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곁 짧았던 행복, 그 뒤로 밀려오는 먹구름

['박헌영의 아들' 원경 대종사 이야기] 6~7화

6. 짧은 행복

"병삼아, 아저씨 허리 꼭 잡아라."

"예, 신난다. 빨리 가세요."

김삼룡은 선글라스에 농민들이 쓰는 밀짚모자를 쓰고 병삼을 자전거 뒤에 태우고 예지동과 장충동 일대를 돌기 시작했다. 병삼은 자전거 뒤에 앉아 호기심 많은 눈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상점들과 사람들을 쳐다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자 이제 잘 놀았으니 들어가서 한글 공부해라."

"예, 아저씨."

김삼룡은 박헌영을 만나고 온 뒤 그의 지시대로 예지동과 장충동 경계에 있는 큰 적산가옥(일본인이 살다가 해방이 되자 버리고 간 집) 세 채를 구입했다. 가운데 이층집은 박지영 내외와 병삼이가, 오른쪽 집은 자신과 이옥숙이, 왼쪽 집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젊은 경호원들이 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김삼룡은 젊은 일꾼들을 시켜 각 집을 연결하는 비상문을 설치했다. 김삼룡은 이곳을 조선공산당(1946년 겨울 이후에는 남로당)의 핵심 아지트로 삼기로 한 것이다.

▲ 해방 후 원경을 보살핀 박헌영의 오른팔 김삼룡 ⓒ원경스님

"이층에서는 살림을 하고 아래층에서는 쌀과 반찬들을 팔면 될 것입니다."

김삼룡은 박지영 부부에게 집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박지영 부부를 따라 이층으로 올라가자 일본 집답게 다다미방들이 나타났다.

"저 방을 네가 쓰면 되겠다."

제 방이 생긴 병삼은 신이 났다.

▲ 원경이 김삼룡의 보호아래 살았던 것으로 기억하는 예지동은 지금 재개발중이다. ⓒ손호철

1945년 가을에서 1950년 봄, 특히 아버지 박헌영이 북으로 넘어가는 1946년 가을까지의 시간은 병삼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물론 어머니는 없었지만 가끔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고, 큰아버지 부부가 친아들처럼 잘 대해줬다. 박헌영의 아들인 만큼 김삼룡 아저씨 내외, 그리고 젊은 열렬당원들이 그를 극진하게 모셨다. 아직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았지만 이옥숙에게 한글도 배웠다. 그러나 그가 정말 좋아한 것은 당수, 즉 가라테라는 무술이었다(당시는 아직 태권도가 일반화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이보게 이 동지,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병삼이가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자네가 병삼이에게 무술을 가르쳐주게."

김삼룡은 병삼이가 앞으로 살아가려면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무술이 뛰어난 한 경호원에게 병삼이에게 무술을 가르치라고 지시했다. 체격이 크지 않았던 박헌영과 달리 어머니를 닮아 체격이 컸던 병삼은 공부보다 무술 연마를 더 좋아했고 소질도 있었다.

"네가 병삼이구나."

1946년 초,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한 남자가 나타나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가 작고 얼굴이 유난히 검었으며 볼품이 없었지만 눈빛만은 범상치 않았다. 처음 보는 남자의 출현에 수줍어하는 병삼에게 김상룡 아저씨가 말했다.

"병삼아, 인사해라. 한산스님이다."

스님이라는 분은 머리를 깎았지만 승복이 아니라 양복을 입고 있었다. 이후 병삼을 10년 이상 돌보게 되는 그는 박헌영의 아버지가 다른 누이인 조봉희의 아들, 따라서 병삼의 고종사촌으로, 동경제대를 나온 수재였다. 특히 그는 대학졸업 후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됐지만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박헌영의 비선조직으로 극비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병삼아, 아버지 보러 가자"

한산은 앞장서서 병삼을 혜화동으로 데리고 갔다.

"병삼이, 잘 지냈지? 불편한 것은 없니?"

"없어요."

박헌영은 여전히 이층 서재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바쁜 중에도 병삼을 반갑게 맞아줬다. 병삼은 두 번째 만남인 만큼 아버지에게 경계심을 덜 나타냈다. 그러나 거기에는 지난번에 보지 못한 또 다른 남자가 있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매에 건장한 체격이었다.

