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스님, 이제 현대사 고통 내려놓고 편히 쉬세요

[특별 기고] '박헌영의 아들' 원경 스님 입적에 부쳐

원경. 그는 한국 현대사의 고통을 온몸으로 안고 살았던 비극의 인물입니다. 그는 남북한 모두에서 버림받은 독립운동가이자 조선공산당 제1의 리더였던 박헌영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해방정국과 한국전쟁 당시에는 살아남기 위해 한산스님의 손에 이끌려 어린 나이에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들과 생활해야 했고, 한국전쟁이 끝나가자 산에서 내려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돼야 했습니다. 이후 아버지의 삶, 특히 북한이 아버지를 미국의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킨 것을 알게 되자, "김일성의 목을 따겠다"고 해병대 특수부대를 자원해 들어가 지옥훈련에서 살아남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비관해 음독자살을 시도해 2주 만에 살아나는가 하면, 절에 귀의한 뒤에도 그는 호적과 주민등록이 없었기에 국토건설단에 끌려가 제주도 1100도로 건설공사에서 강제노역을 하고 색깔론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970년대 들어 간신히 법원을 통해 가호적을 획득했지만, 호사다마라고 소문을 듣고 온 정보기관에 납치되어 박헌영의 아들임을 실토해야 했고 이후 정보기관의 감시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 올 여름 제주도 답사 때 원경 스님. 스님은 이 사진을 영정 사진으로 쓰시겠다고 하셨다. ⓒ손호철

이후 스님은 박원순, 임헌영, 이호웅 등과 역사문제연구소 설립하여 한국현대사를 재조명하는 데 크게 기여하셨습니다. 특히 이를 인연으로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는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 와, 보수언론들이 박 전시장의 뒤에 박헌영의 아들이라는 빨갱이 세력이 숨어있다는 색깔론을 펴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박 전시장의 죽음에 매우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다행히, 스님은 불교계에서 나름 입지를 잘 하셨습니다. 일찍이 여주 황릉사 주지를 시작으로 주요 사찰인 여주 신륵사 주지를 하셨습니다. 이후 현재의 평택 만기사로 옮겨간 뒤에도 이를 중건하여 큰 절로 키우셨습니다. 이 같은 공을 인정받아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선출되셨고 가장 높은 품계인 대종사 법계 품서를 받으셨습니다. 입적 당시에는 조계종의 3인자라고 할 수 있는 원로회의 부의장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이념을 떠나, 원경스님은 우리 시대의 큰 어른으로 많은 사람들을 품고 안아줬습니다. 사실 웬만한 진보교수 치고, 진보인사 치고, 그의 밥이나 술을 얻어먹지 않은 사람은 없을 정도로 그는 많은 사람들을 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었습니다. 아니 스님은 이념을 떠나 많은 보수적 교수들과 사회적 인사들과도 교류하고 이들에게 베풀었습니다.

스님은 유독 사람, 특히 사람들과 저녁 식사하는 것을 좋아 하셨고 건장한 체격에 걸맞는 대식가였고 음식을 절대 남기지 않았습니다. "손석학(스님은 부족한 저를 항상 이렇게 불러 주셨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무도 없는 산골 암자에 버려져 며칠이고 한산스님을 기다리며 울던 것이 너무도 깊이 배여 해가 지기 시작하면 사람이 그리워서 사람들을 모아 저녁을 하고 싶어져요. 그리고 지리산에서 너무 못 먹은 한으로 제가 식탐이 좀 있습니다." 스님의 이 이야기를 들은 뒤, 스님이 식사를 하는 것만 보아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스님은 제대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와 선 이야기만이 아니라 우리의 숨겨진 역사, 나아가 음식, 민간요법으로부터 다양한 주제에 대한 '만물박사'였습니다. '띠링~'. 매일 아침 4시면 제 카카오톡에 메시지 수신음이 울립니다. 스님이 다양한 주제에 대해 매일 보내는 '산사의 편지'입니다(스님은 수십 년 째 눕지 않고 앉아서 주무시는데, 새벽 2시면 일어나 글을 써서 보내십니다). 제가 빨치산의 원래의 이름은 '야산대'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산사의 편지'를 통해서입니다. 스님은 이 편지들을 <산사의 편지>라는 책으로 만들었는데 그 분량이 800쪽이 넘는 책으로 6권입니다. 팔순이 넘은 나이에 매일 이 같은 글을 써서 2000여 명의 지인들에게 보내는 스님의 지식과 열정에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스님은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삶에 대해 "아버지의 운명에 의해 사는 것도 내 운명"이라고 담담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사실 스님의 삶은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이 목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스님은 전국 방방곡곡을 뒤지고 러시아로 달려가 부친에 대한 희귀한 자료들을 사모아 <이정 박헌영 전집>을 출간했고, 이후에도 아버지의 일제하 독립운동, 그리고 자신의 삶과 해방정국에 대한 만화를 출간했습니다. 만기사에 '이정 박헌영 해원탑'을 세웠고 박헌영이 김일성에 의해 총살당한 기일인 7월 19일이면 매년 전국에서 올라온 추모인사들과 함께 추모제를 열었습니다.

