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버지의 죽음
"병삼아, 나를 따라서 절을 해라"
"예."
머리를 빡빡 깎고 승복을 입은 병삼은 한산스님과 함께 절을 했다. 때는 1958년 12월 15일, 장소는 충남 예산 광시면 봉수산에 있는 대련사라는 작은 절이었다.
이정 박헌영이 북으로 넘어가고 한국전쟁이 가까워지자 병삼의 고종사촌형이자 박헌영의 최측근 비밀조직원이었던 한산스님(본명은 김제술로 동경제대를 나온 엘리트라고 한다)은 신변보호를 위해 10살 어린 나이인 병삼의 머리를 깎여 빨치산이 있던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전쟁이 끝나자 이곳저곳 절을 떠돌던 병삼은 17살 나이로 1958년에 대련사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세밑이 가까운 12월 15일, 한산스님이 침통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한산은 평소와 달리 "잘 지냈느냐"고 묻지도 않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조금 뒤 이것저것을 들고 나온 한산은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오층탑을 지나 법당으로 향했다. 사과, 배, 고사리 등 제수들이었다. 제수를 차린 한산은 붓을 꺼내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박헌영 영가'
"아니 박헌영 영가라니! 그러면 아버지가 돌아가셨나?"
병삼은 충격을 받았다.
"병삼아, 따라오너라."
"예, 스님."
절을 끝낸 한산스님은 여전히 아무 설명도 없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눈 덮인 산은 길이 미끄러웠고, 겨울바람은 살을 엤다. 스님은 말없이 산꼭대기에 있는 임존산성으로 향했다. 대련사에서 30분 정도 올라가야 하는 이 산성은 성 둘레가 2450미터에 이르는 백제 최대의 산성으로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무너진 뒤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이 됐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어려서부터 빨치산을 따라다니며 단련된 원경은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한산스님을 따라갔다. 산성에 서자, 일제가 만든 가장 큰 저수지인 예당저수지 등 예산이 한 눈에 들어왔다. 한동안 말이 없던 한산스님은 예당저수지를 손으로 가리키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다.
"저 아래 저수지 앞에 작은 학교가 보이느냐?"
"예. 보입니다."
"저곳이 이정 선생님이 공부했던 대흥초등학교다."
"아."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자 병삼은 눈물이 나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여기서는 보이지 않지만 예당저수지를 지나 조금만 가면 네 할머니가 큰 국밥집을 하며 아버님을 키운 신양면이, 거기서 더 가면 선생님이 태어난 마을이 나온다."
"그런가요?"
"그렇다. 이정 선생님의 고향이 바로 이 동네다. 부처님이 묘해서, 이런 날에, 너를 선생님의 고향인, 따라서 너의 뿌리인 이 동네로 이끌어 오셨구나. 저 아래 가면 먼 친척들이 있지만, 너의 신변보호를 위해 저 동네는 절대 가서는 안 된다. 얼씬도 하지 말아라."
"스님, 알았습니다."
한산스님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그 어른이 이제 돌아가신 것 같구나. 얼마 전 김일성에 의해 처형을 당한 것 같다. 그것도 미국제국주의의 간첩이라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워 사형시켰다고 한다. 정확히 언제 돌아가셨는지 모르지만, 12월 15일, 즉 2년 전 오늘 사형선고를 받은 것으로 신문에 나왔느니라. 그러니 오늘이 기일이라고 생각하고 잊지 말고 제사를 모셔야 한다."
"아니 아버지가! 그것도 미제의 간첩이라니!"
원경은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분노로 피가 거꾸로 쏟는 느낌이었다. 그는 복수심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3. '잘못된 만남'
(이 부분은 원경스님의 어머니 정순년 여사의 회상에 기초한 것이다.)
"응애~"
"축하합니다. 아들입니다."
1941년 3월 21일, 청주 무심천을 등진 한 초가집에서 산파가 안겨주는 아이를 안은 여인은 아이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난 것이 기쁘면서도, 험한 일제하에 독립운동을 하며 도망 다니는 독립투사의 아들로, 그것도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혼외자로 태어난 만큼 앞으로 아이의 운명이 어찌될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손가락의 쌍가락지를 바라보며 이를 끼워준 애 아버지를 생각했다.
