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도시 재생보다 도시 생산이 우선

[좋은 도시를 위하여] 대전

2022년 새해가 밝았다. 어느덧 2019년은 까마득한 옛날처럼 여겨진다. 코로나19도, 마스크도 없던 그해 가을, 한국에 머물며 여러 도시를 다녔다. 같은 해 봄에 출간한 <로버트 파우저의 도시 탐구기> 독자들과의 만남을 위해서였다. 그 가운데 대전이 있었다.

대전과는 인연이 꽤 깊다. 1987~1988년 사이 실제로 살았고, 1993년 엑스포는 물론 그후로도 몇 차례 일부러 찾아가곤 했다. <로버트 파우저의 도시 탐구기>에 대전에 대한 내용이 있음은 물론이고, 그런 인연으로 2019년 한국에 머물 때 두 차례에 걸쳐 독자와의 만남에 초대를 받았다. 행사 전후로 대전 거리를 한참 동안 걸었다. 옛 모습이 떠오르는 곳을 찾았고, 달라진 곳을 확인하기도 했다.

▲1987년 대전 중앙로 모습. ⓒ로버트 파우저

새해가 되면 한국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코로나19로 또 실망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기억을 더듬다 보니 그때 거닐던 대전이 생각났다.

대전은 어떤 도시일까. 2019년 5월 대전시립미술관 대전창작센터에서 본 <대전여지도>는 대전의 모습을 가늠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때 그 전시의 설명에 따르면 대전의 역사는 철도로부터 시작했다. 19세기말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조선 전역에 철도가 깔렸다. 경부선과 호남선이 인근 공주가 아닌 대전에서 만나게 되면서 대전은 교통과 운송의 거점으로, 급속도로 팽창했다. 1931년 조선총독부는 대전을 면에서 시로 승격시켰다. 이후 1940년 대전의 인구는 6만 9,712명으로 불어났고, 대전은 조선에서 15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오늘날 원도심에 당시 건물은 많이 없지만, 바둑판처럼 반듯한 도로는 일제 도시 계획의 결과물이다. 구불구불한 골목도, 한옥도 많은 대구 또는 전주 같은 조선 시대 행정도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해방 이후 분단을 거치면서 대전은 대한민국의 지리적 중심이자 거점으로 더욱 발전했다. 1960년대 공업화와 도시화, 1970년대 정부 시설의 이동으로 도시는 더 빠른 속도로 커졌다. 1940년 인구 수 15위였던 대전은 1970년 6위로 올라섰다. 이 무렵 서울에서 대전으로 수도를 옮기자는 안이 나오기 시작했다. 수도 이전 대신 공립 연구소와 정부 기관들이 속속 대전으로 옮겨왔다. 대덕연구단지와 둔산 신도시가 그 결과물이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국가 균형 발전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이에 따라 수도 이전 논의가 다시 활발해졌다. 그 결과 대전 가까이에 세종특별자치시가 만들어졌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비록 대전은 아니지만 수도로서의 주요 기능이 대전 옆으로 이동한 것은 대한민국의 지리적 위치상 대전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2019년 둔산신도시 모습. ⓒ로버트 파우저

일제강점기 신도시로 탄생한 대전에는 해방 후에도 특히 신도시들이 많이 생겼다. 대전은 신도시의 전시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따라서 대전은 신도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대규모 공사가 전제되니만큼, 신도시 건설에는 큰 결단과 결심이 필요하다. 이는 곧 당대의 정치 경제 상황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뜻한다. 때문에 긴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형성된 도시에 비해 정책 결정자들은 신도시에 당대의 요구에 맞는 효율성을 우선으로 채택하게 마련이고, 이는 곧 계획도시로 수렴한다.

일제강점기의 신도시 대전, 즉 오늘날 대전 원도심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오늘날에도 과거의 흔적은 도로에 뚜렷하다. 대전역에서 옛 충남도청까지 직선으로 뻗은 중앙로가 도시의 기본 축이고 그 양쪽으로 바둑판처럼 시가가 펼쳐져 있다. 한국의 다른 대도시와 달리 과거부터 직선으로 계획되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당시 조선을 지배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는 무엇보다 효율성이 중요했다. 사용하기 쉽게 도로를 계획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한동안 대전 젠트리피케이션의 대표로 거론되던 대흥동을 예로 들면, 도로와 인도는 구분이 되지만, 각 공간은 매우 좁은 것이 특징이다. 용도는 구분하되, 땅을 경제적으로 사용하려는 의도의 반영이다. 서울이나 교토를 비롯한 일본의 오래된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로와 인도의 구분이 없는 골목길처럼 길을 사용하려는 뜻도 읽힌다.

▲대흥동 일식 가옥, 2013년. ⓒ로버트 파우저

그런 동시에 지배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대전역과 충남도청은 크게 지음으로써 도시 전체 경관을 권위적으로 지배했다. 이렇게 계획된 도심에는 주로 일본인들이 살았고, 일본인들을 위한 상권이 형성되었다. 대전역 주변으로는 공장과 군사 시설까지 들어섰다. 일본인들은 전문직, 화이트칼라 계층이 많은 반면 조선인들은 주로 노동자, 서비스업 종사자였다. 이런 구조로 인해 대전에서 가장 큰 시장은 대전역 근처에 형성되었고, 그 결과 일제 시대 대전 원도심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편의를 위해 행정, 상업, 주거 운송 등 도시가 갖춰야 할 기본 기능을 모두 다 갖추게 되었다.

