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제선스님
"아이고 힘드네.."
원경은 보리암으로 유명한 경남 남해 금산 북서쪽에 위치한 큰 바위에 매달려 용을 썼다. 평지에 높이 20미터나 되는 거대한 돌덩이가 사람의 뇌 모양으로 우뚝 솟아있는 이 바위는 한쪽은 천 길 낭떠러지이며 올라갈 수 있는 다른 쪽은 거의 직각에 달해 줄을 타지 않고는 올라갈 수 없는 천애의 요새였다.
얼마 전 UDT 훈련을 받은 특수부대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이 같은 바위를 물통을 들고 줄을 타고 오르는 것은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부소암내지 부소대라고 부르는 이 바위는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이곳에 유배를 당해 살고 갔다는 전설에 따라 그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자살소동과 울릉도 여행 있은 뒤 한산은 원경을 데리고 이곳으로 왔다(원경은 이 일이 1961년이라고 회상했지만, 이는 1960년 2월 인천 용화사에서 수계를 받고 자수해 1962년 말까지 군에 있었다는 진술과 모순되며 전역 후로 봐야 맞다).
금산을 오르며 원경은 한산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여기는 왜 온 거지요?"
"저 위에 내 친한 친구인 제선스님이 수련중이라서."
스님이 누군가에게 '친한 친구'라고 부른 적이 없기에 놀랐고 어떤 분인지 궁금했다.
"그 분이 어떤 분인데요?"
"대단한 분이지. 제주도 출신인데 일본 메이지대를 나온 엘리트로 관촉사, 불국사 주지도 한 분이란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공이 대단한 분이니, 저 위에서 당분간 그 분과 함께 있으면서 수련을 해라. 제선스님에게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라."
한산이 가르치는 곳을 보니 바위 꼭대기에 작은 움막 같은 것이 있었다.
"아니 저 위에요? 저기를 어떻게 올라가요?"
"줄을 타고 올라간단다."
원경은 한산을 따라 줄을 타고 올라갔다.
"제선, 잘 있었나?"
"한산, 웬일인가? 어서 오게."
"헌데 이 젊은이는?"
"내가 데리고 있는 아이네. 얼마 전 용화사에서 수계를 했네."
"아, 자네가 이야기한 그 아이가 얘 인가?"
"맞네."
"나무석가무니불."
제선스님은 원경의 사연을 아는지 그를 위해 불경을 외웠다.
"그런데 왜 여기는?"
"자네가 당분간 수련을 시켜주게."
원경은 제선스님과 함께 참선도 하고 많은 것을 배웠다. 원경은 한산스님 다음으로 제선스님이 자신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분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이 바위 위에서의 생활은 그 자체가 수도 그 자체였다. 물은 빗물을 받아먹고 빨래도 이 물로 했다. 물이 떨어지면 물통을 지고 줄을 타고 밑으로 내려가 물이 있는 데에서 물을 담아 물통을 메고 줄을 타고 올라와야 했다. UDT 훈련도 받았지만, 물 보급 작전은 UDT 훈련만큼이나 힘들었다.
"해공아(당시 원경이 사용한 법명), 이리 와 앉아보아라."
어느 날 제선스님이 원경을 불렀다.
"네가 이곳에 온 지 근 1년이 다 돼 가는구나. 그동안 이 바위 위에서 수도하며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이제 나는 다른 곳에 수련을 하러 들어간다. 너도 저 아래 세상으로 내려갈 때가 된 것 같구나."
"아~ 스님, 그동안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내려가면, 한산스님을 잘 모셔라. 그분 정말 대단한 분이다. 헌데 너는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아느냐?"
"아니요."
돌이켜보니, 한산스님이 네 살 때부터 지금까지 십년 이상 자신을 보살펴 왔지만, 그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한산은 한국사람 중 들어간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한 동경제대를 나온 수재란다. 아니 수재라기보다 귀재지 머리가 비상하고…."
"아니 한산스님이 동경제대를 나왔어요?"
"너는 그것도 몰랐느냐?"
"그런 이야기를 전혀 안 하셨어요."
제선스님이 아니었다면 그가 동경제대를 나온 엘리트라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그의 본명이 김제술이라는 것도 원경은 나중에야 알았다.)
