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자수
"이승만은 물러나라!"
얼마 뒤 한산스님과 이현상 아저씨가 그처럼 미워하던 이승만이 학생들과 시민들에 의해 쫓겨났다. 4.19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게 혁명이구나! 저렇게 억눌렀던 사람들이 외치고 피투성이가 돼서 싸우고 잡혀가면서도, 이승만을 몰아냈구나. 아버지가 하려던 것이 바로 저런 것이구나."
원경은 4.19를 보며 아버지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성진(당시 원경이 쓰던 법명)입니다. 큰 스님, 부르셨습니까?"
얼마 뒤 원경은 전강스님이 부른다는 전갈을 받고, 놀랐다. 내가 다른 잘못한 일이 무엇인가? 머리가 복잡했다. 복잡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전강스님 방 앞에서 왔음을 알렸다.
"그래 들어오너라."
"예."
방에 들어가자 공손하게 예를 갖추었다.
"거기 앉거라."
"예."
"요즘 불경공부는 잘 하고 있느냐?"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곳에 와 수계를 하기 전에 군에 있다가 탈영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네가 언제까지 피해 다닐 수 없으니 부대로 들어가 자수해라. 그리고 군 복무를 마치면, 이곳으로 돌아 오거라."
"예."
자수하라니,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스님의 지시니 거역할 수 없었다.
얼마 뒤 용화사의 연락을 받고 헌병차가 나타났다.
걱정과 달리 조사는 간단히 끝났다. 단순한 병역기피나 탈영이 아니라 남을 대신해 입대했다가 대리입대가 발각 나서 본의 아니게 탈옥했다는 점, UDT 정예요원 등 뛰어난 능력과 근무성적, 자수한 점, 용화사 등 불교계가 각별히 부탁한 점을 고려해, 원경은 징계를 받지 않고 현역에 복귀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있었던 일은 평생 비밀로 하며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 이를 어길 시에는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는다.’
부대에 도착하자 부대장은 서류를 한 장 내밀었다. 앞으로 있을 임무에 대한 비밀각서였다. 원경은 서명을 하며 무슨 일이기에 이 같은 각서까지 쓰게 하나 궁금했다. 처음에는 진해에서 근무했지만 거제도로 옮겨갔고 나중에는 소백산에서 근무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특수훈련교관이었다. 훈련병들은 병사들만이 아니라 장교로 보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모두 계급장을 뗀 군복을 입고 훈련소에 입소했다. 그만큼 계급을 무시하고, 엄격한 교육을 시키려는 뜻이었다.
단순히 특수훈련을 시키는 것인 만큼 이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대강 북파공작원들을 훈련시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우리 정부는 부인해 왔지만 2002년 법원은 북파공작원의 존재를 인정했고, 정부자료에 따르면 1953년 휴전 후 1972년 남북공동성명까지 북파공작원은 7726명에 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원경은 수계를 하고 불교에 귀의했지만 아직도 김일성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있었던 만큼 자신의 일에 보람을 느꼈다.
33. 어머니를 만나다
"축하하네. 그동안 고생이 많았네."
"네, 스님!"
1962년 말 전역한 원경은 1963년 3월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출가하는 사람이 정식 승려가 될 때 받는 계율)를 수지하고 정식으로 승려가 됐다. 구족계를 받은 뒤 원경은 충남 예산 수덕사 안에 있는 선원인 정혜사에 머물고 있었다.
구족계를 받고 정식 승려가 됐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깊은 고민을 하고 있는 어느 날, 저녁공양을 하려고 보리밥을 앉히고 나와 밥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한 중년 부인이 자기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어린 아이를 업은 이 여인은 멀리서도 퉁퉁하고 체격이 큰 여인이었다.
그 여인이 가까이 오며, 얼굴을 알아볼 수 있게 되자 병삼이 갑자기 하늘이 노래지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가지고 다니며 수없이 본 사진 속의 얼굴을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체격이 크지 않았던 박헌영과 달리 원경은 몸이 건장하고 덕이 많게 생긴 것이 어머니를 빼어 닮아, 사진이 없었더라도 보는 순간 어머니인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스님, 병삼이 맞으시지요?"
"예, 그런데 누구시지요?"
병삼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이고, 우리 병삼아! 제가 못난 어미입니다."
여인은 원경의 손을 꼭 잡았다. 생후 100일 만에 헤어진 어머니를 원경은 22년 만에 만난 것이다. 어머니는 원경의 손을 잡고 울기만 했다.
