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희수 1주기, 불충분한 애도를 채우며 수많은 '변희수들'을 기억하다

[현장] 성소수자 추모제 '키스 앤드 크라이'

"지난주 전 애인의 기일이었습니다. 6년 전, 군 생활 1년 조금 넘게 했을 때였어요. 저는 그의 부고 소식을 군부대의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들었어요. 그가 죽은 지 5일이나 지난 뒤였습니다. 전화부스는 항상 줄이 길었는데 그날은 웬일인지 아무도 없었습니다. 통화가 끝난 뒤에도 수화기를 붙잡고 한참을 울었어요. 그 와중에도 누가 들을까 그 울음소리를 속으로 삼켰던 기억이 납니다. (…)

그가 묻힌 곳으로 당장 가야겠는데,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 조직에서 제 사정은 그저 사사로울 뿐 아니라 금기이자 혐오의 대상이었으니까요.

애도는 군 바깥에서도 충분히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그의 장례가 치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휴가 나와 친구에게 그의 죽음의 내막을 들었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아웃팅 당했고, 그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부모는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했습니다. 그는 계속 저항했으나 자취방 보증금마저 뺀 부모에 결국 굴복했고 입원 며칠 전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이 소식이 바깥에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조용히 치러진 장례 미사 또한 사제에게는 사인을 숨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애도하지 못한 이들끼리 모여 그가 자주 가던 성당에 요청해 위령미사를 드렸습니다. 숨기지 않고 오롯한 미사를 드리기 위해 신부에게 그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사실까지 전했죠. 그런데 그 신부는 미사 강론 중 자살은 곧 죄라고, 지옥에 간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영을 위로하고 애도하고자 마련된 미사는 사제에 의해 지옥으로 끝났습니다. (…)

전역 후에도 후폭풍은 말로 할 수 없이 컸고 그 여파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충분히 애도할 수 있었으면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충분히 애도할 수 있는 여건이 됐더라면, 그는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사회의 차별과 혐오로 인해 쓰러진 이들을 그저 죄라며, 지옥에 간다며 배제하지 않았더라면, 군대에서 성소수자로서 오롯이 있을 수 있었다면, 이 사회에 성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가 없었다면 말입니다. (…)

떠나간 이들을 애도할 공간과 기회를 만들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운동이나 투쟁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만나고 당연한 일이 되었으면, 그런 사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길벗(활동명) 성소수자부모모임 상근활동가

▲성소수자 추모제 Kiss & Cry(키스 앤드 크라이). 추모 공간의 정중앙에 세상을 떠난 성소수자들을 추모하는 의미의 무지개 영정이 놓였다. ⓒ프레시안(조성은)

애도와 추모가 허락되지 않는 사람들

금요일 저녁, 술집과 포장마차가 즐비한 공간 가운데서 작은 추모제가 열렸다. 죽음 후에도 자신을 숨긴 이들. 그의 곁에서 함께한 사람들에겐 추모와 애도조차 쉬이 허용되지 않았다. 이날의 추모제는 길벗 활동가처럼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자리였다.

25일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청어람홀에서 성소수자 추모의 공간 KISS & CRY(키스 앤드 크라이)가 마련됐다. 키스앤드크라이는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이 고 변희수 육군하사의 1주기를 앞두고, 세상을 떠난 성소수자들을 추모하고자 마련한 추모제이다. 변 하사는 지난해 3월 초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사망 추정일은 2월 27일이다.

지난해 변 하사의 죽음은 큰 이슈가 돼 많은 사람에게 충격과 안타까움을 줬다. 그러나 변 하사의 죽음, 성소수자의 죽음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성소수자의 자살 생각, 자살 시도 비율이 높다는 건 여러 연구와 조사를 통해 많이 알려졌다. 이날 추모공간의 정중앙에는 세상을 떠난 성소수자를 기억하고 추모한다는 의미를 담은 무지개 영정이 놓였다.

