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박헌영을 만나다

['박헌영의 아들' 원경 대종사 이야기] 4~5화

4. 박헌영의 아들

"아이고, 이정 선생님 애를 어떻게 합니까?"

"아니 이정 선생님 어머니는요?"

"몸이 아파 예산으로 내려가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큰일이네요. 어쩌겠어요. 우리가 키워야지요."

정순년이 산후 백일 만에 친정에 잡혀간 뒤 박헌영의 어머니는 예산의 주막 등을 큰 아들 박지영에게 맡기고 과천으로 올라와 병삼을 키웠다. 그러나 1년 뒤 병이 나 예산으로 내려간다고 정태식에게 연락을 해 왔다.

▲ 예산 박헌영 생가 앞에서 선 원경스님, 심지연 교수(우), 필자(좌) ⓒ손호철

정태식은 병삼을 과천에 살고 있는 김삼룡의 애인 이옥숙 집으로 데리고 갔다. 병삼은 아버지, 어머니 없이 이렇게 박헌영의 동지들에 의해 키워졌다. 병삼은 어린 시절 집 뒤 쪽으로 보던 관악산을 기억했다.(원경스님은 입적할 때까지 자기를 1950년까지 키운 사람이 이순금이라고 회상했지만, 필자가 조사해본 결과, 이순금은 1946년 월북했다는 점에서 이옥숙이 맞다.)

"지영아, 네 동생인 헌영이에게 어린 아들이 하나 있단다. 어미 쪽 친척이자 헌영의 친구인 정태식을 찾으면, 그 애 행방을 알 수 있을 것이니, 해방이 되면 반드시 네가 그 아이를 찾아서 헌영이에게 데려다 줘라."

1943년 박헌영의 어머니 이학규는 해방을 보지 못했고, 따라서 일제를 피해 숨어 지내야 했던 아들 헌영을 보지 못 한 채, 숨을 거두어야 했다. 죽기 전 그는 유언으로 박헌영의 배다른 형인 박지영 부부에게 병삼을 부탁했다.

충남 예산 광시면 서초정리에 가면 이제는 버려진 폐광이 있다. 이학규가 조선조 말에 시집온 양반집 조 씨 집안이 운영하던 금광이다. 이학규는 이집 둘째 며느리로 조병희라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남편은 금광을 개발했지만 결핵을 앓다가 일찍 타계했다. 

남편이 죽자 이 씨는 금광의 광부들에 밥을 해주며 금광을 실질적으로 운영했다. 그러다가 금광에 쌀을 대는 미곡상 박현주를 좋아하게 돼서 1900년에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가 바로 박헌영이다. 며느리의 불륜에 화가 난 조 씨 집안은 이 씨를 내쫓았고 이 씨는 가까운 신양면 소시장으로 이사해 큰 국밥집을 열어 큰돈을 벌었다. 이 미곡상 박 씨가 본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즉 박헌영의 이복형이 바로 박지영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박헌영은 두 시간 걸어 대흥초등학교에 다니며 뛰어난 성적을 올렸고 경기중학교에 진학해 1년 선배인 심훈과 우정을 나누며 공부했다. 3.1운동에 참여한 박헌영은 3.1운동의 실패에 새로운 도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일본을 통해 상해로 가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상해에서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해 고려공산당청년회 설립에 앞장섰고 여성공산주의자였던 주세죽과 결혼했다. 1922년 이를 국내에 이전시키기 위해 귀국하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투옥됐다.

▲ 박헌영이 공부한 예산의 대흥초등학교 ⓒ손호철

만기출소 후 1925년 조선공산당 창립에 관여했고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에 선출됐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하다가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어 살인적인 고문을 당했고 감옥에서 똥을 먹고 광인 흉내를 내(실제 정신병을 앓았다는 주장도 있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뒤 주세죽과 함께 두만강을 넘어 소련으로 도주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시베리아횡단열차에서 딸(박 비비안나)를 낳았고 모스크바 레닌대학에서 공부했다. 다시 상해로 가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하다가 일본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온 뒤 6년형을 살았다. 상해에 남은 주세죽은 다른 공산주의자인 김단야와 다시 결혼했고 러시아로 떠났다.