▲ 만기사에서 스님이 주제한 박헌영 추모제 ⓒ손호철

스님이 궁극적으로 바란 것은, 영화 <암살> 등을 통해 우리 사회에 뛰어난 독립투사로 복권된 김원봉처럼 아버지 박헌영도 최소한 역사적으로는 독립을 위해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투쟁했던 '독립투사'로, 실패했지만 평등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투쟁했던 '혁명가'로 복권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필자의 제안에 따라 스님이 필자와 함께 내년에 이정 박헌영의 발자취를 따라 독립운동을 했던 일본과 중국, 러시아를 돌 예정이었는데 너무 일찍 입적을 하신 것입니다. 또 극구 사양하시는 스님을 "역사의 증언으로 기구한 스님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저의 설득에 의해 자신의 삶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전국을 함께 돌며 증언을 남겨주시기로 했는데 너무 일찍 입적하신 것입니다.

"손석학, 저도 같이 갑시다." 제가 1년 전부터 한국근현대사기행을 하자, 스님은 앞장서서 답사에 동행했고 제가 모르고 있던 귀중한 역사적 사실들을 증언해주셨습니다. 빨치산 이야기를 쓰기 위해 지리산에 가자 "빨치산을 정확히 알려면 회문산과 담양 가마골을 가야 한다"며 회문산과 가마골로 우리를 이끌어주셨습니다. 4.3 답사를 위해 제주도를 간다고 하자, "내가 언제 다시 제주도를 가겠냐"며 앞장섰고, 자신이 지은 절과 국토건설단에 끌려가 1100도로 건설에 끌려갔던 이야기를 처음으로 털어놓으며 역사의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해주셨습니다.

"스님, 지난 번 뵌 장석 시인 시집 출판기념회를 통영에서 하는데, 겨울 바닷바람도 쐬고 장시인도 보러 같이 가시지요.", "아이고, 가고 싶은데 12월 13일 새 종정을 뽑는 선거가 있어서 가기 어렵겠네요. 장 시인에게 축하인사 잘 전해주세요." 입적 사흘 전 통화로, 스님과의 여행은 이렇게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 제주도에서 국토건설단에 끌려갔던 시절을 회고하는 원경스님 ⓒ손호철

스님은 어려서부터 주변의 어른들이 생존을 위해 배워야 한다며 무술을 가르쳤고 이후 절에서, 나아가 해병대 특수부대에서 단련을 받아 한국에서 내로라는 무술의 고수이고 너무 건강하셨습니다. 그리고 병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11월 들어 코로나19의 거리두기가 어느 정도 풀리고 방역이 위드 코로나로 변하자, 법정한도였던 10명을 모아 저녁을 내시며 늦게까지 자리를 같이 하셨습니다. 또 입적하시기 하루 전에도 전화를 하셔 12월 31일 법정한도인 6명이 저녁을 하자며 연락을 부탁할 정도로 건강하기만 하셨는데, 갑자기 입적하셨다니 어안이 벙벙합니다. 인간의 삶의 피할 수 없는 법칙이 생로병사라지만, 너무나 갑작스러운 입적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원수는 갚지 말고 은혜는 갚아라." 스님이 머물던 만기사에 들어가면 스님이 젊은 시절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품었던 복수심을 내려놓으시고 써 놓은 큰 글씨가 우리를 맞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그대로 남아있지만, 세상이 답답해 달려가면 언제나 따뜻한 차를 내주며 온화한 미소로 마음을 달래주시던 스님의 자리는 이제 비어있습니다. 스님 잘 가십시오. 그리고 다음 생애에는 평범한 필부로 태어나셔서 편안한 삶을 사십시오.

