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페이지 넘는 이 책, 일주일 내내 끼고 살았다"

[최재천의 책갈피] <추사 김정희 평전>, 최열 지음, 돌베개

최열 선생은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에 추사 김정희가 남긴 문자와 형상을 마주하고서 어떻게 이런 문자가 있을까 놀라워했고 이렇게 특별한 형상이 또 있을까 하며 감탄”했었다.

선생의 공부는 ‘사사무은(事師無隱)’에서 시작한다. ‘스승을 섬기는데 의문을 숨길 수 없다’라는 뜻이다. 이런 태도는 ‘치의자득(致疑自得)’을 하기 위한 전제인데, 이는 ‘의문을 품고 스스로 얻는다’라는 뜻이다. 치의자득이야말로 선생의 “학문의 방법론으로 황금 기준”이다.

그로부터 수십년이 흘렀다. 선생은 이제야 알게됐단다. “경탄은 추사의 문자와 형상 안에 숨겨진 ‘학예 혼융(學藝混融)의 경계’로부터 비롯한다는 사실을.”

나야 추사를 이해하기는커녕 읽어내기조차 어렵다. 가헌 최완수 선생님의 추사에 대한 해석과 평가 또한 더욱 그러하다. 하물며 선생의 이토록 종합적이고 방대한 해석과 기존 학설에 대한 의문과 비평을 제대로 읽어내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추사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기에 천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한주일 내내 끼고 살았다.

대학시절 가헌 선생님과 간송미술관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추사에 입문했다. 경주 최씨의 후손인지라 중국 양저우 시에 있는 최치원 기념관 일을 돕게 됐다. 2006년 어느날 양저우 시 당성 유적지에서 완원 선생 관련 비문을 읽게 됐다. 완원 선생의 고향인 의징이 양저우 시 관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당장 데려가 달라고 했다. 거절 당했다. 다음 방문 때는 미리 강력하게 요구했다.

어느 겨울비 내리던 날 옥수수밭 한가운데 방치되어 문화혁명 때 일로 폐허가 돼가는 완원 선생 묘소를 찾아 무릎을 꿇었다. 그때부터 서울을 방문하는 양저우 시 관료들에게 추사와 완원의 학연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설명했다. 결과로 양저우 시가 완원 선생 묘소를 정비하게 됐고 선생의 가묘(家廟)를 복원하게 됐다.

2014년에는 완원과 추사의 후손들이 200년만에 서울에서 만나는 행사를 주선했고 2016년에는 양저우에서 후손들이 만나는 행사를 개최한 적도 있다. 내 법무법인 사무실에는 추사의 ‘一爐香室(일로향실)’탁본이 걸려있고 회의실에는 ‘無量壽閣(무량수각)’판각이 자리한다.

종종 찾아뵙는 가헌 선생님에 대한 선생의 비판이 어색할 때도 있지만 학문의 세계야 이런 의심과 질정을 통해 진리로 나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추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모르겠다. 그저 존경스럽고 고맙다.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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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

예나 지금이나 독서인을 자처하는 전직 정치인, 현직 변호사(법무법인 헤리티지 대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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