추모공간이 열린 5시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누군가를 떠나보낸 아픔을 가진 사람들, 변 하사를 응원한 사람들, 또는 누군가의 죽음이 '남 일 같지 않다'는 성소수자 당사자였다. 들어선 사람들은 벽을 가득 메운 추모 메시지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추모 메시지의 끝에는 떠난 이들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사람들은 사진 앞에 꽃과 초를 올린 후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사진들 사이에는 변 하사의 사진도 놓여있었다. 애도하는 사람들이 고인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대부분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일 것이다. 다만 죽음이라는 선택이 오롯이 고인의 뜻이 아니라는 걸 이날 추모제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듯했다.

故 변희수 하사의 죽음이 남긴 것

추모제 기획에 참여한 무지개행동의 시엘(활동명) 활동가는 "지난해 변 하사의 죽음에 충격이 커 한참 동안 우울하게 지냈다"고 전했다. 차별금지법 제정 운동에 참여하면서 동료들을 만나고 조금씩 힘을 얻었다는 그는, "1주기가 가까워지고, 점점 괜찮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분들도 그렇게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추모제의 취지를 설명했다. 시엘 활동가처럼 많은 사람이 변 하사를 떠올렸다.

변 하사와 함께 단체 채팅방에 있었다는 예린(가명) 씨는 변 하사를 "밀덕(밀리터리 덕후)이고 컴퓨터를 좋아하던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트랜스젠더 여성이라고 밝힌 예린 씨는 "변 하사는 계속 군인이고 싶어 했는데, 대표성을 가지게 되면서 우리가 너무 많은 짐을 지운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든다"고 했다.

"변희수 하사님은 강제 전역 당하고 그 후로도 취업이 안 돼 생계를 많이 어려워했어요.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었지만, 서류부터 안 된다고 많이 힘들어했어요. 저도 취업해서 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회사에서 남자로 살고 있어요. 그런데 공개적으로 '트랜스젠더로 살겠다'는 변희수 하사님을 보면서 성별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기자회견 전부터 '너무 떨린다, 기자들 앞에 서기 무섭다' 그랬거든요. 변희수 하사님이 죽은 게 국방부 때문만일까요?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예린

추모제에 참석한 김찬서 씨는 자신을 '논바이너리'라고 소개했다. 찬서 씨는 변 하사가 떠난 후 정체화했다. 변 하사의 죽음이라는 큰 사건이 찬서 씨에게 자신을 강하게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됐다. 과거 자살 시도를 했었다는 그는, "정체화 후 오히려 삶이 편해졌다"고 밝혔다.

찬서 씨 또한 "변 하사가 떠나고 많이 우울했다"며 "(변 하사에게) 너무 미안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커밍아웃은 그분의 선택이었지만, 그렇게 떠나는 건 과연 그분이 원했을까 싶다"고 덧붙였다. 그의 손에는 가족구성권에 대한 책이 들려있었다.

오래전부터 이어진 성소수자의 '이른 부고'

변 하사의 죽음은 성소수자에겐 더욱 상처로 남았다. 그러나 "성소수자의 부고는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게 활동가들의 설명이다. 김지윤 활동가도 "지난해 유난히 성소수자의 부고가 많기는 했다"면서도 "사회적 이슈가 된 인물들이 죽음을 선택했기에 더 알려졌을 뿐 성소수자의 죽음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일"이라고 했다.

"저와 같은 단체에 있던 분도 고인이 되셨어요. 너무 갑작스럽고 너무 놀랐죠. 그런데 한편으로 '놀랍지 않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느낌이 있었어요. 각종 연구나 통계에서 나왔듯이 성소수자들은 비성소수자에 비해 정신건강이 좋지 않아요. 우울증이나 이런 것들. 자살에 대한 생각도 비성소수자에 비해 높고요. 성소수자의 '이른 부고'가 아주 특별한 상황은 아닌 거죠.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도 이런 이른 부고가 종종 있었고요." 김지윤

▲추모공간에 전시된 편지. ⓒ프레시안(조성은)

김지윤 활동가의 말대로 성소수자의 자살 생각, 자살 시도는 전체 시민과 비교할 때 매우 높다. 시민단체 '다양성을 향한 지속가능한 움직임'(다움)이 지난해 8~9월, 최근 10년간 국내에서 거주한 만19~34세 이하 청년 성소수자 391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41.5%가 '최근 1년간 진지하게 자살을 생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1년간 실제로 자살 시도 경험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도 8.2%에 달했다.

