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재야
"저 이호웅이라고 합니다."
1977년 송담스님의 지시에 의해 인천 용화사에서 선원 건설을 하고 있던 원경에게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인천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재학시절부터 민주화운동의 맹장이었던 이호웅이었다. 유신반대운동으로 들어갔던 감옥에서 나와 보니 용화사에 독특한 스님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길로 용화사로 달려온 것이다.
이는 원경의 생애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자신의 출생과 관련해 "정치와 세상을 멀리하라"는 한산스님의 가르침에 의해 인간관계에 있어서 매우 조심을 하며 살아온 그가 당시 재야라고 불리던 운동권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는 용화사 출신으로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1973년 이후 여주 산속 골짜기 흥왕사의 주지이기도 했다. 흥왕사에는 이호웅을 통해 군사독재의 수배를 피하는 운동권들이 줄줄이 숨어 들어와 흥왕사는 ‘운동권 하숙집’으로 변했다.
인천에는 이호웅과 가까운 친구이자 당시 대표적인 진보문예지였던 <창작과비평> 그룹에서 일했던 '운동권 문학평론가' 최원식이 있었다. 원경은 이호웅과 최원식을 통해 소설가 황석영, 시인 김지하 등 나이가 비슷한 문학계 ‘반골’들과 급속히 가까워졌다. 김지하와의 깊은 우정은 결국 대형 교통사고로까지 이어졌고(앞으로 쓸 '교통사고' 참조) 황석영은 나중에 원경이 낸 시집 <못 다 부른 노래>에 축사를 써줄 정도로 가까워졌다. 원경, 김지하, 황석영 등에 비해 나이가 한참 어린 이동순 시인도 오랜 인연을 이어오다가 <못다 부른 노래> 출간에 앞장섰다. 원경의 전설적인 인맥은 이렇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의 인맥은 아메바처럼 좌우로 퍼져나갔다.
종로3가 탑골공원 골목 모퉁이를 들어서면 붉은 벽돌담에 검은색 대문을 한 집이 하나 있다. 문화계의 전설적인 술집인 '탑골'이다. 배고프고 술 고픈 예술가, 특히 문인들의 사랑방이었던 이곳은 한 시인이 아침에 들어가 보니 밤새 술을 마시고 사우나를 간 송기원의 청자킷이 걸려 있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실천문학>에서 실무를 맡았던 송기원 작가의 단골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송기원의 자리에는 원경, 희곡작가 안종관, <화엄경>, <꽃잎>, <경마장 가는 길> 등의 문제작을 만든 영화감독 장선우 등이 같이 하며 인생과 예술과 풍류를 논했다. 당시 <실천문학>은 도종환의 시집 <접시꽃 당신>이 공전의 히트를 쳐 송기원이 가난한 예술가들의 술값을 내곤 했지만, 원경이 오는 날에는 그가 술값을 냈다(송기원은 이후 불교에 귀의해 원경에게서 덕문이라는 법명을 얻고 원경이 주지로 있던 만기사에 잠시 머물기도 했었다.).
좌익으로 처형당한 아버지를 둔 비슷한 배경의 이문구 <실천문학> 대표와 <만다라>의 작가 정각(본명 김성동)과도 가까워졌다. 원경은 정각을 통해 <만다라>의 주인공인 현몽스님을 만났다. 현몽을 통해 한국 빈민 르포문학의 효시인 <꼬방동네 사람들>, <어둠의 자식들>의 작가인 이철용을, 그를 통해 <꼬방동네 사람들>을 영화로 만든 인기감독 배창호를 만나 한동안은 매일 어울려 다녔다.
"자 이제 출발합니다." 1984년 12월 12일, 승합차의 운전대를 잡은 장선우 감독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승합차는 서울 종로 운당여관 앞을 출발했다. 이 차에는 원경 이외에도 김지하와 이문구, 송기원, 판소리꾼 임진택 등이 타고 있었다. '민중'의 토착적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 <실천문학>이 기획한 '김지하 사상기행'으로 이문구는 여행기록자로, 원경과 송기원, 임진택은 '술자리 보좌역'이었다.
