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공산당의 최고지도자였던 박헌영의 아들인 원경 조계종 대종사가 지난해 말 입적했다. 일제, 해방정국, 한국전쟁, 5.16쿠데타 등 한국현대사의 격변 속에서 영화보다도 더 극적이고 기구하게 살았던 원경스님의 삶을 스님과 함께 그의 행적을 답사해온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연재한다. 총 60여회 분량인 <'박헌영의 아들' 원경 대종사 이야기>는 한번에 2회 씩 연재될 예정이다. 편집자.
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
이 글은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스님이다. 종교학자가 아니라 한국정치를 공부하는 정치학자인 내가 스님의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그의 삶이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가장 응축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종사(조계종의 가장 높은 품계)에 조계종 3인자인 원로회의 부의장, 혼외자, '빨갱이' 자식, 소년빨치산, 특수부대인 UDT 요원과 북파공작원 교관, 탈영병, (40대 1의 대결에서 18명을 때려눕힌) 무술의 고수, 국토건설단(박정희 집권 시절 강제노동수용소) 단원, 음독자살 기도. 서로 잘 어울리지 않는 매우 모순된 조합이다. 그러나 이 모두를 경험한 사람이 있다. 그의 법명(法名)은 원경스님이다. 아니 한국 공산주의운동의 최고지도자이지만 김일성에 의해 '미제국주의의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한 박헌영의 아들 박병삼이다.
이 연재는 '한 인물을 통해본 한국현대사'이자 그 어느 이야기보다도 더 극적인 '휴먼드라마'이다. 다만 전제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글이 여러 면에서 부족하고 '미완성의 글'이라는 사실이다. 글 내용이 철저하게 원경스님과 그의 어머니의 기억과 회상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기억이란 불완전한 것이어서, 스님이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살다가 공개적으로 밝히기 시작한 1989년 이후 가진 여러 인터뷰와 비교해 보더라도 모순된 점이 발견된다.
50년 이상 지난 옛이야기니 기억이 어긋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이런 오류가 나타나 여러 인터뷰와 비교하고 정황을 고려해 시기 교정을 한 것이 두세 군데 된다. 또 시대가 바뀌면서 과거에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새로 하는 식으로 인터뷰 내용이 변화해 왔다. 자신을 키워준 한산스님의 신원 등 자신의 뿌리와 좌익운동에 대해, 스스로 조사를 하고 이야기를 들어 불확실한 것들을 채워나간 대목도 보인다.
안타까운 것은 스님이 자신의 과거에 대한 세부적인 이야기를 꺼리다가 뒤늦게 이를 기록으로 남길 결심을 하고 여러 이야기를 해주던 중 갑자기 심장마비로 입적을 한 것이다. 그래서 세부적인 부분은 의문으로 남아 있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대리 입대의 경우 누구의 이름으로 대리 입대했는지를 알면 군 기록을 확인해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답을 듣기 전에 입적했다.
뿐만 아니라 1973년 가호적을 얻기 이전에는 무적자 신세여서 공적인 자료 등을 통해 그의 주장을 검중하기도 어려웠다(박헌영의 크지 않은 체격에 대비되는 스님의 우람한 체격 등 외모의 차이를 이유로 -스님은 어머니를 빼어 닮았다- 원경이 박헌영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증언 등 여러 정황들이 밝혀지며 이제는 이를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언론보도, 관련자와 인터뷰, 현지답사 등을 통해 그의 주장에 대해 가능한 범위에서 검증을 했고 문제가 있는 경우 간단하게 이를 지적했다.
내가 스님을 만난 것은 유학에서 귀국한 직후인 1980년대 말이니 30여년이 흘렀다. 이후 스님으로부터 직접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스님의 여러 인터뷰를 읽었지만, 스님에 대한 글을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한 계기에 이 글을 쓰게 됐다.
2년 전부터 <프레시안>에 연재한 '손호철의 발자국'이라는 한국근현대사기행을 하면서 스님을 모시고 지리산 등을 가게 됐다. 그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스님은 "중이 무슨!"하시며 거절했지만, "한 개인의 기록을 넘어 한 시대의 기록으로 반드시 남겨야 합니다"라는 설득에 함께 자신의 흔적이 담긴 곳을 다니며 이야기를 해주기로 한 뒤 갑자기 입적하셨다.
세부적 내용에 대한 스님의 이야기를 듣지 못 한만큼, 많은 구체적인 부분들이 공백으로 남아 스님의 삶을 글로 정리하는 것은 포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러 공백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의 큰 골격은 변함이 없는 바, 기구했던 그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야한다는 주변의 요청에 의해 기록의 한계를 전제로 이를 쓰기로 결심했다. 스님의 행적을 따라 전국을 돌아다니며 현장을 보고 느꼈고 사진도 찍었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는 스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 외에도 스님과 인터뷰로 1945년부터 1953년까지 해방정국의 이야기를 <무너진 하늘 : 혁명과 박헌영과 나>라는 3권의 만화로 만든 유병윤 화백의 만화와 설명, 손석춘 건국대 교수의 <박헌영 트라우마>, 윤해동 한양대 교수 등 기존의 인터뷰들이 많은 도움을 줬다. 허유 화백,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 양승태 이화여대 명예교수, 최갑수 서울대 명예교수 등 스님과 교류해온 여러 분들의 증언들도 일화를 되살리는데 도움이 됐다. 영해 박씨 종친회의 박성수 회장과 박용옥 총무는 족보와 주세죽 훈장 자료 등을 보내주는 등 도움을 줬다. 스님과 오랫동안 교류해온 <만다라>의 김성동 작가는 스님과의 일화 이외에도 스님의 삶을 보는 중요한 시각을 이야기해주셨다.
