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1년 11월 28일 오늘 지도를 바꿀 대역사의 간척사업이 시작됐다.
30년 만에 방조제를 준공한 이후에도 새만금은 늘 '새로운' 발판을 위한 몸부림을 쉬지 않고 있는 '터'다.
군산~부안을 연결하는 세계 최장의 방조제(33.9㎞)를 축조, 간척토지(291㎢)와 호소(118㎢)를 조성 방조제 외부 고군산군도 3.3㎢와 신항만 4.9㎢ 등을 개발해 경제와 사업, 관광을 아우르면서 동북아 경제중심지로 비상할 '글로벌 명품 새만금'은 국책사업답게 역대 대통령들과도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과 악연을 되풀이해 왔다.
또 그 가운데 새만금을 두고 울고 웃을 수 밖에 없었던 우여곡절 이야기도 긴 방조제만큼이나 길다.
5명의 대통령과 새만금
최근 사망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민정당 후보 시절 새만금 사업을 선거공약으로 발표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1989년 새만금종합개발사업 기본계획을 내놓고, 1991년 11월 28일 새만금 현지에서 방조제 기공식에 직접 참석했다.
그는 기공식 연설에서 "새만금 개발을 공약했던 저는 우리가 자손만대에 물려줄 웅대한 국토확장의 첫 삽을 뜨며 깊은 감회를 느낀다"고 말했다.
또 그는 91년 2월 전북과 전남, 광주지역 순시에서 새만금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임을 밝힌 기록이 대통령기록관에 남아있기도 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들어서 새만금은 크게 주목도 받지 못했고, 정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당시 중국 상해 푸동지구의 경우에는 매립공사를 끝낸고, 고층빌딩과 공장이 들어서면서 새만금개발과 너무나도 다른 속도감을 보였다. 문민정부에선 예산 부족으로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95년 2월 18일 새만금 현장을 순시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새만금은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97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과 함께 새만금 개발에도 청사진이 들어오는 듯 했지만, 99년 당시 유종근 전북도지사가 새만금 환경문제와 관련해 민관공동조사를 수용하면서 2년 간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후인 2007년 4월 전북 새만금을 직접 찾아 회한에 젖기도 했다. 그는 당시 새만금방문을 통해 "가난에서 벗어나 부유한 전북을 만드는데 도민들의 염원이 담긴 새만금사업이 반드시 성공적으로 추진되길 바란다"라며 "새만금간척사업으로 생긴 토지는 농업 뿐만 아니라 산업과 관광 등 다양한 용도로 개발해 소외받던 전북은 물론, 국가 발전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그는 또 "91년 야당 총재인 시절,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협상을 통해 당초 예정에 없던 국가예산을 따내 새만금사업을 시작했다"라면서 "새만금현장을 둘러보니 감개무량하고 가슴이 벅찬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 때는 환경과 시민사회단체의 반발로 긴 소송전에 빠지기도 했다. 환경운동연합의 헌법소원으로 시작된 새만금 관련 소송은 2001년부터 2006년 3월 대법원 확정판결 때까지 5년간 이어졌다.
참여정부 말기인 2007년 12월 새만금특별법이 제정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새만금에 대한 관심은 그의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2003년 6월 5일 수석·보좌관 회의를 통해 새만금과 관련된 지시를 내린다. 우선 새만금신기획단 구성과 더불어 새만금사업을 담수호로 할 지, 아니면 해수유통으로 할 지 신속히 결정할 것을 주문한다.
여기서 그는 이같이 지시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새만금을 '동북아 경제중심지'로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농업위주의 새만금 용지가 산업중심으로의 전환이 가속화되고, 새만금 경제자유구역 지정과 새만금위원회 발족, 새만금종합실천계획안 최종 확정 등 개발속도에 가속도가 붙었다.
이처럼 새만금 사업은 노태우 전 대통령 때 착공해 이명박 대통령 때 완공한 셈이 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속도감 있는 개발추진 뒷편에선 이른바 새만금편지에 김완주 전 전북지사가 곤혹을 치른바도 있다. 당시 김완주 지사는 2009년 7월 '대통령님!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란 제목으로 이명박 대통령에게 A4용지 3장반 분량의 감사편지를 보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전북도민의 자존감을 무너뜨렸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