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의 연인' 너머로, '붉고 푸른' 진옥출의 생애

정치학자 최산 장편소설 데뷔작 <파란나비>

수려한 외모, 당당한 체구, 출중한 웅변력, 폭넓은 식견, 탁월한 정세인식, 굽힘 없는 소신, 넉넉한 품성…. 해방 전후 영웅담에 묘사된 몽양 여운형은 '사기캐'다. 테러리스트의 흉탄에 스러진 비운의 최후마저 굴곡진 민족적 서사와 엇물려 잔영을 길게 남긴다.

진옥출에 관한 사료는 거의 없다. 천석꾼의 여식, 빼어난 미모, 일본 유학까지 간 인텔리라는 소문들이 조각나 있다. 매우 상반된 행적이 담긴 풍문도 있다. 무정이 이끈 조선의용군 일원으로 항일 무장투쟁 가담, 일제 밀정으로 밝혀진 남편 살해.

'신여성'과 '여전사' 이미지가 중첩된 진옥출의 실존성은 여운형과의 인연을 꼭짓점으로 갈래를 뻗는다. 두 사람은 혼외 관계로 딸을 낳았다. 여운형의 막내딸인 여순구의 친모가 진옥출이다. 해방 전 진옥출이 도쿄 유학 중이던 때였다고 한다.

소설가 최산이 해방전후사 무대에 진옥출을 불러냈다. <파란나비>(목선재 펴냄). 뒷말이 무성했을법한 내연 스토리에 '몽양의 붉은 사랑, 진옥출'이란 부제를 과감하게 얹었다. 명망 있는 민족지도자와 젊고 아름다운 유학생의 스캔들. 이 아슬아슬한 통속성의 덫을, 작가는 발품으로 뛰어넘어 전혀 다른 길을 열었다.

옛 언론기록들을 뒤졌다. 진옥출의 여고보 학적부를 찾아내 고향집부터 샅샅이 훑었다. 중국 타이항산으로 건너가 조선의용군이 항일 격전을 벌였던 자취까지 발로 쫓았다. 파편처럼 흩어진 흔적들을 맞춰 보니, '몽양의 여인' 너머가 그려졌다. 해방과 분단의 소용돌이에 청춘을 던진 한 여성의 생애가 픽션으로서 얼개를 드러냈다.

그렇게 완성된 소설은 붉고 푸르다. 눈부신 파란 원피스 차림으로 종로를 거니는 '모던걸' 진옥출의 내면을 '러시아의 붉은 장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로 채색해 간다. "남녀 간의 사랑은 동지적 사랑이며 자각한 남녀의 사상적 결합이어야 한다"는 콜론타이의 혁명성을 여운형‧진옥출 사랑의 테마로 잡았다.

▲최산 장편소설 <파란나비> ⓒ목선재

자유연애든 동지적 사랑이든, 러브스토리에 머물렀다면 21세기 한국사회에 진옥출의 생명력을 살려내려던 작가의 시도가 빛을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500페이지 장편을 꽉 채운 작가의 도전적인 상상력은 과거로부터 들려온 진옥출의 무의식적 호소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녀가 내 생각 안으로 스며들어와 나를 막아섰다. 그리고 무엇인가로 그녀의 의사를 전달했다. 자신의 얘기를 꼭 써달라고…." 마치 낡은 무전기를 통해 간절한 요청을 보낸 과거의 누군가와 교감하는 드라마 <시그널>처럼.

최산은 정치학자 최태욱 교수의 소설가 데뷔 필명이다. 학자로서 진보적 자유주의를 위한 정치제도에 천착해온 이 늦깎이 소설가의 이력을 겹쳐보면, 진옥출과 교감한 그의 타임슬립이 얼추 이해된다. 1980년대에 대학시절을 경험한 작가에게 1930~40년대에 20대 격랑을 겪은 진옥출의 사연은 기시감이 느껴졌으리라.

일제강점 터널을 빠져나온 지 40년이 흘러도 독재 정치가 계속됐다. 진보주의도 자유주의도, 보수우파가 점령한 제도정치에 진입경로가 틀어 막혔다. 좌파 내에선 급진과 온건, NL과 PD의 다양한 분파들이 격렬하게 부딪혔다. 그러던 열혈 청년들 대부분은 시간이 흘러 얌전한 소시민으로 돌아갔다. 각자의 이상을 좇던 이들도 대개는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방향을 틀었다.

소설 속 진옥출이 해방을 전후해 우익분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온건개혁론자들과 벌인 다양한 사상적 대립과 그들의 뒷모습은 1980년대 지식인들을 무척 닮았다. 해방 공간에서 좌우 합작 민주공화국 건립을 향한 몽양의 염원이 권력 쟁투에서 밀려났듯, 1987년 민주화의 짧은 영광을 밀어낸 정치의 실패도 반복된 패턴이다.

남쪽에선 여운형이, 북쪽에선 무정이 그렸던 세상의 좌절을 담아내며, 작가는 진옥출의 눈으로 끊임없이 '정치의 문제'를 되새김질한다. 여운형의 목소리를 빌어 다원적 민주국가를 향한 소명의식도 심어 놨다. "어느 정당이든 열심히 하면 한 만큼 자기네가 꿈꾸는 세상에 가까워질 수 있을 거야."

여운형이 이르지 못한 이상향을 진옥출의 생애로 압축한 이 소설은 해방정국에서 1980년대로, 또 40년이 지나 대선을 코앞에 둔 2021년 한국 정치에 던지는 작가의 비관적인 물음 같다. 계급과 진영으로 갈려 '같은 시간을 살아도 각자 다른 공간에서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정말로 저마다 꿈꾸는 세상에 가까워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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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구

2001년에 입사한 첫 직장 프레시안에 뼈를 묻는 중입니다. 국회와 청와대를 전전하며 정치팀을 주로 담당했습니다. 잠시 편집국장도 했습니다. 2015년 협동조합팀에서 일했고 현재 국제한반도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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