 긴장이 풀려서인지, 원경은 가슴이 너무 아팠다. 병원에 가보라는 주변의 권유에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놀랐다. 병원에 누워있자, 송담 큰 스님이 병문안을 와서 물었다.
"원경아, 그래 어디서 고문을 당했기에 이리 호되게 당했느냐?"
"큰 스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절에 네가 고문을 당해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소문이 났다."
"아니 그런 소문이요?"
"그렇다. 그리고 문 앞 복도 쪽에 안기부 요원 같은 친구가 이 병실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는 것 같구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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