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이중플레이 이란·이라크 전쟁, 사담 후세인을 키워내다

[전쟁국가 미국] 이란·이라크전쟁(1980-88)

1차 아프간전쟁(1979-89)이 계속되는 동안, 서쪽 이웃에서는 이란과 이라크가 8년간 전쟁을 벌였다. 1980년 9월 22일 이라크의 선공으로 시작된 이란·이라크전쟁은 1988년 7월 18일 이란의 호메이니가 강화협상을 요청하면서 이라크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 승리로 아랍의 군사적 맹주로 떠오른 이라크의 후세인은 2년 후인 1990년 8월 2일 쿠웨이트를 침공, 점령했다.

이에 대해 미국 등 34개국 다국적군은 1991년 1월 17일부터 대규모 공습에 이어 2월 24일 지상전을 시작해 2월 28일 이라크군을 쿠웨이트에서 몰아냈다. 1차 걸프전쟁(이라크전쟁)이다. 이후 미국은 이라크 북부와 남부에 대한 비행금지구역 설정 및 경제제재 등을 통해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군사, 경제적으로 압박했다.

한편 1차 아프간전쟁에서 양성된 이슬람 무장세력은 1990년대 초부터 미국에 대한 일련의 테러를 감행했고, 2001년 9.11테러로 미국과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이에 대해 부시 행정부는 '세계적 테러와의 전쟁(GWOT)'를 선포하고 2001년 10월에는 아프간, 2003년 3월에는 이라크를 침공해 각각 탈레반 정권과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렸다. 전자가 2차 아프간전쟁, 후자가 2차 걸프전쟁(이라크전쟁)이다.

이렇게 봤을 때, 이란·이라크전쟁은 1차 아프간전쟁과 함께 미국이 대중동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지게 되는 결정적 시발점이었다. 이란이라크전쟁은 규모, 기간, 파괴력의 측면에서 당시까지 중동지역에서 일어난 최대 전쟁이었다. 1967년 6일 전쟁과 1973년 10월 전쟁 등 아랍·이스라엘 간 전쟁을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참혹했다. 사망자만 40만에서 최대 100만으로 추정된다. 아랍 대 페르시아, 수니파 대 시아파 등 화해할 수 없는 숙적 간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미국이 이라크와 이란, 두 전쟁 당사자들을 모두 지원하면서 전쟁의 판을 키웠다는 점이다. 전쟁 발발 당시 카터 행정부는 '엄정 중립'을 선언했으나 1981년 1월 레이건 취임 이후 공식적으로는 이라크를 지원했지만, 백악관과 CIA는 은밀하게 이란을 지원했다. 미국 정부가 이처럼 모순적인 행태를 보인 이유는 에너지자원의 보고인 중동지역의 패권을 미국 아닌 다른 국가가 차지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절대적 과제 때문이었다. 물론 이 어려운 과제는 실패했다. 이라크가 승자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1차 이라크전쟁으로 이어졌고, 이후 미국은 군사력에 의한 지역패권 확보를 추구하며 대중동전쟁을 이어간다.

후세인의 오판, 호메이니의 반격

당초 후세인의 목표는 단기간의 제한전쟁이었다. 이라크의 유일한 해양 진출로이자 이란과 분쟁 중인 샤트알아랍 수로를 확보하고, 호메이니의 콧대를 꺾어버림으로써 이슬람혁명의 열기를 잠재우는 선에서 전쟁을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호메이니는 후세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고 전쟁은 장기화됐다.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한 1981년 1월 20일, 테헤란 미 대사관의 미국인 인질을 석방함으로써 미국과의 갈등을 해소한 이란은 이후 맹렬한 반격에 나섰다. 전쟁 초기 한 달여 만에 이란 영내 65킬로미터까지 진격했던 이라크군은 1981년 9월부터 후퇴하기 시작했고, 1982년 5월에는 자국 국경 내로 퇴각했다. 후세인은 일방적 휴전을 선언했지만 별무소득이었다. 이때부터 이라크 후세인 정권의 유지가 미 중동정책의 최우선 목표가 된다. 만일 이란이 승리한다면 호메이니의 이슬람혁명이 중동 전역으로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래 이라크는 1958년 왕정을 무너뜨린 군사혁명 이후 미국이 중동지역에서 가장 적대시하던 국가였다. 이라크의 좌파 성향 바트당 정권이 1972년 석유산업을 국유화한 데 이어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과의 바터무역(물물교환)을 성사시켰기 때문이다. 이라크가 원유를 제공하는 대신 소련은 무기와 생필품을 제공하고 석유 개발을 도왔다. 1951년 이란 모사데크 정권의 석유산업 국유화가 실패한 이유는 국제 석유카르텔의 방해로 원유를 해외시장에 팔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이라크는 공산권에 판로를 개척함으로써 국유화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과 협력함으로써 이라크는 미국의 경계 대상 1호가 된다.