이 같은 수치는 전체 청년층과 비교했을 때 20배 이상 높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0년 36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청년층의 2.74%가 '자살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다'고 답했다.

특히 성별정체성 별로 나누어 살펴보면 '자살 생각을 했다'는 응답은 △논바이너리·젠더퀴어(62.9%) △트랜스젠더 남성(59.7%) △트랜스젠더 여성(58.7%)으로 나타났다. 실제 자살 시도 또한 △트랜스젠더 여성(20.2%) △트랜스젠더 남성(12.9%) △논바이너리·젠더퀴어(12.1%)로 매우 높게 나타났다.

김지윤 활동가는 "자살은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사회문제"라며 "특정 집단에서 자살률이 높다거나 정신건강이 악화하고 있다는 건 사회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죽음에 익숙해져야 하는가

김지윤 활동가처럼 인터뷰에 응한 참석자들은 대부분 누군가를 떠나보낸 경험이 있었다. 추모공간이 열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온 정은지 씨도 그랬다. 20대인 은지 씨는 성소수자 친구들을 여러 번 떠나보냈다. 은지 씨는 한동안 친구들과 자주 모였던 장소에 가지도 못했다. 일부러 떠난 친구들의 이야기를 피했지만 해소하지 못한 채 묻어온 슬픔은 이따금 씩 터져 나왔다. 죽음의 경험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은지 씨는 바로 울음을 터뜨리며 "이럴 줄 몰랐다"고 했다.

"처음 떠난 사람은, 이런 말씀은 그렇지만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어요. 평소에도 많이 힘들어했거든요. 두 번째 친구는 갑자기 가버렸어요. 그 친구에게는 갑자기가 아니었겠지만요. 떠나기 30분 전까지 저와 같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가버렸어요. 요즘 그들이 꿈에 많이 나와요.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듣고 싶은 말도 많은데 그걸 해소할 수 있는 자리가 없어서 많이 힘들었어요. 여기 오니까 다른 분들도 있고, 그동안 가져온 그리움이 조금 해소되는 것 같아요." 정은지

은지 씨는 남은 친구들과 더욱 자주 만나며 의지하고 치유하고 있다고 전했다. 만남은 쉽지 않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퀴어문화축제부터 성소수자들이 만나고 교류하는 공간이 많이 줄었기 때문이다. 이날 추모제에 참석한 성소수자 당사자들에게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 추모공간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 듯했다.

추모제 기획에 참여한 무지개행동의 조이(활동명) 활동가도 몇 년 전 성소수자 친구를 떠나보냈다. 조이 활동가는 담담하지만 눅눅한 목소리로 "계속 살았으면 좋겠는데, 그저 제 생각일 뿐"이라며 "본인은 너무 살기 힘들고 앞날이 보이지 않으니까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그런 게 슬프다"고 했다. 지난해 유난히 많았던 부고는 조이 활동가에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남겼다.

함께 많은 일을 겪고 활동한 동료들이 '떠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직접 친분이 있는 사람을 떠나보낸 적은 없다 해도 모임에서 인사하던 사람, 또는 지인을 통해 듣는 누군가의 부고는 자기 죽음에도 무뎌지게 했다. 시엘 활동가는 "죽음이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며 "저도 당사자라 지금은 괜찮긴 하지만 상태가 안 좋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소중한 사람을 애도하는 걸 '욕심'이라 한다