해방 후 도시의 주도권은 한국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1960년대 가속화된 도시화로 대전은 팽창을 거듭했고, 원도심은 여전히 도시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연구소와 정부 기관이 들어설 준비를 시작하면서 원도심 인근 논과 밭이 신도시가 되었다. 1980년대 이후 선진국으로 도약하자는 국가의 비전으로 인해 연구소 같은 지식 산업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고, 대전은 한국의 미래 도시라는 이미지를 획득했다. 대전엑스포 '93은 바로 그 상징이다.

1980년대 이후 건설된 대전 신도시에는 원도심과 비슷하게 직선의 큰 도로 양쪽에 바둑판처럼 도로가 배치되었다. 원도심처럼 땅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는 의도였다. 아울러 급속한 도시화의 생활 환경 개선을 위해 아파트 단지 안에 나무와 놀이터를 만들었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자동차 수요에 맞춰 어디든 주차장이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즉, 이 무렵 '신'도시는 일제 시대 철도 도시처럼 효율적인 땅의 활용과 전문직 화이트 칼라 계층의 편의성을 우선으로 두어 개발되었다.

▲삼익아파트 주차장에서 본 상아맨션아파트, 1987년. ⓒ로버트 파우저

일제 시대에는 철도 도시, 오늘날에는 행정 도시라 할 수 있는 대전은 탄생부터 오늘날까지 '타인'을 위해 만들어진 도시다. 이곳에 살던 화이트 칼라들은 대도시에 더 좋은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 떠나기 쉽다. 이들에게 대전은 잠시 살다 떠나는 객지일 뿐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전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살고 있는, 대전이 고향이 된 '대전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탄생 당시 쓸모를 위해 만들어진 도시의 역사로 인해 광주나 대구, 부산 등에 비해 대전만의 문화 또는 정체성은 비교적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도시가 대전만은 아니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사례로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가 있다. 브라질 정부는 국가의 균형 발전을 위해 1950년대 후반 건설한 이 도시로 1960년 수도를 이전했다. 250만 명에 달하는 인구, 화려한 모던 건축물로 유명하지만, 수시로 들고나는 화이트 칼라와 이 도시에 계속 살고 있는 서민층으로 나뉜 이 도시는 독자적인 문화가 약하고 분위기가 삭막하다는 평을 얻고 있다.

미국 수도인 워싱턴도 사례로 들 수 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1790년 수도 이전을 추진하기 시작, 1800년대 정부 기관의 이전을 마쳤지만 도시의 형성 단계부터 연방 정부 관계자들이 수시로 들고나면서 워싱턴에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기는 어려웠다. 19세기 후반 산업 혁명으로 인해 다른 지역 도시들이 빠른 속도로 팽창하면서 워싱턴은 한동안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워싱턴을 수도다운 수도로 만들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1937년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가 문을 연 것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소련과의 냉전이 심해지자 미국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워싱턴의 존재감은 갈수록 커졌다. 1960~1970년대 스미스소니언 협회가 나서서 새로운 박물관을 건립했고, 존 F. 케네디 센터가 문을 여는 한편으로 산업이 다양해지고 이민자가 늘어나면서 워싱턴의 문화도 한층 다양해졌다. 그 결과 오늘날 워싱턴은 행정 도시의 삭막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미국에서 뉴욕 다음으로 중요한 문화 도시가 되었다.

대전은 대한민국의 수도는 아니지만 해결해야 하는 과제는 브라질리아, 워싱턴과 비슷하다. 요약하자면 산업의 다양화와 독자적 문화의 창출이다. 그러자면 흔히 도시 재생의 기본처럼 여겨지는, 단순히 원도심 길거리에 스토리텔링을 접목한 설치물이나 벽화를 그리는 단계를 초월한 다른 시도가 필요하다. 말하자면 도시 재생이 아닌 '도시 생산'에 초점을 맞추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그 내용으로는 어떤 것이 좋을까? 20세기 말, 한때 미래 도시 이미지가 강했던 때를 되살려 21세기 세계 여러 도시에서 공통적으로 대두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적극적으로 찾아내 실천하는 도시로 도약해보면 어떨까.

그다지 걷기에 좋지 않은 한국의 다른 도시에 비해 가장 걷기 좋은 도시가 되거나, 환경과 생태를 존중하는 에코 시티를 지향하는 것이 방안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도시에 사는 주민들이 이곳에 살고 있는 자부심과 즐거움을 만끽하는, 도시다운 도시로 나아가는 것을 우선으로 두고 말이다.

▲대전역 앞 중앙로 모습, 2019년. ⓒ로버트 파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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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파우저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역임하고, 지금은 미국에서 독립학자로 활동하고 있는 로버트 파우저가 <프레시안>에 '좋은 도시를 위하여'라는 연재를 시작한다. 그는 <미래 시민의 조건>, <서촌 홀릭>, <외국어 전파담>과 <외국어 전파담 개정판>, <로버트 파우저의 도시탐구기>, <외국어 학습담> 등 인문사회 분야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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