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이 만드는 '청정 세상'?

[시민정치시평] 그린 자본주의의 어두운 단면

최근 국제사회의 지구온난화 대응 움직임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그간의 지지부진함을 한꺼번에 만회하려는 것일까?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은 올 초 취임하기가 무섭게 자국의 파리기후협약 복귀를 선언했고, 여러 선진국들은 코로나19로 경제가 침체된 와중에도 탄소세제 강화 등 탄소배출의 비용을 높이는 정책들을 앞 다퉈 발표하고 있다. 넷 제로(Net Zero), 탄소중립, RE100…. 표현은 다양하지만, 지향하는 바는 같다. 탄소배출을 줄이자! 과연 이번에는 지구온난화에 제동이 걸릴까?

자발성에서 강제로…'이번엔 다르다'!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많은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탄소배출량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왜 그럴까. 그것은 지금까지 탄소배출을 줄이자는 운동이 대체로 개인의 선의와 자발성에 기댔던 것과 무관치 않다. 탄소배출을 줄이려면 사람들로 하여금 생산과 작동 과정에서 탄소를 덜 내뿜는 친환경 제품을 구매하거나 아예 소비 자체를 줄이게끔 유도해야 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그것을 강제하기가 쉽지 않다. 친환경 제품은 생산에 비용이 더 들어 비싸고 사람마다 처한 사정도 다르니, 친환경 제품을 구매하라거나 소비를 줄이라는 주장은 누군가에겐 폭력이 되기도 한다.

요즘엔 상황이 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탄소 배출이 경제적 비용으로, 그리고 점차 더 비싸게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인식'만의 문제는 아니다. 여러 정부들이 거기에 실제로 가격을 부과하고 있고, 그 결과 기존의 반환경적으로 생산된 상품의 가격이 높아지고 있다. 이 추세대로 탄소 가격이 오르면 머지않아 반환경 상품이 친환경 상품보다 비싸질 수도 있다. 이 경우 지구를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가 없는 소비자도 친환경 제품을 선택할 것이다. 뿐만 아니다. 생산과정에서 어느 한도 이상의 탄소를 배출한 상품을 아예 수입하지 않겠다는 나라들, 그리고 그런 상품을 생산한 업체를 협력업체로 받지 않겠다는 글로벌 대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요컨대 보통의 소비자들도 친환경 제품을 소비하지 않을 수 없게끔 상황이 빠르게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직 우리는 결정적인 변화의 고비를 넘지는 못했고, 이런 변화는 한 나라나 몇몇 기업의 결정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오직 범지구적인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미국의 기후협약 복귀, 글로벌 규제체계 통일을 위한 북미와 서유럽 간의 논의 재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해사기구(IMO) 등을 통한 다자간 논의 등을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민간 차원의 움직임도 중요하다. 글로벌 비즈니스계와 정치계의 거물들은 매년 1월 스위스의 한 휴양지에 모여 세계의 문제점과 그 해법을 논한다. 이 다보스(Davos) 포럼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가 핵심 의제로 떠올랐다. 이는 주주 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기업이란 그 직접적 소유자인 주주뿐 아니라 기업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종업원, 소비자, 하청업체, 지역사회 등─속에서 그 존재의 의미를 획득한다는 생각이다. 이에 따르면 기업이 알량한 단기적 이익 때문에 생태적 균형 파괴를 자행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근 기업 경영에서 'ESG 이념'이 빠르게 퍼지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이제 기업은 이윤극대화를 위해서라도 환경(E)이나 사회적 가치(S), 민주적 거버넌스(G)를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요컨대 지금 변화의 추세는 다음과 같다. 이제까진 친환경적인 생산방식을 도입하는 기업이 칭송받았다면, 앞으론 그런 흐름에 동참하지 않는 기업이 멸시받게 된다. 멸시만 받는 게 아니다. 과거와 같이 탄소를 무분별하게 배출하는 기업들은 자금을 조달하는 단계에서부터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벌써부터 몇몇 글로벌 투자기관들은 저마다 'ESG 지수'라는 것을 만들어 기업들을 평가하고 있는데, 이 지수를 낮게 받는 기업은 자금조달 비용이 크게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자금을 마련해 생산을 해도 판로가 마땅치 않을 것이다. 완성품이라면 선진국 시장에 진입하는 것이, 원료나 반제품이라면 각 분야의 글로벌 대기업들에 납품하는 것이 이미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며, 이 불가능의 영역은 앞으로 계속 넓어질 것이다. 끝으로, 어찌어찌 판로를 개척해도, 시장에서 좋은 대접을 받길 기대해선 안 될 것이다. 소비자의 인식이 빠르게 바뀌고 있으니 말이다.