"병삼아 인사드려라, 아버지가 아끼는 이현상 아저씨다."

"안녕하세요."

"아, 네가 병삼이구나. 똘똘하게 생겼구나."

이현상은 김삼룡, 그리고 옥중에서 옥사한 이재유와 함께 1930년대 서울지역에서 사회주의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경성트로이카의 한명으로, 출소 후 1940년대에도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위한 경성콤그룹을 이끈 인물이자 이후 지리산 빨치산을 지휘한 사람이다. 병삼은 이날 한산스님에 이어 지리산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는 남부군사령관 이현상을 만나게 된 것이다.

▲ 일제에 체포됐을 당시(좌)와 1948년 북에서 돌아와 지리산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이현상(우) ⓒ원경스님

"누님, 환갑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바쁠 텐데 이렇게 자리도 만들어주고."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 아이가 병삼인가요?"

"누님, 맞습니다."

"병삼아 이리 와봐라. 한 번 안아보자!"

1946년 2월 혜화장에는 조봉희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한산, 김삼룡, 이현상 등 박헌영의 최측근들이 모였다. 물론 병삼도 참석했고, 처음으로 고모인 조봉희를 만났다.

"자, 사진 찍게 다들 서시지요."

가운데에 조봉희가, 그 옆에 박헌영이 병삼의 손을 잡고 섰다. 오른쪽에 이현상과 김삼룡, 정태식이, 왼쪽에는 한산스님과 이주하, 이순금이 섰다. 특히 사진을 안 찍기로 유명해 경찰이 그 얼굴을 몰라 이후 체포에 애를 먹은 김삼룡까지 사진을 찍었다.

이것이 병삼과 아버지 박헌영의 마지막 만남이었다.(이후 한산 스님은 병삼이 박헌영을 여섯 번 만났다고 병삼에게 말해줬지만 자신이 기억하는 것은 두 번뿐이라는 것이 원경의 회상이다. 그날 모임이 조봉희의 환갑모임이라는 것도 한산이 이후 사진을 보며 설명해 준 것이라고 한다.)

"병삼아, 이거 잃어버리지 말고 잘 간직해야 한다."

며칠 뒤 한산스님은 작은 사진 한 장을 병삼에게 줬다. 혜화장에서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한산스님은 사진을 주기 전에 그 뒷면에 썼다. ‘1946년 2월.’

예지동 아지트는 최극비 장소로 남로당 핵심간부들 중에서도 한산, 이현상 이외에 이주하 정도가 출입했다(김삼룡을 체포한 검찰관계자는 회고록에서 감삼룡 아지트가 쌀가게 간판을 내 걸고 있으면서도 거의 장사를 하지 않아 이웃에서 수상하게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이주하는 전설적인 1929년 원산총파업을 주도했던 인물로, 박헌영, 한산, 김삼룡, 이현상과 달리 북한 출신이지만 남쪽으로 내려와 박헌영과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김삼룡은 서울 시내에 이 같은 아지트를 예지동 이외에도 효제동, 아현동, 공덕동, 이태원 등 일곱 군데에 두고 수염을 달고 선글라스를 쓰는 등 변장을 한 채 자전거를 타고 이곳들을 오가며 박헌영의 지시를 받아 조선노동당을 지휘했다(김삼룡은 변장의 귀재로 체포 당시 선글라스만 9개를 가지고 있었다고 담당검사는 회고했다).

병삼은 나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박헌영과 김삼룡, 한산 등은 그렇지 못했다. 2차 대전 중 동맹국으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한 미소 양국이 냉전으로 치닫고 각각 남한과 북한에 친미, 친소정권을 세우려고 하면서 정국이 요동쳤기 때문이다. 특히 친일파 척결, 농지개혁 등을 바라는 민중적 요구가 폭발하면서, 이에 부응했던 소련 점령하의 북한과 달리 미군정이 민중적 요구를 억압한 남한의 정국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니 이 결과를 보십시오."

보고서를 받아든 하지 미군정사령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사회주의 70%, 자본주의 14%, 공산주의 7%, 모르겠다 8%’. 한국민들을 대상으로 "귀하가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여론조사결과였다.