실제로 이란혁명 직후인 1979년 6월, 당시 카터 행정부에서 국방부 지역방위 담당 부차관보를 맡았던 폴 월포위츠는 '페르샤만 비상사태 계획(Limited Contingency Study)'이란 보고서를 통해 "페르샤만 석유에 대한 의존 때문에 미국은 이 지역에 핵심적이며 점증하는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 이 지역에 대한 위협은 첫째 소련, 둘째 이라크이지만 이라크의 군사적 위협이 더 현실적이라고 진단하고, 미국은 이라크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중동 지역에 대한 군사적 대응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라크 후세인 정권은 이미 1979년부터 미국의 주적이었던 셈이다.

▲2011년 미 캘리포니아주 시리밸리의 레이건대통령 도서관에서 열린 레이건 전 미 대통령 탄생 100주년 축하행사. AFP연합뉴스

미국의 이라크 지원(Tilt to Iraq)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란의 이슬람혁명 수출을 저지하기 위해 이라크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미국과 이라크는 1967년 6일 전쟁 이후 국교가 단절된 상태였다. 결국 1982년 2월 미 국무부가 이라크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해제하고, 1982년 7월 CIA가 이라크에 이란의 군사정보를 전달하는 등 양국은 관계 정상화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특히 1983년 12월 20일 전 국방장관 럼스펠드가 레이건 대통령의 개인특사 자격으로 바그다드를 방문하면서 미국-이라크 관계는 동맹 수준으로 격상된다.

당시 럼스펠드는 후세인을 직접 만나 "이라크의 역할을 약화시키거나 이란의 야망과 이익을 증진시키는 행위"는 워싱턴의 지지를 받지 못할 것이며 미국은 "다른 나라들이 이란에 무기를 팔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실제로 미 국무부는 1983년 봄부터 이란에 대한 무기 판매를 금지하는 캠페인을(Operation Staunch) 벌이고 있었다. 반면 미국은 이라크가 프랑스, 소련으로부터 전투기, 미사일을 구입하는 것을 묵인했다. 또한 50억 달러의 신용을 공여해 이라크가 미국으로부터 농산물 등을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1984년 11월 두 나라는 외교 관계를 복원했다.

레이건 행정부의 이중플레이

레이건 행정부는 출범 6개월만인 1981년 7월, 비밀리에 이란에 대한 무기 수출을 승인한다. 1979년 11월 테헤란 미 대사관 인질 사태 직후 카터 대통령이 단행한 대이란 무기 수출 금지를 풀어버린 것이다. 당시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미국산 무기와 부품을 조달하고 있었다. 이란은 팔레비 국왕 시절 대거 구입한 미국산 무기를 운용하기 위해 미국산 부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미국의 금수조치로 이스라엘 외에는 이를 확보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이 이란을 도운 것은 이라크가 이스라엘의 주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라크는 팔레스타인 독립을 가장 열렬하게 지지해온 아랍권의 대표적 국가였다. 1980년대 초 이스라엘의 대이란 무기 판매는 연간 20억 달러 수준이었다고 한다.

