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문화전쟁'의 격전지가 된 미국의 학교

[백인 우월주의의 또다른 이름, 반 CRT ] 美 백인 학부모들의 분노는 공화당의 '꽃놀이패'? ①

이민자들이 만든 국가 미국에서 인종문제는 태생적 갈등이라고 할 수 있다. 1863년 노예해방, 1963년 민권법 제정 등을 통해 인종적 불평등이 형식적으로 해소된 듯 보이지만 2021년 현재에도 인종주의는 여전히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이다. 지난 19일 시위 현장에서 총기를 난사해 2명을 살해하고 1명을 중태에 빠뜨렸던 18세 백인 소년 카일 리튼하우스가 '무죄' 평결을 받은 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로 폭증한 아시안 혐오범죄 등이 그 방증들이다. 

백인 우월주의를 부추겨 집권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공화당)이 2020년 대선에서 패하고 조 바이든 행정부(민주당)가 들어서면서 '공화당 주(레드 스테이트)'들을 중심으로 확산된 '비판적 인종이론(Critical Race Theory) 교육 반대' 움직임도 미국에서 인종주의가 갖는 힘을 보여준다.

'CRT 교육 반대'는 트럼프가 장악한 공화당에서 민주당 세력을 상대로 벌이는 '문화 전쟁(Culture War)'에 속하는 이슈이기도 하다. 한국 박근혜 정부에서 추진했던 '국정 한국사 교과서' 사태를 연상시키는 2020년대 미국 내 역사 교육 논란의 정치사회적 함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어느 날 갑자기 정치적 격전장이 된 교육위원 선거

지난 11월 4일 치러진 오하이오주 교육위원회(School Board) 선거는 이제껏 보지 못한 치열한 경쟁 속에 치러졌다. 오하이오주 교육위원회 협의회에 따르면, 4년 전과 비교해 올해는 선거에 참여한 후보들의 숫자가 50% 넘게 증가했다. 예년과 달리 1351명이나 신규 후보자로 입후보하면서 1277명의 기존 교육위원들과 자리 경쟁을 벌였다.

교육위원은 전직 교육자나 학부모들이 정당과 무관하게 출마해 투표를 통해 당락을 가르는 자리다. 교육 예산, 교육감 고용 등 교육 관련 일들을 논의하는 역할로 정치적 권한을 행사한다기보다 지역에서 봉사하는 자리로 여겨졌다. 그러다보니 지역 유권자들의 관심이나 선거 후원금 등과는 거리가 먼 자리였다.

그런데 교육위원 선거가 갑자기 미국 정치에서 새로운 격전지가 됐다. 이는 이번 오하이오주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6월 버지니아주 라우던 카운티의 교육위원회 공청회에는 주민 200여명이 몰려와 방청을 하다가 서로 다른 입장의 학부모들 사이에 몸싸움이 발생해 2명이 체포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어 버지니아주 라우던 카운티와 페어팩스 카운티에서는 일부 학부모들이 보수 성향을 시민단체('파이트 포 스쿨스', '스탠드 업 버지니아')와 함께 민주당 성향의 교육위원들에 불만을 품고 주민소환투표 청원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흐름은 지난 2일 있었던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에까지 이어져 학교 교육에 불만을 제기하며 응집된 학부모들은 글렌 영킨 공화당 후보의 당선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지난 9일 열린 버지니아주 라우던 카운티 교육위원회 회의에 학부모들이 참여해 일부 교육위원들의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폭스뉴스 화면 갈무리

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된 것일까?

교육위원회에서 결정하는 이슈 중 학부모들을 분노하게 만든 이슈는 크게 두 가지다. 교내 마스크 착용 의무화와 '비판적 인종 이론(Critical Race Theory, 이하 CRT)' 교육이다. 하나는 보건, 다른 하나는 교육 내용에 대한 것이라 서로 별개의 이슈로 보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연결돼 있는 이슈다. 두 가지 모두 트럼프 지지 세력이 집중하는 이슈다. 그러나 마스크 착용 의무화와 CRT 교육 반대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마스크와 백신 접종 반대는 트럼프 지지자들 중에서도 '열성'만 공감하는 이슈다. 반면 CRT 반대는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는 일부 보수 내지는 중도 성향의 학부모들도 찬성하고 있다.

'경합주(swing state,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 성향이 혼재하는 지역)'로 분류되는 버지니아의 이번 선거 결과가 이를 잘 보여준다. 영킨은 '교육' 이슈에 집중하면서 교외 지역(Suburb)의 백인 중산층 유권자들의 '불만'과 '불안'을 자극했다. NBC 출구조사에 따르면,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영킨은 백인 여성 유권자들을 상대로 트럼프보다 20% 포인트 더 많이 득표했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이 용어를 아는 사람조차 드물었던 CRT는 이제 선거판을 흔드는 이슈 중 하나가 됐다. CRT는 무엇이며, 왜 백인 중산층 유권자들은 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비판적 인종 이론(CRT)'이란 무엇인가?

CRT는 1970-80년대에 데릭 벨 하버드 로스쿨 교수와 다른 법학자들에 의해 걔발된 이론이다. 이는 인종주의가 미국 법과 제도들에 내재되어 백인들의 지배력을 유지한다는 입장으로, 인종차별이 특정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유색인종에게 불평등한 제도화된 체계라는 주장이다.