37. 반란의 섬 제주도
"병삼아, 저게 한라산이다."
목포를 떠나 제주로 향하는 정기여객선이 제주도에 가까워지자 한라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라산이 보이기 시작하자, 원경은 메고 있던 배낭의 끈을 다시 한 번 조였다. 그리고 제주도를 떠나며 스님이 한 이야기를 생각했다.
"병삼아"
"예."
한산스님의 목소리에 평소와는 달리 비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당분간 제주도로 내려가 있어라."
"…"
원경은 답을 하지 않았다. 음독자살 소동 후 울릉도도 같이 여행했고, 부소대에서 수련을 했지만, 스님이 아직 마음을 놓지 못하시고 자신을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거 챙겨라."
"웬 배낭이지요?‘
"열어 보거라"
"아니 웬 돈을 이리 많이!"
"빚 받을 것이 있는 사람에게서 조금 받아 왔으니, 제주도에서 절도 짓고 정착하는데 사용해라."
"스님이 빚을 받을 데가 어디 있어요? 아 그러면, 안양?"
문득 16년 전 김삼룡 아저씨 등이 잡혀간 뒤 스님을 따라 지리산으로 내려 올 때 사금을 메고 안양방직공장에 가서 맡겼던 기억이 났다.
"너는 깊이 알 필요 없다."
제주는 지금까지 본 어떤 지역과도 달랐다. 사방에 돌담이 있었고 따뜻한 날씨에 이국적 냄새가 물씬 났다. 사투리가 심해서 말을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섬사람들이 원래 외지인에 대한 경계가 심하게 마련인데, 제주도는 1948년 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싸고 일어난 4.3항쟁으로 도민의 10분의 1이 학살당한 비극을 겪은 만큼, 더욱 그러했다. 그동안 다녀본 그 어느 지역보다도 한과 말 못할 설움이 느껴졌다. 그래도 승복을 입은 만큼 일반 외지인에 비해서는 훨씬 적대감이 적었다.
"여기서 당분간 살아야 하니, 어디가 좋은가 한번 돌아보자."
원경은 스님과 함께 이것저것을 살펴보며 천천히 제주도를 유람하기 시작했다. 제주를 한 바퀴 돌고나자, 아무래도 제주 쪽보다는 서귀포 쪽이 마음에 들었다. 일단 서귀포 쪽에 숙소를 잡고 서귀포 지역을 자세히 탐사하기 시작했다.
"스님, 여기 절터가 있네요."
서귀포 중심가에서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리고, 하논 오름에 올라가 주변을 감상하고 내려오는데 불타 없어진 절터가 나타났다. 알아보니 1929년 창건해 하논마을 사람들이 다니던 용주사 터였다. 4.3항쟁이 벌어지자 1948년 11월 이승만 정부의 토벌대가 무장대(한라산의 빨치산)를 고립시킨다며 중산간 지역을 초토화시키면서 마을과 용주사를 불 질러 버린 것이다. 토벌대들이 절에 불을 지르자 신도들이 석가모니불상과 칠성탱화를 지고 내려와 임시불당을 만들어 지내고 있었다.
"그래 여기가 좋을 것 같다. 이제 네가 자리 잡는 것을 봤으니 나는 뭍으로 올라간다. 이제 너도 성인이니 알아서 잘 지내 거라."
원경, 아니 해공은 배낭에 지고 온 돈을 풀어 이곳에 절을 새로 지었다. 사찰 이름도 황림사로 바꿨다(현재 이름이 봉림사로 바뀌었지만 "1968년 해공스님에 의해 개건되면서 황림사로 명칭을 바뀌었다"고 절의 내력에 쓰여 있었다). 하논 마을의 신도들도 모이기 시작했다.
"절은 됐고, 할일 없이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무도장을 만들어 무술을 가르쳐야겠다. 그들이 묶고 일을 할 곳이 필요하니 넓은 집을 하나 사서 여관을 하면서 무도장을 하면 될 것 같다."
그는 서귀포 시내를 꼼꼼히 뒤져 적합한 곳을 찾아 집을 매입하고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여관과 도장을 문을 열었고 평소 봐둔 젊은이들을 데려다가 숙식을 제공하고 운동을 가르치는 대신 여관에서 일을 하도록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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