"제가 사람이 필요하고 시집가기 전에 신학문도 배울 겸 순년이를 제가 서울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런가? 자네만 믿겠네. 자네가 잘 가르쳐주게."
충북 영동군의 포수집안에서 태어난 정순년은 18살인 1939년 고등교육을 받은 당숙 정태식(사회주의 노동운동으로 감옥을 갔고 출옥 후 경섬콤그룹에서 활동했다)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시골에서 교육을 받지 못한 순년은 신학문을 배운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순년이라며? 나는 이순금이네."
서울에 도착하자 나이가 순년이보다 많은 젊은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관술의 배다른 동생으로 동덕여고 시절 광주학생독립운동 동조투쟁을 주도하는 등 여성운동가 중 가장 많이 투옥됐던 탁월한 공산주의자로 박헌영과 함께 활동하고 있었던 이순금이었다.
한방을 쓰게 된 순금은 기대한 신학문과는 전혀 다른 교육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해야 하며 독립을 위해 일하는 선생님이 한분이 계시는데 네가 그 분을 도와야 한다." 순년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순년아, 짐 싸고 채비해라. 잠시 청주로 내려가 있어야겠다."
당시 열렬한 공산주의자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정태식은 그해 겨울 무심천이 보이는 청주의 한 아담한 집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돌아보니 집은 방 두 칸에 부엌이 있고 마당에 우물과 측간이 있어 살림하기에 좋은 집이었다. 며칠 뒤 이순금이 내려왔다.
"며칠 뒤 이정 선생님이 오시는데 그 분은 참으로 소중하고 훌륭한 분이기 때문에 부모님처럼 소중하게 모셔야 한다."
얼마 뒤 정태식이 두 사람을 데리고 청주 집에 나타났다. "머리는 밤송이처럼 새까맣고 손질을 말끔하게 한 덜 자란 머리를 하고" 키가 작아 첫 인상이 '이상한' 남자와 얼굴이 넓은 사람이었다.
"내가 이야기한 이정 선생님이네, 자네가 잘 보살펴드리게."
"예, 알았습니다."
"아 그리고 옆에 있는 이분은 이정 선생님 돕는 김삼룡 선생님(이재유, 이현상과 같이 1930년대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했던 '경성트로이카'로 1939년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경성콤그룹을 조직한 박헌영의 오른 팔)이고…"
"예"
순년은 고개를 숙이고 다소곳하게 답했다. 정태식과 이순금이 '선생님'이라고 해서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인 줄 알았는데, 이정이라는 분은 의외로 30대 후반~40대 초반의 남자였다. 그는 얼마 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한 조선공산당의 최고지도자 박헌영이었다. 정태식은 순년을 박헌영의 '아지트 키퍼'로 만든 것이다. 배운 것도 아는 것도 없는 시골 출신의 순박한 한 여인의 인생은 이렇게 기구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아니 밥 들고 들어 와, 같이 하지."
저녁때라 순년이 부랴부랴 저녁밥을 지어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와 놓고 나오려고 하자, 정태식이 말했다. 처음 보는 남자들과 겸상하기가 쑥스러웠지만, 정태식의 권유로 밥을 들고 들어갔다. 상이 작아 이순금과 방바닥에 밥그릇을 놓고 조심스럽게 밥을 먹기 시작했다.
"동지, 된장 끓이는 솜씨며 음식솜씨가 우리 어머님하고 똑 같소. 동지의 수고를 고맙게 생각하겠소." 박헌영이 순년에게 한 첫 말이었다.
정태식 등은 서울로 올라갔고, 이날 이후 박헌영은 아랫방을, 순년은 윗방을 썼다. 이정의 식사 준비, 옷 준비, 집안 정리 등을 하는 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박헌영은 아는 것이 없지만 어려서부터 노동으로 단련이 되어 살림을 잘 하고 눈치가 빠른 순년이 마음에 들었다.
"자, 채비를 하고 서울 올라갑시다."