이들은 계룡산을 첫 행선지로 해서 우금치, 황산벌, 김제, 백산, 광주, 모악산 등을 거치며 땡초라고 불리는 괴승으로부터 풍수학자, 판소리전문가, 증산사상가 등을 만나고 수운 최재우가 칼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는 남원 교룡산성에서 4박5일의 대장정을 끝냈다(이 여행은 <실천문학>에 2회 연재되다가 <실천문학>이 폐간되며 중단됐다가 1999년 <김지하 사상기행>으로 출판됐다. 김지하는 '죽음의 굿판' 발언 등을 통해 1990년대 이후 운동권과 멀어졌고, 원경도 김지하와 멀어졌다).
여운. 1970년대, 캔버스에 신문을 붙이는 작업으로 주목을 받은 전위화가다. 그는 이후 어두운 군사독재의 현실에 민중미술가로 다시 태어났고 하루저녁이면 인사동에 서너 개의 약속을 잡아놓고 장소를 옮겨가며 술을 마시는 등 민중미술, 이를 넘어 '문화계의 허브'로 활동했다. 일주일이면 5일은 인사동에 머물러 '인사동의 밤안개'라고 불렸던 그의 옆에는 대부분 원경이 있었다. 여운은 원경과 매우 가까워 멋진 원경의 초상화를 남겼다.
원경은 여운을 통해 민중미술계에도 발을 넓혔다. 김용태, 오윤, 신학철, 김정헌, 김건희 등 '현실과 발언'이라는 민중미술 1세대를 시작으로 '대동세상'을 염원하며 목판화를 해온 판화가 김준권, 민중미술계의 막내 김윤기, 미술평론가 유홍준 교수 등과 가까이 지내게 됐다. '문화판의 마당발' 김용태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일을 맡으면서 김상철 민예총 제주지부 사무총장과 가까워졌다. 물론 그의 인맥은 민중미술 쪽에 그치지 않았다.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나, 있다'라는 깊은 의미의 예명을 쓰는 철학자 화가 허유(虛有) 화백과는 입적 전까지 깊은 교류를 나누었다. 만기사에 세운 '박헌영해원비'에 글씨를 써준 서예가 여태명 등과도 교류했다.
그는 학계, 법조계에도 인맥을 만들어갔다. 나중에 역사문제연구소를 같이 만드는 박원순 변호사와 교류를 시작했고, '운동권 학자'였던 김세균 서울대 교수(정치학), 심지연 경남대 교수(정치학), 박호성 서강대 교수(정치학),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한국사), 최갑수 서울대 교수(서양사), 운동권은 아니지만 양승태 이화여대 교수(정치학) 등과 가까이 지냈다.
그의 인맥과 인간관계는 운동권과 재야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원래 사람을 좋아하고 친화력이 좋은데다가 자신이 언제든지 색깔론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보수인사들과도 열심히 사귀었다. 즉 인간관계에서 '좌우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45. 기이한 도둑
소달산. 여주의 북쪽에 있는 작은 산이다. 이 산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여주를 대표하는 신륵사와 달리 볼품없는 작은 절이 나타난다. 흥왕사다.
원경은 1973년 소달산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작은 암자인 흥왕사에 들어왔다. 그는 불교계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유신이 싫었고, 특히 보안사 사건 후 세상이 싫어, 은사인 송담 스님에게 부탁해 아주 깊은 곳에 위치한 작은 암자라 아무도 찾지 않는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다. 특히 그는 흥왕사라는 이름이 일제시대에 일본인 여주군수가 이곳에 놀라 왔다가 술에 취해 지은 이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름을 부처님과 불교가 서쪽에서 왔다는 사실에 기초해 서래암(西來庵)이라고 개명했다(지금은 이름이 다시 흥왕사로 변했다). 그는 여기에서 농사를 지으며 수련을 하고 있었다.
"잠시 들어오너라."