특히 친일경찰 등 친일관료들을 그대로 고용한 미군정의 정책과 농지개혁·식량정책의 실패로 일어난 쌀 파동은 결국 1946년 10월 1일 미군정에 대항한 대구의 항쟁(10월 대구항쟁)을 불러 일으켰다. 대구항쟁은 이어 추수봉기라고 불리는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했다.

미군정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고 많은 사람들이 조작이라고 의심하는 정판사 위폐사건(조선공산당이 위조지폐를 찍었다는)을 이유로 1946년 9월 박헌영, 이주하 등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이 같은 격동 속에서 미군정과 친일경찰을 피해 잠행하던 박헌영은 안전한 북한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남한의 혁명을 지휘하기로 결정했다.

▲ 좌경화된 해방정국을 친일경찰 고용 등을 통해 극우로 이끌어간 하지 미군정사령관이 이승만, 김구와 악수를 하는 사진이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남쪽은 김삼룡 동지가 총책을 맡고 이주하 동지가 군사, 정태식 동지가 선전과 기관지를 맡아주세요."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병삼이를 부탁합니다."

"알았습니다. 걱정 말고 올라가십시오."

1946년 가을, 박헌영은 김삼룡과 한산에게 병삼을 부탁하고 북한으로 향했다.

7. 폭풍전야 

"병삼아, 밥 먹어라."

"네, 큰 아버지."

1946년 가을 아버지는 북한으로 넘어가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큰아버지 부부, 그리고 김상룡 아저씨 부부 등은 병삼이를 잘 보살폈고 병삼은 행복했다.

그러나 정국은 해방 당시 기대했던 방향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만큼 김삼룡 부부의 안색은 점점 침울해져갔다.

"아이고 이 동지, 그래도 살아 나왔군요!"

1947년 봄 김삼룡 집에 이현상이 피투성이가 되어 엉망인 몸으로 나타났다. 이현상이 해방 후 결성된 노동조합인 전국노동자평의회(전평) 허성택과 함께 체포된 지 두 달 만이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그래 몸은 많이 상하지 않았나요?"

조심을 하느라고 전차도 여러 번 갈아타고 서울시 여러 곳을 뺑뺑 돌다가 찾아왔지만, 혹 미행이 붙었을지 몰라, 한참동안 창밖을 내다본 뒤 이현상이 입을 열었다.

"노덕술 개새끼!"

"아니 노덕술에게!"

노덕술은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던 악명 높은 친일경찰로 그가 해방 후에도 미군정의 친일경찰과 친일관리 중용정책에 의해 경찰로 남아 사회주의자 독립운동가들을 잡아 고문해 왔는데, 이현상까지 그에게 고문을 당한 것이다. 특히 노덕술은 이현상에게 남로당의 총지휘관이었던 김삼룡의 은신처를 추궁했다.

김삼룡은 이주하, 정태석 등의 도움을 받아 박헌영이 북으로 넘어가며 지시한대로 1948년 11월 조선공산당과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김두봉 등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인 연안에서 활동하던 연안파 공산주의자들이 이끌던 남조선신민당을 합당해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만들었다. 초대당수는 여운형이었고 여운형이 탈당한 뒤에는 허헌이 당수였지만, 실질적인 운영은 김삼룡이 했다. 그런 만큼 이승만 정부는 김삼룡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1948년이 되면서 미군정과 이승만이 미군정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와 단독정부수립 움직임이 가속화됐다. 김구가 통일을 위해 삼팔선을 베고 쓰려지겠다며 북한을 넘어갔다 왔다. 제주에서는 총선거에 반대해 4월 3일 제주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등 반대운동이 거셌다. 하지만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됐다. 김삼룡 등의 활동은 더욱 힘들어졌고 이들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경찰의 습격에 대비해 보안에 더욱 힘을 썼다.

"병삼아, 아저씨 이야기 잘 듣고 외워보아라."

병삼은 김삼룡이 시키는 대로 그의 말을 듣고 외워보였다.

