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세대라는 돌림노래를 멈춰라

[연속기고] 체제전환은 불가능한 공상이 아니다

'미래세대'는 현실에 대한 절망과 미래에 대한 기대, 희망이 섞여 만들어진 말이다. 불안정 노동과 부동산 불로소득 사회, 이미 현실이 된 기후재앙, 혐오와 차별이 그려낸 폭력적 일상이 빚어낸 대안의 부재가 '미래세대'라는 낱말을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세대'라는 낱말로 수행되는 정치는 당사자로 지칭되는 청년의 것이 아니다. 젊은 세대를 명분 삼아 현실변화의 설득력을 높이는 정치적 전략이다.

그러나 '미래세대'의 정치는 당사자 청년도,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품는 시민도 모두 배신했다. '미래세대'의 가장 큰 수혜자는 당사자 청년도, 현실의 변화를 바라는 시민도 아닌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정부와 자본이다. 탄소중립위원회가 겉으론 기후위기 당사자 청년을 위한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표방했지만, 실제론 이들을 들러리로 세우로 산업계의 이해관계를 민주주의라는 포장지로 감춘 것처럼 말이다.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에서 연설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

문제는 '미래세대'를 기만하는 배신행위가 아닌 '미래세대'라는 낱말 그 자체이다. 애초부터 청소년과 청년을 기후위기의 당사자가 아니라 '미래'의 주역으로 호명할 때, 지금 당장의 문제에 대해 발언할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정부가 청년을 '미래세대'로 호명하는 건, 지금의 사회적 주도권은 정부와 자본이 가져가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실제로 정부는 현실적 문제를 운운하며 기후위기 당사자들의 목소리 지우고 산업계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이렇듯 기후위기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미래의 몫으로 유예하는 '미래세대'의 기후정치는 당장 코앞으로 닥친 일상적 기후재난을 막아낼 수 없다. '미래세대'라는 시혜적 틀로 협소한 발언권을 부여하는 것에 만족할 게 아니라, 왜 기후위기 당사자가 '미래세대'라는 유예된 권리의 주체로서만 공론장에 서야 하는지 따져야 한다.

기후위기가 해결되지 않고 지속되어 온 것 역시 기후위기 당사자들의 권리를 유예하고, 기존의 기득권에게 사회적 주도권을 몰아주었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당사자들의 권리를 유예할수록, 기후정의도 유예된다. '미래세대'는 기후위기 당사자들의 권리를 미래로 유예하는 자기모순적 정체성이고, 이는 적극 활용할 틀이 아닌, 거부해야 할 억압에 불과하다.

청년에게 '미래세대'라는 제한된 자격을 부여한 것은 자본주의 민주주의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평등을 조율하지 않고, 오히려 자본주의 내 불평등을 합리적 질서로 속여 왔다. 이는 불평등의 당사자에게 제한된 발언권을 부여함으로서 가능했다. '취약계층'이나 노동자가 아닌 '근로자', 청년이 아닌 '미래세대', '학생', '정상인'과 '비정상인' 등 불평등의 당사자들은 제한된 권리를 부여받은 채로만 공론장에 설 수 있었다. '미래세대'의 문법 역시 청년을 기후위기 당사자가 아닌 미래의 주역이라는 모호하고 불투명한 권리를 부여하며 공론장에서 쫓아낸다.

탄소중립 없는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발표한 탄소중립위원회를 통해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통한 기후위기 대응의 실험은 끝난 게 드러났다. 오늘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가 야기한 탄소자본주의를 멈추는 변수를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자본주의의 현실논리를 강화하는 거수기로 전락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답은 체제전환이다. 탄중위를 통해 당사자의 자격을 박탈하는 시혜적 공론장으로서는 기후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자본주의를 통한 기후정의 실현의 가능성은 사라졌고, 이제 기후정의의 실현 가능성은 자본주의 바깥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체제전환은 불가능한 공상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를 통해 기후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공상이다.

체제전환을 통한 탈탄소 사회는 작금의 수치와 통계로 설명되는 탈탄소와 정반대일 것이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수치와 통계,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기업들의 약속에 미래를 맡기는 것이 아닌, 공공재에 대한 공적 소유를 바탕으로 한 산업의 통제로 실질적인 탈탄소를 실현해야 한다. 독점 자본의 이윤에 저당 잡힌 지구와 삶의 터전을 모두의 것으로 되돌리는 것만이 탈탄소와 기후정의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대가 아닌 체제를 전환하라, 이것이 체제전환을 위한 청년시국회의의 슬로건이다. 세대가 바뀐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기성세대가 되어도 기후위기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다시금 '미래세대'에게 안전한 지구를 물려주자고 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게 모두의 권리를 유예하며 오늘의 현실까지 오게 된 것은 아닌가? 실은 '미래세대'는 비단 당사자 청년들의 권리만 유예하지 않는다. 기후정의를 유예한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권리를 유예한다는 것과 다름없다. 이제 서로에게 이름표를 지어주는 공허한 정치는 중단하고, 자본주의의 들러리로 서 있던 유예되고 소외된 이들의 반란으로 체제전환의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

<탄중위해체공대위 연속 기고>

1. 우리는 왜 '탄소중립위 해체'를 외치는가?

2. 이제는 '탄소중립'을 넘어서야 한다

3. "문재인 정부에는 정의로운 전환이 없다"

4. 에너지 공영화가 답이다

5. 농업 대책 빠진 그린뉴딜은 회색뉴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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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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