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황옥의 도래설화는 상상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금관가야 개국에 있어 당시의 정치·사회적 배경은 물론 국제적인 문화교류·전파·교역 등을 알 수 있 는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임나일본부설'에 의해 가야 건국을 비롯한 가야 초기의 역사에 대해 일부 부정하는 시각이 있어 이에 대한 보전과 활용이 다소 미진한 점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게다가 현재에서 다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또 시간이 흘러 유물과 유적이 모손되고 망실되어 없다고 해서 또 전체 중 부분의 오류가 있다고 해서 '삼국유사' 전체에 대한 부정은 이 또한 불합리와 모순이다.
따라서 기원 전후의 가야가 발전된 문명국가라고 해서 이상할 것이 전혀 없고 허황옥의 도래역시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27일 경남도의회 가야사 연구복원사업 추진 특별위원회에서는 '가야사 정립 학술토론회'를 이같이 가졌다.
이 자리에서 도명스님(가야불교연구소장, 경남 김해시 여여정사 주지)은 "일제 강점기 당시 고대 가야는 200여 년간 고대 야마토 왜의 식민지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이 대두되면서 제기된 '삼국사기' '삼국유사 초기기록 불신론'에 휩쓸려 가야 초기의 기록들과 함께 두 사람도 신화화 되며 부정 당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일본 관제 사학자들의 역사 왜곡의 영향은 해방 이후에도 우리 사학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특히 한일 고대사 부분 중 가야 건국을 비롯한 가야 초기 에 대한 시각은 '강단사학'과 '민족사학'이 서로 확연하게 달리하고 있다"고 했다.
도명스님은 "일제의 관제 사학자도 아닌 우리나라 학자들이 우리 뿌리인 선대의 조상을 근거 없는 상상과 추정으로 부정하고 우리의 선영들이 남긴 소중한 기록과 유적이 신중한 고찰 없이 폄하 당하는 현재의 상황이 심히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고 염려했다.
허황옥 신혼길의 최초 사료인 '삼국유사'와 가락국기'를 근간으로 도명스님은 이렇게 규명했다.
"기존의 신혼 길은 망산도·기출변·승점·능현·만전·주포·본궐의 일곱 개 지점을 특정했으나 유주지·별포진두·종궐을 더하여 열 개 지점을 비정했다"고 밝혔다.
또 "문헌인 '삼국유사' '가락국기'와 정합되는 망산도는 매립 전 진해 용원 지역에서 견마도라고 불리던 주포와 가덕도 사이의 섬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도명스님은 "세월의 흔적과 산업화 속에서 옛 망산도의 원형은 일부 훼손되었지만 다행히 그 나머지는 현재 남아 있고 신혼길의 나머지 지점들도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 있어서 지속적 탐구를 계속하면 새로운 발굴의 성과도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