▲ 박헌영과 부인 주세죽, 딸 비비안나 ⓒ원경스님 제공
▲ 상하이에서 서울로 압송되는 박헌영 ⓒ 원경스님

박헌영은 1939년 출감 후 지하생활을 위해 정순년의 도움을 받다가 병삼을 낳았다. 이현상, 김삼룡, 이재유 등 경성콤그룹과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노력하다가 경성콤그룹 사건이 터지자 광주로 잠적해 벽돌공장에서 일하며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그는 조선공산당의 1인자로 선출되고 일제하에서 민족해방운동을 가장 치열하게 전개한 좌파그룹의 최고지도자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미군정이 남한에 이승만을 중심으로 친미정권을 세우기로 하면서 조작이라는 설이 유력한 '정판사 사건' 등을 이유로 1946년 9월 조선공산당을 불법화시키고 박헌영 체포명령을 내렸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과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신민당이 합당해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만들도록 조치한 뒤 월북했다.

이후 박헌영은 소련의 지원 하에 북한을 장악한 김일성 밑에서 부수상과 외무상으로 활약했다. 한국전쟁 중인 1953년 초 체포된 뒤 1956년 미국제국주의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을 당했다.

한산스님은 병삼에게 아버지 박헌영의 영웅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삶을 그의 독립운동을 중심으로 담담하게 설명해 줬다. 다만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서인지 이정이 공산주의자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고 공산주의 부분은 생략했다.(한산이 공산주의를 비롯한 이정의 모든 이야기를 해준 것은 병삼이 1963년 어머니를 만난 뒤 자신의 신세를 비관해 자살을 시도한 뒤였다.)

박지영만이 아니라 원경스님을 13년 동안 키우고 보살펴 온 한산스님도 바로 이 같은 아버지의 가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한산스님은 아버지가 다른 박헌영의 누이인 조봉희의 아들로, 원경의 고종사촌이었다. 조봉희는 폐병 환자였던 아버지와 격리시키기 위해 서울에서 자랐는데 열다섯 사춘기에 어머니 이학규가 불륜으로 쫓겨나자 충격을 받아 보문동에 있는 한 절에 승려가 되려고 찾아갔다. 마침 권번을 운영하던 한 여자가 그를 보고 수양딸로 데려가 글과 시, 춤을 가르쳐 기녀로 키웠다.

이렇게 큰 조봉희의 머리를 얹어 준 사람, 즉 조봉희를 처음 품은 사람이 전북 익산의 만석꾼갑부 김병순이었다(김병순은 이미 <정경조선>등에 실명으로 보도되어 익명처리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한산스님이다. 본명이 김제술인 그는 동경제대를 나온 엘리트로 알려져 있으며 박헌영의 비선조직이었고 북한으로 넘어간 박헌영과 남쪽에 남은 남로당 핵심을 연결해주는 임무를 수행했고 1950년 이후부터는 원경을 직접 키웠다.

조봉희는 한산스님 외에 딸 하나가 있었다. 딸은 바로 해방정국의 미녀간첩 사건의 주인공 김소산이고, 조봉희와 김소산이 운영했던 것이 바로 박정희 시절 요정으로 유명했던 대원각이라고 한다. 한산은 배다른 형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김해균으로 해방 후 박헌영이 그의 집에 머물게 된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한산의 설명을 듣자, 병삼은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의문을 표현했다.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분이셨단다."

"…"

"만일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 때에도 선생님이 태어나는 곳에 나도 태어나고 싶다. 그래서 그 때 이번 생애에 못 다하신 일을 하신다면, 그 때에도 서슴없이 온몸을 바쳐서 그 일을 도울 것이다."

"네가 앞으로 어떤 생각을 하지 모르지만, 그분을 너의 아버지이기 이전에 우리 민족이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분으로 생각해야 한다. 네가 가슴에 품고 있는 그 분은 너무나 큰 분이다. 그분은 보통사람들과 달리 스무 살 나이에 조국의 해방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고 결심하고 이를 평생 실천한 대단한 분이다."

"..."

