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1 이리역 폭발사고] '재난의 길목'서 뼈저린 교훈 되새김질 오늘로 44돌

▲이리역 폭발사고 이미지 조합.ⓒ

우리는 겪었습니다

1977년 11월 11일 밤 9시 15분의 불행을 삼천초목도 울고 간

익산역 다이너마이트 폭발사고를

생과 사의 엇갈림 속에서 가냘픈 한 마리 사슴처럼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매었습니다

무어라 말 하랴,..이 비극...이 고독을...

다만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처럼

우리들을 인도하는 따뜻한 동포애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지난 사십 사년 전 이날 이 자리

쾅~하는 굉음소리에 세상은 암흑이었고

갈 곳 없이 헤매일 때 님들의 몸과 팔 다리

낙엽처럼 발 밑에 걷어 체이고

부모 형제 부르며 울부짖는 소리만

밤하늘에 메아리 되어 돌아올 뿐

잿더미 되어버린 그때 그 현실 앞에서

가신 님들의 영혼들을 기리기 위해

오늘 여기 이 자리에 모였으나

뚝뚝 떨어져 쌓이는 낙엽따라...

<이리역 폭발 희생자 추모탑에 새긴 '재난의 길목에서'>

44년 전 '재난의 길목에서' 그 기억을 다시 소환한다. 

오늘로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있은지 '불혹'을 넘어 4년이라는 시간이 또 흘렀다. 

'10월 10일'이 서해훼리호의 눈물이라면 '11월 11일'은 서로 마주보고 달리는 굉음의 철로, 익산의 아픔이 묻어져 있는 날이다.

머리 속에서 지워보려해도 지워지지 않는 그날. 

익산역, 아니 이리역 구내 입환(入換) 4번선 철로에 대전기관차사무소 소속 제1052 화물 열차가 멈춰 서 있다. 

영등포역에서 하룻밤을 대기한 뒤 10일 오전 9시 26분 다시 영등포를 출발해 이리역에 밤 11시 31분 도착해서 말이다. 목적지인 광주로 출발할 준비를 하면서 4번 입환 대기선에….

화약류의 직송원칙을 무시한 채 수송을 지연시켜 화차 배정을 받지 못해 1052 화물 열차는 그렇게 하루를 더 기다려야 했다.

그 기다림 속에는 다이너마이트 1139상자를 비롯해 초산 암모니아 200개, 초육폭약 100상자(2톤), 도화선 50개(1톤) 등 도합 30.28톤이 있었다.

한국화약공업주식회사(현재의 한화)의 호송원 신무일(당시 36) 씨는 급행료라는 명목의 말도 안되는 뇌물을 건네는 대신 술을 마시고 화차 속에서 양초에 불을 붙이고 잠드는 그야말로 정말이지 말도 안되는 행동 때문에 양초 불이 마분지를 타고 화약상자에 옮겨 붙으면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폭발'로 이어졌다.

'설마'하는 해이한 정신들이 똘똘 뭉쳐 만들어낸 두말할 나위 없는 '인재(人災)'의 표본이나 다름없었다.

도덕적 해이로 촉발된 그 폭발음이 귀청을 때린 직후 이리역 근방에는 피투성이의 환자들이 즐비한 것은 물론, 거리는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초대형 폭발음이 15초 간격으로 세 번이나 이어지며 이리역을 중심으로 반경 500m 이내의 가옥 등 건물들은 완전히 파괴됐다.

반경 1㎞ 내의 가옥은 반파, 반경 4㎞ 이내의 가옥은 창문이 떨어져 나갔다. 

반경 8㎞이내에는 유리창까지 파손되기까지 했다. 화약열차가 서 있던 4번선 일대는 지름 30m에 5층 건물 깊이로 패어 분화구를 연상케했다. 

폭발 12시간이 지난 후에도 열기와 연기를 내뿜고 있었고 종잇장처럼 찌그러진 열차와 휘어진 철로가 무참하게 나뒹굴었다. 

당시 처참한 모습에 대해 '위험관리 100호 특집 대한민국재난(大韓民國災難)47년'은 이렇게 묘사했다.

특히, 서민 주거 밀집지역인 창인동의 경우 거의 쑥대밭이 되었다. 판자집이 밀집해 있던 모현동의 경우도 60가구의 부락 하나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정도였다. 모든 피해는 당시 폭발 위력과 후폭풍에 의한 것이었다.

이리역 건물의 피해는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천정과 벽이 무너져 내렸는가하면, 객화차 사무소와 보선사무소는 기둥과 뼈대만 남고, 역사 구내에 있던 객화차 차량 117량이 파괴되거나 탈선해 넘어졌다.

선로는 휘어지고 모두 1650m가 파손됐다. 

당시 폭발력이 얼마나 위력이 강력했던지 현장에서 700m 떨어진 곳에까지 화차 상판이 날아갈 정도였다.

그야말로 당시로써는 사상 최대의 참사였던 이리역 폭발사고로 사망 59명에 140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재산피해액이 당시 금액으로 61억 원, 이재민 7500여 명, 건물피해 9539동에 달했다.사망자 중에는 주민들 이외에도 근무 중이던 철도 공무원 16명이 있었다. 

화약 열차에 불이 붙은 것을 발견한 검수원 7명이 불을 끄기 위해 화차로 달려가 모래와 물을 끼얹었지만, 폭발을 막지 못했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대피 명령을 내리는 등 제대로 된 대처를 하거나 최소한 위험을 주위에 알리는 것 조차 하지 않고 줄행랑을 쳤던 답이 없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내던진 숨은 의인들이 있었기에 지난 44년의 세월 속에 울분을 묻어낸다.

전쟁터를 방불케한 그 때의 교훈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폭발 현장 옆 극장에서 가수 하춘화 씨의 생명을 구한 고 이주일 씨의 유행어로 반성의 하루를 보내본다.

"늘 기억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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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홍

전북취재본부 김대홍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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