한 달 뒤 박헌영은 순년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도착하자, 정태식. 김삼룡, 이순금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순년은 박헌영과 같이 생활했고 여러 사람들이 아지트로 출입했다. 모두들 이정을 "선생님", "이정 선생님"이라고 존경을 표하자 점점 정이 들고 그를 좋아하게 됐다. 어느 날부터인가 둘은 한방을 쓰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해방이 될 것이다."
"양반상놈 제도를 없애야 한다."
"농민들이 자기 농지를 가지고 농사를 지으며 살 수 있는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박헌영은 시간이 날 때면 순년에게 교양강의를 했다.
"죄송하지만, 선생님, 결혼을 하셨나요?"
"아~ 했는데 딸 하나 낳고 헤어졌지.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아마 죽었을 것이네."
당황하며 박헌영은 답했다(공산주의자 주세죽과 결혼했으나 주세죽이 상하이에서 김단아와 연애를 하자 헤어졌다. 당시 러시아에서 유배를 살고 있었으나 박헌영은 이를 몰랐다). 그리고 언짢은 얼굴로 덧붙였다.
"다음부터는 그런 것 묻지 말게."
"예."
결국 순년은 박헌영의 애를 갖고 말았다. 18살 나이에 신학문공부를 하려고 당숙 정태식을 따라 왔다가, 22살이나 나이 많은 한 독립운동가의 아이를 가지고 만 것이다.
"내 이름은 이춘이고 충남 예산 신양이 고향인데 칠십 넘은 어머님이 한 분 계시고, 형제 내외분이 어머님이 하시던 신양에서 숙박업을 하고 있네."
순년은 그가 자신을 이춘이라고 소개했고 정태식을 비롯한 모두가 그 남자를 이정이라고 불러 그의 성이 이 씨인 줄 알았지, 박 씨인지, 그것도 조선 최고의 공산주의자 박헌영인지는 몰랐다. 사실 해방 전까지는 그가 독립운동가인 줄만 알았지 공산주의자인 줄도 몰랐다.
시간이 지나며 배가 불러왔다. 임신 사실을 안 박헌영과 정태식은 출산을 위해 순년을 청주로 다시 내려보내기로 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네. 청주에 가서 조용히 지내고 있으면 고향에서 어머님이 오셔서 산후를 보아 줄 것이네."
"예, 알았습니다. 선생님."
"그동안 자네가 참으로 내게 큰 힘이 되어주었네. 해방이 되는 날 모든 사람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것이네."
"알았습니다. 건강 잘 챙기시고 잘 지내세요."
"참, 내 이름은 영해 박 씨에 헌영이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정표네."
박헌영은 그때서야 자신의 본명을 알려줬고, 그녀에게 민들레 문양이 있는 쌍가락지를 끼워줬다.
순년은 청주 집에서 지내며 출산을 준비했다. 집에 알렸다간 큰 일이 날 것이 뻔해 알리지도 못하고 출산 경험이 없는 순년은 혼자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누구 있나요?"
출산 보름 전 한 할머니와 아주머니 한 분이 짐을 잔뜩 들고 청주집으로 나타났다. 박헌영의 연락을 받고 예산에서 달려온 박헌영의 어머니(이학규)였다(이학규의 삶에 대해서는 다음 회 참조).
"아이고 색시, 내 아들을 잘 돌봐주고 아이까지 가졌으니 너무 고맙네!"
"우리 헌영이가 말이지…"
어머니는 아들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3번이나 감옥을 갔던 이야기로부터 집안 이야기를 상세하게 해주었다. 원경스님은 1941년 청주의 무심천이 바라보이는 초가집에서 이렇게 태어났다. 박헌영의 어머니는 작명가에서 부탁해 박병삼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야 이년아! 신학문 공부하라고 서울 보냈더니, 결혼도 안 하고 애를 낳아!"
순년이 병삼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데, 갑자기 친정 부모님들이 들이닥쳤다. 부모님들은 다짜고짜 순년을 멱살을 잡고 친정으로 끌고 갔다. 병삼은 생후 백일 만에 이렇게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게 됐다(정순년은 원경 이상으로 기구한 삶을 살게 되는 바, 한 연구자는 정순년과 같은 아지트 키퍼의 삶을 페미니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한 바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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