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가마골
"모스크바가 함락될지언정, 가마골은 함락당하지 않는다."
가마골에 주둔했던 빨치산부대 노령병단 김병억 대장은 1951년 봄 이같이 말했다. 이제는 유명한 유원지인 가마골은 전라남도의 최북단이자 전라남북도의 도계에 위치한 담양군 용면에 위치해 있다. 영산강의 발원지인 이곳은 백두대간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노령산맥의 지맥으로 해발 450미터의 용추봉 등 험준한 산악과 밀림이 울창한 천연요새다.
한국전쟁, 특히 인천상륙작전 이후 빨치산은 이전과 전혀 다른 양상으로 변했다. 구빨치라고 부르는 이전의 빨치산들이 14연대 봉기 후 산으로 올라간 소수병력에 불과했다면, 인천상륙작전 이후 생겨난 신빨치는 인천상륙작전으로 허리가 끊겨 북으로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까지 가세해 기관총 박격포 등 중화기로 무장한 1만5000-2만 명의 규모에, 그 지지 세력까지 합치면 4만 명이 넘는 대규모부대였다.
가마골에는 이 중 김병억이 이끄는 노령병단,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으로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 부대인 기포부대(기관총과 박격포로 무장했다), 카츄샤부대, 번개부대, 전남도당, 광주와 목포시당이 장기 주둔했다. 이곳은 천혜요새일 뿐 아니라 민가가 가까워 식량 등 보급품을 구하기 용이해 빨치산이 주둔하기에 적격이었다. 빨치산들은 이곳에 학교를 만들어 사상교육부터 유격교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교육을 시켰다. 고장난 지뢰로 사제폭탄을 제조하는 폭탄공장을 운영하기도 했고 벼를 도정하는 도정소까지 있었다. 이들은 가까운 칠보발전소을 공격해 전력공급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한산은 이현상 부대를 찾아 남하하다가 이곳에 머물러 있었다. 이곳에는 1000여 명의 빨치산이외에도 영호남 지역의 남로당 간부들의 가족, 자녀, 피난민 3000여 명이 모여 있었다.
"병삼아, 저기 폭포까지 누가 먼저 가나 내기하자."
병삼은 다른 아이들과 공부도 하고 용소폭포 등에서 수영 경주도 하고 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인민군지도부와 노령병단 등은 이곳으로 피난 온 남로당 간부들의 자녀들을 엄격한 심사하고 선별했다. 선발된 어린이들을 특공대는 비밀루트를 통해 안전한 북으로 올려 보냈다.
한산은 병삼이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북으로 보내야 하는가? 아니면 끝까지 자신이 데리고 다녀야 하는가? 만일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는가? 이현상이 옆에 있었다면 같이 상의했을 턴데 그렇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웠다.
"이 동지, 어디 있습니까?"
그 날 밤 한산의 꿈에 이현상이 나타났다.
"스님, 저는 병삼이는 우리들이 끝까지 지켜야지, 북으로 보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겠지요. 저도 그런 생각이긴 한데 여기 뒀다가 애를 객사시킬 것 같아, 이정 선생님에게 보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모르겠네요."
"스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직접 체험해 봤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제가 그놈들하고 술상을 엎고 싸웠겠습니까? 서울이 수복됐는데도 이정 선생님을 서울로 내려 보내지 않고 잡아두고 있는 것 보십시오. 저는 김일성이 한국전쟁이 끝나면 이정 선생님을 비롯해 우리 남로당 세력을 다 제거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가능성이 크지요."
"그런 마당에 병삼이를 북으로 보낼 수는 없습니다. 이정 선생님 아들만은 남쪽에 남아 있어야 하고 우리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합니다. 이정 선생님도 병삼이가 남쪽에 남아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다음 날 한산은 짐을 싸서 가마골을 떠나 덕유산으로 올라갔다(얼마 뒤인 1951년 8월 25일, 토벌대는 가마골 진압작전을 시작했다. 전투기로 네이팜탄을 투하하고 대대적인 공격작전을 벌여 가마골을 점령했고 빨치산들은 지리산으로 후퇴했다.)
19. 다시 만난 이현상
"스님, 너무 힘들어요. 조금 쉬었다가 가요."
한산스님은 병삼이를 데리고 평소 봐두었던 남무주의 원통사로 향했다. 원통사는 덕유산 남쪽 자락으로 해발 1050미터의 망봉과 860미터의 명천안산 사이 첩첩산중에 위치한 절로 한말 문태서 등이 의병을 일으켰던 곳이다(이 절은 한국전쟁 때 전소하여 지금은 ‘원동사지터’가 남아있고 원통사는 그 옆에 새로 지었다.). 한산과 병삼은 끝없이 산속으로 걸어 올라가야 했다. 한산과 병삼은 원통사에 자리 잡고, 병삼의 무술훈련에 몰두했다.
"아 산아저씨들이다."
어느 날 일련의 부대가 원통사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박격포 같은 중화기를 맨 사람도 있었다.
"이현상 아저씨!"
그 속에서 반가운 이현상을 발견하고 병삼은 달려갔다.
"이게 누구야, 병삼이 아니냐! 네가 웬 일로 여기에."
이현상은 놀라 병삼이를 안으며 기뻐했다.
"이 동지~"
절 쪽에서 한산스님이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아이고, 스님 무사하셨군요. 반갑습니다. 어찌 지내셨어요?"
"이 동지를 찾아서 병삼이를 데리고 전국을 누볐지요. 이 동지가 북으로 가기 위해 양양으로 향했다는 소문을 듣고 삼척 삼화사에 갔다가 못 찾고 소백산맥 따라 단양 구인사에 가 있다가 가마골 갔다가 이리로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나야 뭐, 병삼이가 고생 좀 했지요."
"이 동지는 어떻게 지냈습니까?"
"양양을 거쳐 북으로 가다가 이승엽 동지(일제시대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했으며 해방 후 박헌영과 일하다가 월북했고 북한군 점령 하에서 서울시장을 지냈다. 54년 미제간첩으로 처형됐다.)를 만났습니다. 자신이 남조선 해방지구의 군사전권을 쥐고 있다면서 중공군이 참전했기 때문에 다시 공세로 전환될 것이라며 남한 빨치산들을 모아 조선인민유격대 산하의 남반부 유격대, 즉 남부군을 창설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후 남으로 내려오다가 인민군을 만나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청주를 급습하고 영동 만주지산에 주둔하며 경부선을 교란시키다가 이리로 내려오는 길입니다."
"일단 부하들, 군장 내려놓고 좀 쉬게 하시지요."
"스님 다녀오겠습니다."
얼마 뒤인 1951년 6월, 이현상은 부하들을 데리고 덕유산으로 올라갔다. 덕유산 송치골에는 이현상 외에도 전남북, 충남북, 경상남북 등 6개 도당위원장이 모였다. 이들은 앞으로의 투쟁방향에 대해 논의했다. 이현상은 이승엽의 지시사항을 전달했고, 전남북 도당의 반발이 있었지만 참석자들은 남한지역 6개 도당산하의 빨치산들을 남부군으로 통합하는 한편 이현상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병삼아, 이현상 아저씨가 남부군 총사령관이 됐단다,"
"스님, 남부군 총사령관이 뭐에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남부군은 우리 산아저씨들 부대를 말하고, 총사령관은 대장 중의 대장이라는 뜻이란다."
"야, 신난다!"
이현상은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직할부대 400명을 데리고 산청 범머리재를 거쳐 대원사 계곡을 통해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한산과 병삼도 이들을 따라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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