"잘했다. 아저씨랑 자전거 타고 돌 때 들리는 빵집 있지? 거기 가면 한복 입은 아저씨가 있을 것이니, 그 아저씨에게 외운 이야기를 해주고 그 아저씨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듣고 와 나에게 전해줘야 한다."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고 보안이 어려워지자, 김삼룡은 어리기 때문에 의심을 사지 않을 병삼을 연락책으로 이용했다.

"수고했다. 상이다."

병삼이 지시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답을 받아오면 김삼룡은 병삼이 좋아하는 빵을 상으로 줬다.

"아이고 이 동지, 웬일이에요?"

1948년 가을, 북한으로 넘어간 이현상이 나타나자 김삼룡은 놀랐다.

"김일성 부하 놈들이 하도 김일성을 숭배하기에 이 동지가 이정 선생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들었다가 대판 싸움이 벌어져 러시아 유학이 취소됐고, 노발대발하는 김일성을 선생님이 설득해 이 동지를 강동정치학원(북한이 월북한 남로당계열을 훈련시켜 대남공작원과 유격대원으로 양성하기 위해 세운 학교)으로 보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예, 거기서 유격훈련을 받았고 선생님이 남으로 내려가 유격전을 준비하라고 해서 내려왔습니다."

"아, 그런가요. 잘 왔습니다."

"헌데 병삼이는?"

"나가서 아이들과 노나 봅니다."

"못 보고 가네요. 저는 이제 지리산 쪽으로 내려갑니다."

"건투를 빕니다. 몸조심하십시오."

얼마 뒤인 1948년 10월 제주 4.3진압을 위해 제주로 출동명령을 받은 여수 14연대에 소속해 있던 지창수 하사 등 남로당계열 군인들이 출동을 거부하고 봉기했다. 이들은 경찰, 친일파, 기독교신자 등을 처형했고 진압병력이 도착하자 전투를 벌이다가 이들에 밀려 순천으로 올라와 마찬가지로 경찰, 친일파 등을 처형했다.

"이는 당적 죄악입니다."

이현상은 14연대의 봉기 소식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여순사건은 박헌영, 이현상 등 남로당 지도부가 지시하지 않은 일선조직의 돌출사건이었다. 이는 다수 민중이 아니라 군내 소수 남로당원들이 주도한 것으로, 10월 대구항쟁과 같은 전면적인 ‘민중봉기’도 아니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민간인은 말할 것 없고 군인, 경찰 등 포로를 죽이지 않고 훈계하고 때로는 차비까지 주어 보내온 이현상은 특히 14연대가 군경과 우파, 기독교신자들까지 처형했다는 소식을 듣자 당적 죄악이라고 분노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일이고, 사태수습을 위해 그는 순천으로 달려갔다.

▲ 14연대의 순천역 도착을 그린 여수 박금만 화가의 그림

이현상은 순천역에서 남은 군대 800명을 만났고 이들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북한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추위와 식량부족으로 고통을 받다가 1949년 겨울 국군의 동계토벌작전에 거의 소멸하고 말았다. 살아남은 것은 이현상을 비롯한 극소수에 불과했다.

안타까운 것은 이 같은 14연대 남로당 당원들이 일으킨 ‘모험주의적’인 봉기로 여수와 순천의 죄 없는 주민들이 다수 학살당한 것이다. 진압군을 끌고 온 토벌대장 김종원은 일본군 출신으로 자신의 잘못된 작전지휘로 여수항에 상륙하려던 진압군이 다수 희생되는 등 피해를 입고도, 화풀이로 주민들을 여수시내 초등학교에 모아 놓고 자의적 기준으로 협력자들을 가려내서 일본도로 목을 치는 피의 복수극을 벌이는 등 대량학살을 자행했다(여수 중앙초등학교 앞에 가면 그의 만행을 고발한 표시판이 세워져있다).

"병삼아, 오늘부터 너도 학교에 가야한다."

"정말요?"

학교에 가게 됐다니 병삼은 신이 났다. 그는 가까운 남산초등학교에 입학했다(원경은 자신이 1950년 당시 남산초등학교 3학년을 다녔지만 공부한 기억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3학년에 편입한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는 박헌영의 피를 물려받아 총명했지만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체육시간과 운동만 좋아했다.

▲ 원경스님이 다닌 남산초등학교 ⓒ손호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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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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