1980년대 전반까지 레이건 행정부의 대이란 정책은 이스라엘의 대이란 무기 판매를 묵인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1985년 6월 백악관 안보회의(NSC)가 이란을 지원해야 한다는 새로운 제안을 하면서 레이건 행정부는 이라크파와 이란파로 갈리게 된다. 당시 맥팔레인 안보보좌관은 이란이라크전쟁과 경제난 등의 여파로 이란 내 온건파의 집권 가능성이 열렸으며, 현 상태를 방치할 경우 이란이 소련 품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하면서, 이란에 대한 선별적 무기 지원 등을 통해 관계 정상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란 내에 호메이니 정권을 축출할 수 있을 정도의 온건파 정치세력이 있다거나, 강경 반공주의를 표방하는 이란 이슬람 정권이 소련 품에 들어간다는 주장은 사실상 현실성이 전혀 없는 환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윌리엄 케이시 CIA 국장을 비롯한 열렬한 반공주의자들, 이스라엘의 안보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월포위츠 등 네오콘들은 이러한 현실인식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소련이나 이슬람주의의 실상을 무시한 채 중동지역을 미국의 의지에 따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실제로 맥팔레인은 안보보좌관 퇴임 이후 1986년 5월 테헤란을 비밀리에 방문해 관계 정상화를 논의했으나 실패했다. 또한 NSC 요원이자 이란-콘트라 사건의 주역인 올리버 노스 중령은 1986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이란 내 온건파 수장으로 지목된 라프산자니 국회의장의 측근을 서독에서 여러 차례 만나 후세인 제거 및 우호적 이라크 정부 수립 방안 등을 논의했다.

현실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강경파들의 이러한 노력은 당시에는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러한 종류의 실책은 9.11 이후에 현실화된다. 이라크와 이란 등 대중동지역 전체를 민주화 시킬 수 있다는 거대한 착각에서 감행된 2차 아프간전쟁과 2차 이라크전쟁이 그것이다.

반면 미 국방부와 국무부는 백악관 NSC와 CIA의 이란 경사를 강력 반대했다. 예컨대 와인버거 국방장관은 대이란 관계정상화를 제안한 맥팔레인의 정책보고서에 "이 제안은 논평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불합리하다. 카다피를 워싱턴으로 불러 정담을 나누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적었고, 슐츠 국무장관은 이미 1984년 1월 이란이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랐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테러지원국에 대한 미국 무기 판매는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이후 레바논의 친이란 무장조직 헤즈볼라는 CIA 베이루트 지국장 윌리엄 버클리를 납치, 살해하는 등 7명의 미국인을 납치하는 보복 행동에 나섰다. 이 때문에 이란이 테러지원국에 지정된 것이다. 이후 레이건 행정부는 인질 석방을 이유로 이란과의 비밀 협상 및 무기 지원을 이어갔다.

이처럼 1980년대 미국의 대중동정책은 위선과 기만, 모순과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라크와 이란을 동시에 지원한 것, 우방국의 대이란 무기 판매는 금지하면서 자신은 비밀리에 무기를 지원한 것, 백악관 NSC 및 CIA와 국방부 및 국무부가 서로 다른 정책을 추구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레이건 행정부의 이중플레이가 초래한 가장 직접적 결과는 중동지역이 첨예한 군사 대결의 현장이 됐다는 점이다. 이란, 이라크 모두 8년의 전쟁 끝에 강력한 군사강국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란-콘트라 사건

이러한 레이건 행정부의 이중플레이는 1986년 11월 레바논의 한 잡지가 이란-콘트라 사건을 폭로하면서 그 실상이 만천하에 공개됐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이란-콘트라 사건은 미국이 비밀리에 이란에 판매한 무기 대금을 니카라과의 반정부 게릴라 콘트라에 지원한 것이 골자다. 이것이 미국에서 문제가 된 것은 콘트라 반군 지원을 금지한 미 의회의 법(볼랜드 조항)을 행정부가 위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란-콘트라 사건은 후세인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동맹이라고 믿었던 미국에게 배신을 당했기 때문이다. 1986년 2월 이라크는 국경의 요충 도시 포(Faw)를 이란의 기습 공격으로 빼앗겨 큰 타격을 받았는데, 이란의 공격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미국이 이란에 이라크의 군사 정보를 속속들이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 이라크는 미국의 중재에 의한 전쟁 종결을 기대했으나 이는 헛된 꿈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결국 이라크는 1987년부터 총공세를 편 끝에 1988년 7월 자력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호메이니가 "독배를 마실 수밖에 없다"고 패배를 자인하면서 평화협상을 요청한 것이다.

이로써 이란·이라크전쟁은 8년 만에 끝났으나 미국은 새로운 과제에 직면해야 했다. 미국으로서는 이란과 이라크가 국력을 소모한 끝에 뚜렷한 승자 없이 전쟁을 끝내는 것이 최선의 시나리오였으나 이라크가 명백한 승자로 떠오르면서 지역 패권을 장악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1990-91년의 1차 걸프전쟁(이라크전쟁)은 바로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한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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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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