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강제노동수용소
"스님, 도민증 좀 보여주세요."
"…"
"다른 신분증 있으면 보여주세요."
"…"
"저희와 좀 같이 가시지요."
1968년 7월, 황림사의 일을 끝내고 서귀포 시내 여관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골목에 숨어있던 경찰들이 나타나 해공에게 증명서를 요구했다. 아무 이름이나 사용한 가짜 도민증을 가지고 있었지만, 문제가 커질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경찰은 경찰서로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준비해 놓은 경찰 지프차에 타며 보자, 저쪽에 눈이 익은 동네 조직폭력배들의 얼굴이 보였다.
"아, 저놈들이 찔렀구나!"
갑자기 사태 파악이 됐다. 어디서 못 보던 중이 갑자기 나타나 돈을 펑펑 쓰며 여관과 도장을 차리고 자신들이 말단 행동대원으로 부려먹던 아이들을 데리고 가자, 화가 난 조폭들이 경찰에 신고를 한 것이다. 제주도에 와서 5년(이는 그 때까지 그의 생애에서 한 지역에서 보낸 가장 긴 기간이다)이 돼서 이제 현지인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착각이었다. 특히 5.16 쿠데타 이후 신원이 불명확한 사람, 불량배, 병역기피자 등에 대한 단속이 심해진 상황이었다.
1950년대에서 60년대로 넘어오며 이승만 정권이 학생들이 주도한 4.19혁명으로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정치는 잘 모르지만, 아버지와 아저씨들, 그리고 자신을 쫓기게 만든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원경은 즐거웠다. 그것도 잠시, 1년 뒤인 1961년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고 깡패 등 '낡은 사회악의 소탕'을 내걸고 나섰다.
"네가 살아남으려면 현실정치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한다." 한산스님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해 왔기 때문에 정치에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4.19과 5.16은 원경이 탈영을 해 인천 용화사에서 수계를 받고 공부하던 시기, 그리고 스님의 권유로 자수해 다시 특수부대 교관으로 근무하던 시기라, 현실정치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원경은 한산스님의 지시대로 살기 위해 현실정치와 거리를 두었지만 결국 현실정치, 즉 5.16군사정권의 강권정책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신원보증을 위해 한산스님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데 연락할 길이 없었다. 머리를 굴려보자 인천 용화사의 송담스님에게 연락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큰 스님에게 누를 끼치기는 싫었다.
"야 이 새끼, 국토건설단으로 보내!"
신원이 불확실한 것으로 밝혀지자, 갑자기 호칭이 '스님'에서 '이 새끼'로 바뀌었다.
"너 이 새끼, 이 옷으로 갈아입어!"
계급장 없는 군복 같은 옷이었다.
군복으로 갈아입고 이들을 따라 뒷마당으로 갔다. 군용트럭에 자기와 같은 군복을 입은 청년 여럿이 겁에 질린 얼굴로 타고 있었다.
"출발!"
트럭은 한라산 중턱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한라산 중턱이었다. 구체적으로, 해발 1100고지에 있는 어승생 저수지였다.
"내려!"
어승생 저수지 옆에는 야전텐트들이 쳐 있고, 무장한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한국판 굴락(Gulag, 스탈린이 만든 유명한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 즉 강제노동수용소인 국토건설단에 끌려 온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로 권력을 잡자마자 4.19혁명 후 집권한 장면 정권이 고학력 실업자들을 위해 만든 기술훈련기관인 국토건설단을 한국판 굴락으로 개조했다. 즉 깡패, 불량배, 넝마주의, 병역미필자 등을 훈육하고 국토를 개발하기 위해 이들을 강제수용하고 강제노동에 동원하는 기관으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많은 젊은이들이 경남 남강댐, 울산공업도시 도로 공사, 섬진강댐 공사, 제주도 횡단도로(5.16도로) 공사에 강제 투입됐다.
박정희 정권은 5.16도로가 성공을 거두자 1968년 7월 제2 횡단도로인 1100도로를 건설하기로 하고 500명의 깡패, 불량배를 강제동원하기로 결정했다.
"야, 500명 채워야 하는데 누구 잡아넣을 놈 없어?"
경찰은 지역조폭에게 압박을 넣었다.
"있습니다."
"그래? 어떤 놈이야?"
"해공이라는 중인데 갑자기 나타나 절을 짓고 무슨 돈이 있는지 여관을 사고 젊은 애들을 모아서 운동을 가르치는데 이상합니다."
"야 이 새끼들, 8열종대로 줄 맞춰 서!"
"똑바로 못 서!"
"아이고, 나 죽네!"
500명의 단원 중 줄을 제대로 못 맞추는 단원들이 몽둥이에 맞아 쓰러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이 개새끼들을 날려버려?"
해공은 경비병들에게 한방을 날리고 싶은 충동에 빠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기상! 기상!"