하지만 사진 이외에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병삼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살아있으리라고는 생각 자체를 안 해 왔기에, 반가움도, 설렘도 없었다.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제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아셨어요?"
"한산스님이 찾아와 이야기 해주셨어요.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렇게 달려 왔습니다."
"아, 스님이!"
어머니는 이정과 자기와의 관계, 그리고 병삼을 낳은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하면서 어머니는 원경을 안고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 그동안 어떻게 사셨어요?"
"스님 말도 마세요. 책으로 써도 몇 권을 써야 할 이야기지요."
어머님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생후 백일의 병삼을 남겨 두고 친정 부모님에게 잡혀간 순년은 이후에도 기구한 삶을 살았다.
"너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
집에 오자마자 부모님들은 순년을 골방에 가두고 밖에서 문을 잠가버렸다. 순년은 두고 온 아이 걱정에 문을 두드리고 울며 애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일 년을 갇혀 있었다. 어느 날 소식을 들은 이순금이 몰래 찾아왔다. 그날 밤 둘이 도망가기로 했는데 낌새를 챈 아버지가 밤새 방문을 지키고 있어 실패하고 말았다.
"좋은 신랑감을 찾았으니 딴 생각 말고 시집가서 잘 살아라. 마음 착하고 손재주도 좋다니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일 년 뒤 순년은 부모님의 강권에 의해 오래전에 혼처로 정해 놓은 성실한 한 목수에게 시집을 갔다. 순년은 새 가정에 충실했다.
얼마 뒤 이순금이 찾아와 "병삼이는 잘 크고 있으며 병삼이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이정 선생님은 소식이 없다"고 소식을 전해줬다. 이미 그 때 순년의 뱃속에는 또 다른 생명이 자라고 있어 도망을 갈 수도 없었다. 둘은 뒷동산에 올라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순년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물론 마음 한 쪽에는 두고 온 병삼, 그리고 어딘가에서 쫒기고 있을 박헌영이 생각나기는 했다. 해방이 됐고 박헌영이 조선공산당의 지도자로 떠오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행이고 자신의 노력이 보람이 있는 것 같아 기뻤다.
그러나 얼마 뒤 미군정과 극우파의 반동이 시작됐고 이들에게 쫓기던 박헌영이 북으로 넘어갔다는 소문이 들렸다. 뿐만 아니라 순년의 남편은 조선공산당의 비밀당원이었고 이 같은 사실이 발각되자 이승만 정부의 강제에 의해 좌익 전향자들의 조직인 보도연맹에 가입해야 했다.
"탕탕탕~"
한국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는 순년의 남편을 예비검속이라는 이름 아래 대전형무소로 잡아갔다. 북한군이 남하하기 시작하자 이승만 정부는 남편을 산내골령골로 끌고 가 수천 명의 보도연맹 가입자들과 함께 처형시켰다. 두 번째 남자마저 이렇게 잃고 만 것이다.
순년은 두 아이를 안고 장사를 해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한 남자를 만나 애가 한 명 더 생겼다. 두고 온 병삼의 소식을 찾아 박헌영의 고향인 예산을 찾아갔지만, 박헌영의 친척들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고 소식을 아는 동네사람들도 없었다.
"아마 북한으로 가서 잘 살고 있겠지."
순년은 병삼이 북한에서 잘 살고 있기를 기원했다.
"안녕하세요? 저 아시겠습니까?"
1963년 대전역 앞에 있는 경북상회라는 작은 가게에 한 작은 키의 스님이 들어왔다.
"뵌 적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기억이 안 나는데, 누구시지요?"
"이정 선생님 모시던 한산입니다."
"아, 스님, 이제 기억이 나네요. 어찌 지내셨습니까? 우리 병삼이 소식은 아세요?"
한산스님은 순년에게 병삼이 살아있으며 자신이 병삼이를 10여 년 간 돌봐 왔다고 알려줬다.
"아니 정말이에요? 우리 병삼이가 어디 있지요?"
순년은 당장이라도 그리로 달려갈 태세로 소식을 물었다.
"난리 통에 목숨을 살리기 위해 제가 병삼이의 머리를 깎였습니다. 스님이 돼서 지금 절에 있습니다."
"아니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됐다니요! 아이고. 불쌍한 우리 병삼이!!"
병삼의 이야기를 들은 순년은 통곡을 했다. 울음을 그치자 순년은 가게 문을 닫고 수덕사로 달려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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