"그러니 너라도 양력 12월 15일, 이 날을 잊지 말고 네가 밥이라도 챙겨서 천도의식을 해드려야 한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그 분의 영혼이 어두운 세계를 헤매지 않고 이고득락(離苦得樂, 고통을 떠나보내고 기쁨을 얻는다는 의미로 불교에서 해탈을 의미함)하시기를, 그래서 고통 없는 세상에 다시 태어나시기를 기원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너의 운명이다. 알았느냐?"

"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한참이 지나자 한산스님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너는 지금까지 남과 달리 고생도 많이 하고 기구한 삶을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를 원망하지 마라. 아버지가 그런 삶을 살아 너에게 그런 고통을 안겨준 것도 그분의 운명이고, 네가 그런 분을 아버지로 둔 것, 그래서 고통 받는 것도 너의 운명이고 업이란다."

어려서부터 갖은 풍파를 겪고 살아 눈물이 없어진 병삼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모든 것이 업이고 네가 아버지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니 마음속에서 모든 원망과 미움을 버리고 해방을 찾아야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세상에 베풀고 사는 것이다. 남의 허물을 보지 마라. 그러면 세상에 적이 없단다. 항상 착하게 살아라. 너만 착하게 살면 이 다 세상이 착해진다. 알았느냐?"

"네."

"지금 못 먹는 거, 지금 못 쓰는 거, 지금 못 배우는 거, 그런 것에 너무 슬퍼하고 연연하지 마라. 모든 것이 다 너에게 주어져 있다. 네가 남들처럼 학교가 못 가고 못 배웠지만, 만권의 책을 읽고 나면 어떤 공부한 사람보다 네가 더 뛰어나진단다. 남들처럼 학교 못 다닌다고 슬퍼하지 말고, 시간 있을 때마다 책을 읽어라. 무슨 책이든지 읽고 또 읽어라. 그것이 진짜 공부란다." 

* 박헌영은 1946년 월북한 뒤 1949년 북에서 비서 윤레나와 다시 결혼해 딸 박나타샤와 아들 박세르게이를 두었지만 이들의 생사는 알 수 없다.

5. 아버지를 만나다

‘지하에 숨어 있는 박헌영동지여! 어서 나타나서 있는 곳을 알아라(알리라의 당시 표현). 그리하여 우리의 갈 길을 지도하라!’

1945년 해방이 되자 서울에는 박헌영을 찾는 벽보가 사방에 나붙었다. 일본경찰을 피해 잠적한 박헌영이 빨리 나타나 새로운 조국건설의 방향을 이끌어달라는 벽보였다.

"선생님! 선생님!"

한 청년이 광주에 있는 한 벽돌공장으로 뛰어 들어와 숨이 넘어가는 목소리로 한 남자를 찾았다.

"왠 호들갑이냐?"

벽돌을 만들고 있던 작은 키의 중년 남자가 벽돌을 내려놓고 물었다.

"일본이 항복했답니다!"

"그래? 올 것이 드디어 왔구나!"

일제를 피해 이곳에 숨어 있던 박헌영은 해방소식을 듣자 서울로 올라가는 교통편을 수소문했다. 한 트럭이 서울로 간다는 전갈을 듣고 그 트럭을 얻어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 박헌영이 일제말 일했던 백운동 벽돌공장은 이제 주차장으로 변했다. ⓒ손호철

"해균아, 네 외삼촌이 묵을 곳이 필요하니 네가 방을 좀 내주어라."

박헌영의 배다른 누이인 조봉희는 해방정국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동생 박헌영을 위해 김해균에게 명륜동의 이층 자택을 내어주라고 했다.

경성제대 출신으로 당시 보성전문(현 고려대학교) 영문과 교수였던 김해균은 학생시절 공산주의 독서회에 참여했다가 정학을 당했고 반제동맹으로 구속을 경험할 정도로 의식을 갖춘 지식인으로 자신의 집을 흔쾌히 내줬다(김해균은 이후 가족을 데리고 월북해 김일성대 교수를 지냈으나 박헌영 숙청 때 증인으로 동원됐고 이후 <노동신문> 교정기자를 했다는 소문이 있다).