아침에 일어나 인간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식사 같지 않은 식사를 한 뒤 주어진 과제는 도로를 내기 위해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을 톱과 도끼로 베어내는 작업이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고된 노동과 경비병들의 폭력에 연일 쓰러졌다. 배고픔과 살인적인 노동, 비인간적인 폭행 등 지옥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UDT의 지옥훈련 등을 거친 해공은 힘들지만 참을 만 했다. 참을 수 없는 것은 별다른 이유도 없이 이런 곳에 사람들을 잡아다가 강제로 가두고, 강제로 노동을 시킨다는 사실이었다.
"밤에 몰래 탈출을 할까?"
"아니면 경비병 놈들을 몇 놈 아작을 내버릴까"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하지만 한산스님과 송담스님을 생각해 참았다.
"235번 나와!"
지옥 같은 넉 달이 지났을 때 경비병이 해공을 불렀다. 경비병을 따라가자 한산스님이 서 있었다. 해공, 아니 원경이 잘 지내고 있나 제주도에 왔다가 국토건설단에 잡혀간 것을 알고 손을 써서 원경을 풀어주러 온 것이다.
39. 사라진 한산
"한산스님에게 무슨 일이 있나? 왜 연락이 안 되지."
제주도를 다녀온 뒤 얼마 되지 않아, 한산스님과의 연락이 끊겼다. 사방으로 연락을 해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가끔 정처없이 떠나곤 했지만, 이처럼 오랫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었던 적이 없었기에 걱정이 되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 제선스님은 혹 알고 계실지 모르지."
하지만 제선스님은 원경과 헤어진 뒤 1965년 서울 도봉산에 문을 연 수련원인 문무관에 들어가 결사참선하며 한 평짜리 방에서 두문불출하고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6년을 채운 1971년 문무관을 나와 부산에서 돌연히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연락이 끊긴 것은 우연인가? 아니면 두 분이 같이 무언가를 도모하고 있는 것인가? 원경은 답답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14명의 북한 무장간첩 사살'
문득 얼마 전 언론에 집중 조명된 사건이 떠오르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14명의 무장간첩 부대가 배를 타고 제주도로 침투하려다가 발각되어 전원 사살됐다는 기사였다. 그들이 제주도에 온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혹 두 분의 잠적이 이들과 관계가 있는 것인가?
"아니야. 그럴 리가!"
제선스님이 제주도 출신이긴 하지만, 평소 행동으로 보아 북한과 연결되어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특히 한산스님은 평소 김일성과 북한에 비판적이고, 북한이 존경하는 박헌영을 미국의 간첩으로 몰아 처형한 마당에 북한과 모종의 관계를 유지해 왔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어디 병이 난 것인가? 그랬다면 나에게 연락을 안 할 리가 없지.' '갑자기 돌아가셨나? 아니 건강하시고 아직 연세가 환갑도 되지 않았는데 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시간이 흘러도 한산스님으로부터 연락은 없었다. 9살부터 27살까지 근 이십년 동안 아버지를 대신해 원경을 키우고 보살펴온 보호자인 한산스님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이후 원경은 '현판사건'(다음 화 참조) 등에 휘말려 한산스님을 찾을 겨를이 없었다.
"성진아(원경의 당시 이름), 그 이름이 뭐지? 너하고 같이 다니던 스님!"
"한산스님."
"맞아. 그 분 내가 얼마 전 전라도 끝 홍도에서 본 것 같아."
"그게 정말이야?"
원경은 너무 기뻐 벌떡 일어났다.
"응. 바닷가에서 봤는데 퉁퉁 부어서 병색이 아주 짙더라. 헌데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고, 어부도 아니고 분위기가 묘하더라. 그 때는 '어디서 본 적 있는데 누구지?' 했는데 서울에 올라오며 생각하니 너하고 다니던 스님이더라고."
원경은 당장 목포로 달려갔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흑산도에 도착해 다시 홍도로 향했다. 배 속에서 넘실대는 파도를 보며 있자 스님과 지내온 파란만장했던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특히 한산과 함께 엄청난 파도를 뚫고 달려갔던 울릉도 여행이 생생하게 생각났다.
배가 홍도에 닿자 원경은 급한 마음에 거의 뛰다시피 배에서 내려 홍도를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만나는 섬사람들에게 혹시 이 같은 사람 본 일이 있느냐고 묻고 다녔다. 하지만 한산스님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원경은 절망감에 목포로 돌아갈 의욕을 상실했다. 원경은 지리산 등 스님과 오르던 수많은 산들을 생각하며 무작정 홍도에서 제일 높은 깃대봉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올라가다가 뒤를 돌아다보자, 홍도의 마을과 검푸른 서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원경은 이를 내려다보며 절규했다.
"스님, 어디 계세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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