글에 나오는 사건과 행적은 이해를 돕기 위한 객관적인 상황에 대한 서술을 제외하고는 모두 스님과 어머니의 회상에 기초했다. 글 속의 대화들도 대부분 스님과 어머니의 회상에 의한 것이다. 다만 이를 사건 형식으로 풀어 썼고 일부 세부적인 상황은 여러 자료와 현지답사로 보충하고 일부 대화는 전체적 맥락을 고려할 때 당연히 있었을 대화를 재구성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 글은 스님과 어머니의 회상에 기초한 다큐멘터리이지만 이야기를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형식은 소설 비슷한 형식을 택했다. 회상과 당시의 보도 등 다른 것들은 표시했다. 잘 알려진 명사인 일부 등장인물들은 혹시 그분들의 명예에 손상이 될지 몰라 김00 식으로 표기했다.
스님은 살아가면서 병삼, 유동, 세원, 현준, 일우, 명초, 성진, 혜공, 혁, 원경 등 모두 14개의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 자체가 그의 삶이 얼마나 기구했는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기본적으로 그때그때 꼭 필요한 당시의 이름이 아니면 병삼과 원경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자 한다.
그의 삶이, 특히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이 일제 말과 해방정국, 한국전쟁 이후 5.16쿠데타 등 격변의 시대였던 만큼,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이해가 그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긴 설명이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에 대한 설명은 최소화하는 한편 괄호 안에 간단히 설명하는 형식을 취하고자 한다.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고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고 우울증에 시달려야 했다. 아직도 시달리고 있다. 경찰 습격 후 어린 원경이 남로당 아지트에 홀로 남겨져 느껴야 했던 두려움을 나 역시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빨리 글을 끝내 그 같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스님은 평소 말했다. "산자의 그리움은 족쇄와 같아서 살아있는 사람이 내려놓지 않으면 망자는 떠날 수가 없습니다." 연재가 끝나는 날, 나도 그리움을 내려놓으려나.
1. 아버지의 복수
"김일성 개새끼, 반드시 내가 네 목을 따고 말거야!"
1959년 11월, 살을 에는 추위 속에 진해시 지하를 관통하는 하수구 오물 속에서 한 건장한 청년이 죽을힘을 다해 바다 쪽을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그는 추위와 피로에 온몸이 마비되고 정신을 잃으려 했다. 그 때마다 그는 김일성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얼마를 기었을까, 바다가 가까워졌다. 긴장이 풀리자 지난 18년간의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생애와 일주일동안 잠을 안 재우는 '지옥주'를 비롯해 지옥 같은 해군 특수부대 UDT 훈련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이천구백구십!" 몇 번이나 포기하려고 했지만 병삼은 이를 악물고 조교의 구령에 맞춰 팔굽혀펴기를 계속했다. 이미 가슴과 팔 등 모든 근육은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천구백구십일, 이천구백구십이, 이천구백구십삼… 이천구백구십구, 삼천!" 3000번을 채우고 병삼은 땅바닥에 그대로 뻗어버렸다. 팔굽혀펴기 3000번은 매일 훈련의 일상이 됐다. 이 같은 기초체력훈련은 약과에 불과했다. 공수 낙하훈련, 수중폭파훈련 등 훈련이 심화될수록 낙오자들은 늘어났다.
병삼도 훈련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빠진 것은 악명 높은 지옥주와 생식주였다. "제군들, 지금서부터 자네들은 지옥이 무엇인가를 직접 체험하게 될 것이다." 조교의 말대로, 120시간 동안 잠도 자지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하는 지옥주는 지옥 그 자체였다. 특히 그 절정인 갯벌 극복훈련은 질퍽대는 갯벌에서 80킬로그램이 넘는 소형 고무보트를 머리에 이고 구보 등 각종 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병삼아- 병삼아-" 고통이 극에 달하자 병삼은 갑자기 오래 전에 죽은 이현상 아저씨(조선공산당운동을 했고 지리산 빨치산부대를 지휘한 전설적인 인물)가 부르는 것을 들었다. 환청이었다.
지옥주를 끝내자 생식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120시간 동안 여러분에게 지급되는 것은 이 앞에 있는 물 한 병이다. 나머지는 여러분이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병삼은 어렸을 때 지리산에서 지내며 굶주림과 싸워봤지만, 그것은 오래 전의 일이고 120시간을 굶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해 본 일이었다. 특히 체격이 큰 병삼에게 이는 고문이었다.
그는 누구이기에 이처럼 김일성을 생각하며 지옥훈련을 받고 있는 것인가? 그는 당시 극우 이승만정권 하에서 흔했던 반공투사였던가? 아니다. 그는 한국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한 인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정 박헌영(1900~1957)이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의 지도자로 일제에 저항하다가 감옥에 가야했다. 감방에서 자신의 똥을 먹는 광인행세로 석방되어 러시아로 도주한 뒤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 다시 감옥살이를 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 당수로 선출되어 남한의 좌파운동을 주도하다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1946년 가을 북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나자마자 김일성에 의해 체포되어 1956년 미제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선고받았고 그 다음 해 총살당한 '비운의 혁명가'이다.
진해 하수구에서 김일성을 향한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하며 지옥훈련을 받고 있던 사람은 박헌영의 아들 박병삼(원경의 본명)이었다. 특히 1년 전 12월 15일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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