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바이러스'로 정권 잡겠다는 건가

[김종구의 새벽에 문득]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대선에서 패배하고 퇴장할 당시 많은 미국 언론은 "트럼피즘(Trumpism)이 앞으로 미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길게 드리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트럼피즘이란 트럼프 전 대통령의 독특한 정치 전략, 그리고 이로 인해 형성된 정치·사회적 현상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트럼피즘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편 가르기, 인종주의, 혐오와 배제, 반엘리트주의, 파시즘, 포퓰리즘, 반세계화, 반공주의, 우익대중주의, 남성우월주의, 반지성주의, 동성애 혐오 등 여러 개념이 혼재돼 있다. 사실과 거짓 뒤집기, 전문가 무시, 막말과 선동 등의 행동 양태도 내포한다. 비합리적이면서도 무정형, 그러면서도 막강한 폭력성의 에너지가 '트럼피즘'이란 단어에는 뭉뚱그려져 있다. 트럼프 대통령 시절 유럽의 극우 세력이 더 발호하면서 "트럼피즘이란 세균이 포퓰리즘의 얼굴로 지구를 덮고 있다"는 진단도 나왔다.

'트럼프 바이러스'가 태평양 건너 한국 정치에도 상륙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잇달아 발표한 각종 공약과 선거운동 양태가 그렇다. '여성가족부 폐지', '달파멸콩' '사드 추가 배치', '건강보험 외국인 숟가락론' 등…. 원조 바이러스와는 다른 '한국형 변이 바이러스'지만, 특정 계층의 분노를 혐오로 돌려서 정치적으로 악용한다는 점에서 트럼피즘과 근본적으로 겹친다.

반페미니즘은 트럼피즘이 출현하기 전부터 형성된 유럽 극우주의의 대표적 특성이다. 유럽 극우는 여성을 약한 존재로 규정해 차별화하는 기존의 '온정적 성차별주의'에서 한 걸음 나아가 최근에는 여성이 남성을 지배하려 한다고 보는 '적대적 성차별주의'가 더욱 노골화하는 추세인데, 국민의힘과 윤 후보도 여기에 따르는 모습이다. '달파멸콩, 멸공 자유'는 극단적 반공주의이며, 사드 추가 배치와 건강보험 숟가락론은 중국에 대한 혐오 부추기기로 트럼피즘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행동 양태의 측면에서 봐도 그렇다. 사실의 왜곡과 부풀리기, 막말과 선동은 트럼피즘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외국인 건강보험 특혜론의 경우, 국민건강보험공단 등의 자료를 보면 오히려 외국인 대상 건강보험 흑자가 계속 늘고 있어 사실 관계가 엉터리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도 북한이 단거리 미사일을 1천 발 이상 보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굳이 값비싼 중장거리 미사일로 남한 수도권을 향해 고각 발사를 할 이유가 없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의 분석이다. 그런데도 윤 후보는 우리 국민이 외국인들 때문에 건강보험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고 선동하고, 사드 배치만이 유일한 안보 전략이라고 우긴다.

트럼프는 여러 가지 상식에 어긋나는 무식함으로 구설에 자주 올랐는데 윤 후보도 이에 못지않다. 최근에는 'RE100'(2050년까지 기업이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국제 캠페인) 용어 자체를 모르는 것으로 드러났다. 국가 지도자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알고 실행 계획을 고민해야 할 단어인데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모를 수도 있지 않나. 설명해 주는 게 예의"라고 적반하장 태도를 보였다. "무식함은 미덕이 아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2016년 럿거스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트럼프 당시 공화당 대선 후보를 향해 날린 일갈이다.

윤 후보의 '트럼프 따라하기'는 원조 트럼피즘보다 훨씬 더 나쁜 측면도 있다. 트럼피즘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좌우 엘리트에 대한 불신 등 반엘리트주의 속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지금 윤 후보의 정치 행보는 우리 사회 기득권층과 우파 엘리트들의 연합작전이다. 검찰을 비롯해 개혁 대상인 세력이 권토중래를 꿈꾸며 일제히 총궐기한 모양새다.

트럼프의 행태에 대해 미국의 언론은 <폭스 뉴스>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판적이었으나 한국의 대다수 언론은 윤 후보의 가장 강력한 지원 세력이다. 윤 후보를 검찰총장 시절부터 '인큐베이팅'해서 오늘의 대선 주자를 만든 게 바로 언론이다. 그러니 윤 후보의 트럼프 따라하기를 꾸짖을 리 없다. 혐오와 차별을 동원한 선거운동을 묵인·동조하는 차원을 넘어 은근히 부추기기까지 한다. 반페미니즘 선거 전략에 대해 "20대 남성을 겨냥한 선거 전략이 효험을 보고 있다"고 칭찬하는 식이다.

윤 후보의 '혐중 정서 부추기기'도 트럼프 전 대통령의 경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위험하다. 트럼프의 반중 정책은 중국을 압박하고 견제하려는 세계 패권 전략의 일환이다. 무엇보다 미국은 중국과 무역전쟁을 불사할 정도의 '힘'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한-중 관계는 미-중 관계와는 완전히 다르다. 외교적, 경제적으로 뒷감당할 자신도 없이 표를 겨냥해 무턱대고 '혐중 정서'를 부추기는 게 과연 한 국가를 책임지겠다는 사람의 올바른 자세인지 참으로 의문이 아닐 수 없다.

트럼피즘이 미국 사회에 남긴 어두운 그림자를 다시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미국이 그토록 자랑해온 민주주의가 뿌리부터 흔들렸다. 트럼프 시대에 창궐한 분열과 갈등의 악령은 앞으로도 계속 미국을 괴롭힐 것이다. 한 미국 평론가는 "트럼프의 온갖 실패와 거짓 주장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권자들이 그를 지지했다는 '정치적 컬트'가 트럼프가 남긴 가장 해로운 유산"이라고 짚었다.

지금 이 땅에도 이미 '정치적 컬트'가 펼쳐지고 있다. 상식에 어긋나고 시대에 역행하는 언동에 오히려 일부 세력의 환호가 쏟아진다. '혐오와 배제'의 선거 전략이 활개를 치며 지지율을 끌어올린다. 민주주의의 후퇴, 분열과 갈등의 심화가 불을 보듯 뻔한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런 병리 현상에서 벗어날 '트럼피즘 바이러스 백신'은 없는 것일까, 이런 생각마저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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