이 용어를 처음으로 쓴 킴벌레 크렌쇼 전 컬럼비아 로스쿨 교수는 지난 3일 <가디언>와 인터뷰에서 "비판적 인종 이론은 인종이 만들어지고, 인종 불평등이 촉진되는 방식, 이런 불평등이 만들어진 우리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설명하고, 추적하고, 분석하려 하는 이론"이라면서 "우리가 인종적 불평등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아무런 노력 없이도 불평등이 재생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공립학교에서 CRT를 가르치나?

전미 교육위원회 협의회(National School Board Association)는 CRT를 미국 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 과정까지(K-12) 가르치지 않는다고 밝혔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CRT는 로스쿨 등 대학원 과정에서나 논의가 가능한 개념이다.

CRT는 트럼프 세력이 만들어낸 '공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공화당 정치인들과 일부 백인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CRT를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CRT가 흑인 아이들에게 피해의식을 내면화하고 백인 아이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준다고 주장한다. 버지니아주 라우던 카운티의 공화당 여성위원회 패티 히달고 맨더스는 3일 <가디언>과 인터뷰에서 "그들은 이를 평등, 다양성, 통합 교육이라고 부르지만 기본적으로 CRT다"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미국에 존재하는 인종적 불평등과 관련된 교육 전반을 CRT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얘기다.

안소현 케네소 주립대학교 교수(사회교육학)는 <프레시안>과 화상 인터뷰에서 "CRT 교육에 대한 반대 여론은 극우세력이 만들어낸 정치 기획"이라고 말했다. <뉴요커>는 지난 6월 극우성향의 프리랜서 언론인이자 활동가인 크리스 루포가 2020년 보수 성향의 맨해튼 연구소에 이 문제에 대한 글을 기고하고 소셜 미디어, 보수 언론 등을 활용해 여론을 확산시킨 과정에 대해 보도했다

루포는 업무 관련 교육에서 인종문제와 관련된 내용에 불만을 가진 보수 성향의 연방 공무원의 제보를 계기로 CRT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그가 지난해 9월 2일 보수매체 <폭스뉴스>의 <터커 칼슨 투나잇>에 출연한 일이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해 트럼프 정부 차원의 일이 됐다. 이 방송에서 루포는 "CRT가 연방정부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고 고발했고, 칼슨은 "이는 보수주의자들이 깨어날 필요가 있는 미국에 대한 실존적 위협이다. 대통령과 백악관은 연방정부에서 CRT 교육을 폐지하라는 행정명령을 즉각 내리는 것이 그들의 권한이다"라고 동조했다. 루포는 다음날 마크 매도우 당시 백악관 비서실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트럼프는 그해 9월 백악관 회의에서 "애국 교육(Patriotic education)"을 촉진하기 위한 '1776 위원회'(미국 건국 연도인 1776년을 강조)를 결성하겠다고 밝혔다. 루포는 '1776 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됐다.

2020년 미국을 흔든 BLM의 역풍

장성관 미주한인유권자연대(KAGC) 사무차장은 <프레시안>과 화상 인터뷰에서 "지난해 조지 플로이드 사망 이후 'BLM(Black Lives Matter, 흑인들의 생명도 소중하다)'에 대한 반발 차원에서 CRT 교육 금지 이슈가 확산됐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말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BLM 시위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됐다.

안소현 교수는 'CRT 교육 반대' 주장이 일부 백인 학부모들에게 공감을 얻게 된 이유에 대해 인종적 다수로서 백인 집단의 지위에 대한 '불안감'이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안 교수는 "트럼프 전 대통령까지 재선에 실패하자 존재의 위협을 느끼게 된 백인 보수세력에서 CRT를 화두로 삼고 집중적으로 여론화 시켰다"고 말했다. 지난 10일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폭스뉴스>는 지난 5월부터 8월까지 3개월 동안 무려 1900건이나 CRT와 관련된 보도를 쏟아냈다.

"CRT 반대, 인종적 자본주의와 과두정치의 변형"

필립 콥런드 보스턴대 교수(사회복지학)는 <프레시안>과 서면 인터뷰에서 CRT 교육 반대 운동에 대해 "인종적 자본주의와 인종 과두정치의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인종적 자본주의는 경제적, 사회적 이익을 위해 인종주의를 활용하는 것을 말하며, 인종적 과두정치는 이렇게 획득한 부와 위계적 인종 질서에 기반해 소수의 사람이 사회적 권력을 독점하고 행사하는 정치(과두제)를 말한다. 일부 백인 학부모들이 표출하고 있는 분노는 정치적,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이익을 위해 백인들의 반응을 조종하는 일부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생산되고 지원되고 있다. 버지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보았듯이 백인들의 분노와 공포는 미국에서 계급.계층을 유지하려는 정치와 정책에 대한 지지를 불러온다."

'교육 문제'라는 외피를 두른 정치적 기획인 'CRT 반대'는 현재 미국 사회의 인종적 위계와 이에 기반한 경제적, 사회적 특권을 유지하고 대물림 되기를 바라는 일부 백인 유권자들을 결집시키려는 목적으로 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필립 콥런드 보스턴대 교수 ⓒ보스턴대 홈페이지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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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프레시안 편집·발행인. 2001년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편집국장, 워싱턴 특파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아이들 파는 나라>, <아노크라시> 등 책을 썼습니다. 국제엠네스티 언론상(2017년), 인권보도상(2018년), 대통령표창(2018년)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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