해방은 어린 병삼의 삶에도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제가 박헌영의 형입니다. 어머니가 유언으로 헌영이에게 병삼이라는 아들이 있다고 하셨는데, 우리 병삼이를 찾아야겠습니다."

박지영 부부는 해방이 되자 어머니의 유언을 생각하고 조카 병삼을 찾기 위해 정태식을 찾아갔다. 정태식은 그들을 과천 이옥숙집으로 안내했다. 이옥숙은 김삼룡과 비밀리에 결혼해 함께 살고 있었다.

"네가 병삼이냐? 내가 네 큰 아버지야. 이제 나와 함께 살자."

박지영은 낯선 사람을 보고 이옥숙 뒤로 숨는 병삼을 안으며 이같이 말했다. 김삼룡 이옥숙 부부가 기르던 병삼은 만 네 살이 되면서 큰아버지 부부의 품으로 넘겨졌다.

다음 날 김삼룡은 박지영과 병삼을 데리고 박헌영이 머물고 있는 명륜동 혜화장을 찾아갔다. 호남 만석꾼 갑부의 서울 집답게, 대지 400평에 건평도 200평에 이르는, 웅장한 저택이었다. 이층으로 올라가 서재로 들어서자 양복을 입고 여러 서류들이 어질러 있는 책상 앞에서 일을 보고 있던 박헌영이 일행을 맞았다.

"선생님, 얘가 병삼입니다. 병삼아, 아버지다, 인사드려라."

병삼은 아버지라는 김삼룡 아저씨의 말에도 불구하고 처음 보는 박헌영 근처로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아이고, 네가 병삼이냐. 그동안 많이 컸구나."

박헌영은 병삼이에게로 다가와 그를 끌어안았다. 병삼이는 처음 보는 남자가 자기를 안자 어쩔 줄 몰라 미동도 하지 않았다.

"형님, 잊지 않고 병삼이를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님도 조금만 더 살아 해방을 보고 돌아가셨어야 하는데."

박헌영은 병삼과 함께 온 지영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머님이 돌아가시면서 너와 병삼이 걱정을 많이 하셨다."

"제가 불효자지요. 병삼이와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으니 잠시 다들 나가 계세요."

▲ 해방 후 박헌영이 머물렀던 헤화장의 원모습

모두들 물러가자 박헌영은 병삼에게 말했다.

"병삼아 아버지가 할 일이 많으니 옆에서 놀아라. 오랜만에 만났으니 너를 옆에 두고 노는 것을 보고 싶구나."

지긋한 눈으로 한참동안 병삼을 바라보던 박헌영은 무언가에 쫒기는 듯 책상의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보는 아들이지만 급변하는 정세는 그에게 병삼과 놀고 있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박헌영이 책상에서 서류작업을 시작하자 병삼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며 긴장이 풀리자, 병삼은 방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병삼아 다 좋은데, 책상에 있는 것들은 절대 손대면 안 된다."

한참이 지나자 박헌영은 볼 일이 있는지 방을 나서며 병삼에게 당부를 했다. 아버지가 방을 나서자 원래 호기심과 장난기가 많은 병삼은 신기한 물건들이 많은 책상에 다가갔지만, 아버지의 말이 생각나 책상 위의 물건들에 손을 대지는 않았다.

조금 있자 박헌영은 김삼룡을 데리고 들어와 조용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지시하기 시작했다.

"병삼아 오늘은 이만 가보고 조만간 다시 찾아오너라."

박헌영은 병삼을 안아주며 말했다.

"박 선생님, 예산에 내려가 봐야 농사나 지어야 할 것이고, 병삼을 봐줄 사람이 필요하니 저희들과 같이 사시지요. 저희 집 옆에 집을 하나 마련해 줄 터이니 쌀과 반찬이나 팔면서 병삼이를 돌보며 지내시지요. 경제적인 것은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박헌영의 지시에 따라 김삼룡은 박지영에게 이 같이 제안했다.

▲ 2000년 수원법원 판결로 박헌영 정순년의 자 박병삼으로 신분을 회복한 원경 호적 ⓒ원경스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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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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