부름을 받고 달려간 원경에게 송담스님은 용화사에 본격적인 선원을 지을 것이니 이 공사를 맡으라고 지시했다. 1979년, 원경은 용화사의 건설공사를 지휘하느라고 인천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직접 벽돌을 찍어 건물을 짓는 작업을 해야 했다. 하지만 자신이 있는 서래암을 버려둘 수는 없어, 시간이 나는 대로 서래암을 들렀다. 인천과 여주를 오가는 일은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이제야 다 왔네."
1979년 가을, 원경은 인천을 떠나 긴 운전 끝에 소달산에 도착하자 긴장이 풀렸다. 하지만 서래암으로 올라가는 포장이 되지 않은 산길은 힘들기만 했다. 한참을 올라가자 아담한 석탑이 보이고 자신이 직접 채소를 가꿔 먹는 텃밭이 나타났다. 돌계단 위로 올라가자 낯익은 암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이게 뭐야?"
불사로 들어가던 원경은 깜짝 놀랐다. 문에 걸어놓은 자물쇠가 부서져 있는 것이었다.
"아니 이 산골에 절이 있는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을 텐데, 어느 도둑이 이곳까지 도둑질을 하러 왔단 말인가?"
잡자기 몇 년 전 있었던 보안사 사건이 생각났다. 또 얼마 전 있었던 동료스님들의 색깔론 시비도 생각났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방으로 달려 들어가자 책들, 그리고 옷가지 등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도둑이 든 것이 확실했다.
그는 제일 먼저 책장으로 달려가 둘째 칸을 뒤졌다. 찾는 책은 제자리에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바닥을 보니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낡은 불경 책이었다. 책을 들어 책 뒷면의 안쪽을 펴봤다. 그곳에는 있어야 하는 사진이 없고 오랫동안 사진 붙어있었던 자국만 남아 있었다.
"아니 이런 일이!"
원경은 다리에 힘이 빠져 바닥에 철썩 주저앉고 말았다. 1946년 2월 혜화장에 가서 한산스님, 이현상, 김삼룡, 이주하, 정태식 그리고 아버지 박헌영과 찍은 유일한 사진이 사라진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게 어떤 사진인데…. 그의 뿌리를 밝혀주는 유일한 물증일 뿐 아니라 한국전쟁 기간 중 모르는 산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의 신원을 확인해 줘 여러 번 목숨을 구해준 소중한 사진이 바로 그 사진이었다. 이후에도 외로울 때면 아버지와 만났던 혜화동의 추억을 생각하기 위해, 지리산에게 보냈던 이현상 아저씨와의 춥고 배고팠던 시절을 생각날 때면 꺼내보던 사진이, 그리고 자신을 극진히 보살펴줬던 한산스님이 그리울 때면 꺼내보던 소중한 사진이 사라진 것이다.
"이 사람이 누구냐?"
"이주하 아저씨요."
"이 아저씨 몇 번, 어디서 만났냐?"
어린 시절 한산스님은 가끔 이 사진을 꺼내 사진속의 사람을 가리키며 묻고 했다. 병삼에게 이들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그는 다른 곳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한산스님은 돈이나 중요한 서류를 기름종이에 싸서 담벼락 쌀통 등 사방에 숨겨놓곤 했다. 이를 보고 배운 원경은 돈을 그 같은 방식으로 보관해 왔다. 찾아보니 현금들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어떤 도둑이 현금은 놔두고 낡은 사진 한 장만 챙겨 가는가? 그것도 책 뒷장에 풀로 부쳐놓고 앞에 다른 책으로 가려 놓은 것을 어떻게 찾아서 훔쳐갔단 말인가. 이건 분명 도둑의 소행이 아니었다. 그럼 누구의 짓인가? 보안사? 아니면 소문을 들은 중앙정보부? 경찰, 아니면 자신을 시기한 다른 스님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며칠간 식음을 전폐해야 했다.
"아버님, 한산스님, 이현상 아저씨, 보고싶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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