송기숙 선생님 추모사

어제 원경스님 외에도 또 한 명의 사표가 타계하셨습니다. 소설가인 송기숙 전남대 명예교수입니다.

유학에서 돌아와 처음 자리 잡은 곳이 전남대였고 이곳에서 만난 송 선생님은 나의 사표가 됐습니다. 선생님은 소설가, 교육자로 성공했으면서도 '실천적 지성'으로 5‧18 등으로 여러 번 감옥을 갔다 왔습니다. 선생님은 1988년 안종철 김철홍 등 광주 지역의 젊은 사회과학자들을 모아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를 만들어 선구적으로 5‧18 관련 자료를 모았습니다. 민주화 후 광주시에서 연구 등으로 재정적 보상을 해 주려 하자 "5‧18로 존경받았으면 됐지, 무슨 돈이냐"며 단칼에 거절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랜 투병에도 선생님이 소설로 쓴 암태도 소작쟁의의 투혼으로 일어나시길 빌었지만 결국 타계하셨습니다.

송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원경 스님 연대기

1941년 청주에서 도주 중이던 조선공산당지도자 박헌영과 정승연 사이에서 출생(박병삼)

1944년 외삼촌 정태석을 따라 상경해 외삼촌과 생활

1945년 큰 아버지 박지영 따라 명륜동에서 박헌영 상봉

1950년 장충동과 적산가옥 김삼룡집 옆 박지영과 기거

1950년 5월 살아남기 위해선 "속세를 떠나야 한다"는 먼 친척 한산스님의 손에 이끌려 화엄사에서 머리 깎음. 피아골을 넘어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만남

1950년 6월 한국전쟁 소식 듣고 한산스님과 과천으로 올라옴. 10월 유엔군의 인천상륙소식 듣고 다시 지리산행

1950~53년 이현상 등 빨치산들과 함께 생활

1953년 3월 한산스님과 하산. 김천 청암사, 해인사 등에서 불교 공부

1958년 한산스님 예산군 대련사에서 박헌영 사망 사실 알려주며 함께 제사. 속세로 내려와 전국 방황

1959년 11월 아버지 복수를 위해 남의 호적으로 해군 입대, UDT 지원해 죽음의 지옥훈련 후 백령도에 근무. 대리 입대가 발각되어 연평도 근무지 이탈

1960년 정월 인천 용화사에서 수계. 수계 후 전강 선사의 설득과 신고로 군복귀. 진해, 거제도, 태백산 등에서 특수 훈련 교관 근무

1963년 초 전역 수덕사에서 어머니 해후. 원주에서 음독 14일 원주도립병원서 깨어남

1968년 제주도에서 생활하며 황림사 재건. 주민등록이 없어 국토건설단 잡혀가 1100도로 건설 강제노동

1968년 한산스님 잠적

1972년 수원 지방 법원의 판결로 가호적(이름 남궁혁) 만듬.

1972년 10월 유신 후 보안사에 끌려가 처음으로 아버지 이야기 실토

1983년 안기부에 끌려가 아버지에 대하여 두번 째로 이야기 했다.

1985년 박원순, 임헌영, 이호웅, 김성동 등과 역사문제연구소 설립

1973년 여주 흥왕사 주지

1983년 안성 청룡사 주지

1987년 여주 신륵사 주지

1995년 평택 만기사 주지

2004년 세계에서 직접 모은 자료로 <이정 박헌영 전집>발간

2014년 조계종 원로의원 선출

2015년 조계종 대종사 법계 품서

2015년 박헌영의 독립운동을 그린 만화 <경성아리랑> 6권 발간

2021년 2월 만화 <무너진 하늘: 혁명과 박헌영과 나>3권 발간

2021년 12월 6일 입적

※ 이 연보는 필자가 여러 자료에서 찾아 작성한 것을 스님이 입적 일주일 전 교정 보완해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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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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