유선우(가명) 씨 또한 지난해 친구를 잃었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30대 초반인 선우 씨는 "다들 결혼식에 다닐 나이인데 저는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더 많이 간 것 같다. 처음 정장을 마련한 것도 장례식에 가기 위해서였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이런 게 성소수자가 처한 현실"이라고 했다.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은 곧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도, 소중한 사람을 잃은 아픔을 드러내는 것도 '욕심'으로 만든다. 더욱이 커밍아웃 후 원가족과 단절되는 일도 드물지 않은가 하면, 성소수자 동료들과 더 돈독하게 가족처럼 지내는 경우도 많다. 생활을 함께하며 서로를 돌보는 관계. 가족이지만 가족이 아닌 관계. 이 모순이 확연히 드러나는 건 장례식에서다. 특히 동성커플의 경우엔 상주가 돼야 할 사람이 고인의 부모에게 '친한 친구'로 소개되고 때론 장례식에 오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파트너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절차나 그런 결정 권한이 전혀 없죠. 추모를 제대로 못 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전엔 원가족이 아예 장례식장, 묘지를 안 가르쳐주는 일도 많았대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성소수자 친구들이 고인의 장지까지 따라갔는데 고인의 원가족이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이었던 거예요. 목사님을 모시고 추도 예배를 하면서 성소수자 친구들을 원망한 거죠. '너희들 그렇게 살지 말라'고요. 장례식에 가서 그런 말을 듣고 온 거예요." 유선우

▲성소수자 추모제 Kiss & Cry(키스 앤드 크라이). 추모공간의 한쪽 벽에 추모 메시지를 남기는 공간이 있다. ⓒ프레시안(조성은)

자신을 '50대 게이'라고 소개한 박재현 씨는 "어렸을 때, 20대에는 저도 스스로 세상을 떠나고자 했다"고 했다. 살아남은 시간만큼 떠나보낸 사람들도 많다. 지난해에는 다섯 명이나 세상을 떠났다. 죽음은 늘 그와 가까이 있었다. 재현 씨는 "먼저 떠난 성소수자의 장례식은 애매하다"고 표현했다. 고인이 가족에게 커밍아웃했는지 안 했는지 눈치껏 알아채야 하기 때문이다.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도 난감하다. 재현 씨는 지난해 한 장례식에서 "어떻게 아는 사이냐"는 상주의 물음에 "친한 형님"이라고 답했다. 재현 씨는 허탈함이 담긴 표정으로 "그런 현실이 웃프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죽음 이후에 남은 사람들.' 추모제에 참석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한 말은 아마도 "잘 살아내자"일 것이다. "누군가를 추모할 때 두려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라고도 했다. 이야기의 끝은 결국 차별금지법(평등법)이었다. 김지윤 활동가는 "'첨예한 논쟁'에 비해 허무할 정도로 상식적인 법"이라면서 "'차별금지 사유에 성소수자를 포함하느냐, 안 하느냐'라는 물음 자체가 성소수자에게는 좌절을 의미한다"라고 했다.

그럼에도 살아내자, 잘 살아내자

본격적으로 추모제가 시작되고 무대 위 스크린에 추모 메시지를 담은 영상이 재생됐다. "나는 아직 언니 번호를 지우지 못했어", "네가 나오는 꿈을 꿔. 잊지 않으려 다이어리에 꼭 적어놔", "행복하기 위해 세상을 떠난 너. 그곳에선 행복하길 바라"… 이어 무대에 오른 사람들은 그간 묵혀온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다. 말하고 듣는 것만으로도, 공감한다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향한 위로와 치유가 된 시간이었다.

추모제의 마무리는 "슬퍼하지만은 말자"는 메시지였다. 추모제를 기획한 활동가들은 "추모제가 슬프기만 하지 않고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누군가를 떠나 보낸다는 건 큰 상처이자 슬픔이지만 성소수자의 일상이 항상 슬프기만 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나날엔 크고 작은 행복, 기쁨이 계속될 테니 말이다. 서로의 곁에서 안부를 챙기며 일상을 영위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계속 혐오와 폭력을 일상에서 겪고 있잖아요. 김초엽 작가님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이런 글이 있어요. '우리는 같이 아플 거야. 그렇지만 그것보다 더 행복할 거야.' 우리는 여기에서 계속 혐오와 차별을 겪으며 아파할 거지만 그만큼 더 행복할 거예요. 그게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웃음) 뭐랄까, 우리가 엄청 힘이 있는 존재는 아니잖아요. 막 돈을 많이 지원하고 그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서로 아플 때 그 옆에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힘들 때 같이 울 수 있지 않을까요? 같이 안고 토닥이는 거요. 그렇게 버티고 살고 싸우면 좋겠어요." 김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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