자본이 만드는 청정 세상

급진적인 환경론자들과 좌파들은 정부와 대기업 주도로는 진정한 변화를 이루지 못하리라 보는 경향이 있다.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까? 오히려 지금은 '진정한 변화'가 실현되는 것을 걱정할 때다. 그게 무슨 소린가? 위에서 열거한 다방면의 움직임들이 모여 실질적으로 탄소의 배출을 줄일 수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 왜 그것을 걱정해야 하나? 이유는 간단하다. 그 변화가 인민 대중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본의 힘에 의해서, 그리고 우리 국민의 의지를 어쨌든 반영하는 우리나라 정부가 아니라 소수의 강대국 정부들의 주도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자본의 논리를 따라서도 탄소배출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와 유사한 사례는 많다. 자본은 세상 만물을 상품으로 둔갑시키는 능력을 가졌다. 다만 이를 위해선 대중의 가치관이나 전반적인 심성에 변화가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현대인은 일상적으로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상품을 구매하는데, 사실 청결 유지가 중요한 가치로 자리잡은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관련 연구자들에 따르면, 오늘날 산업국 국민들이 흔히 하는 매일 샤워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1950-60년대의 '풍요로운 사회'에 와서야 확립되었는데, 이는 명백히 과학(보건의학)의 발달뿐 아니라 광고의 산물이기도 했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1840년대 잉글랜드에선 공중보건(public health) 운동가들이 주 1회 목욕을 주장한 기록도 있지만, 그 이후에도 한동안 목욕은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 심지어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이렇게 '자본의 시대'에는, 단기간에 대중의 가치관과 삶에 상전벽해와도 같은 변화가 일어난 사례는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목욕의 일상화와 일반화로 대중의 건강과 삶의 환경이 크게 개선되었을 것임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그것이 '자본의 논리'에 따라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목욕은 과도해지고 불평등해졌다. 과도해지니 새로운 건강상의 문제를 낳기도 하고, 불평등이 고착화되니 거꾸로 사람을 차별하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것이 자본의 모순이다. 언제나 자본의 발달은 진보와 퇴보를 동시에 내포한다.

왜 저들이 원하는가─국면전환의 기회

자본의 방식에서 핵심은 상품화다. 어떤 앞선 기업이 공중보건에 대한 대중의 인식 제고 분위기를 감지하고 비누나 샴푸를 새롭게 상품화해 시장에 내놓을 수 있다. 소비자가 여기 반응해 새로운 상품들이 시장에서 빈번히 거래되고 나아가 다른 기업들도 이 대열에 동참하면, 그 상품이 담고 있는 가치가 실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시장은 결코 수요자와 공급자가 만나 자유롭게 상호작용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방치될 수는 있다. 그러나 일단 자본이 뭔가를 상품화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자본은 뭐든 동원해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킨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게 국가다.

기후위기 대응과 관련해 상품화되는 것은 탄소 또는 탄소배출권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탄소배출을 문제라고 보지 않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탄소배출권을 자발적으로 돈 주고 살 사람은 많지도 않을 것이고 그 가격도 매우 낮을 것이다. 국가는 여기에 변화를 줄 수 있다. 강제로 가격을 설정하거나 세금을 매길 수 있고, 반대로 일정 조건을 만족하는 이들에겐 상금(보조금)을 지급하기도 한다. 나아가 다른 나라들과 공동으로 보조를 맞추기도 하는데, 만약 이런 협의가 몇몇 강대국들 사이에 이루어지면 그것은 지구 전체에 강제될 수 있다.

여기서 남는 의문이 하나 있다. 왜 자본이 그런 변화를 원하는가? 여태까지는 원하지 않았다. 탄소배출은 특정 산업분야나 특정 나라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 자체가 신진대사의 결과 탄소를 배출하기도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생활환경 전체가 거대한 탄소배출구다. 그러니 탄소배출에 (높은) 가격을 매기는 것은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상품들을 생산하는 자본에 엄청난 비용을 물릴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비용을 무시하기로 공모해 온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본의 태도가 바뀌고 있다. 이유를 꼽아보자. 첫째, 기후위기에 대한 대중의 우려가 계속해서 커지기 때문이다. 이들은 각국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국제기구 등을 통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자본도 이젠 그것을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둘째, 현재 자본에겐 '계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세계 자본주의는 2007-08년 글로벌 경제 공황 이후 침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 늪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비상하려면 새로운 동력이 필요하다. 기후위기가 날조된 거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진실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어쨌든 기후위기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는 지구상에 발을 디딘 이후 인류가 줄곧 유지해온 생각을 바꾼다는 뜻이다. 자본에게 이것은 새로운 돈벌이 영역의 출현을 의미한다. 단순히 하나의 분야가 나타난 게 아니다. 경제의 패러다임 전체를 바꾸는 문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고, 그래서 지금까지 자본은 기존 패러다임을 고수하려 해 왔다. 이제 자본은 상당한 자기파괴까지 수반하는 그 길을 가려고 한다. 어렵고 아프기도 하지만, 그 열매도 달콤할 것이다.

셋째, 어차피 중요한 건 (비용의) '크기'보단 '차이'이기 때문이다. 기후위기 대응이 경제 패러다임 전체를 바꾸는 일이고 너나할 것 없이 우리 모두가 얽혀있는 문제이므로, 탄소배출 비용의 인상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모두가 지불한다는 것은 아무도 지불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직 정도만이 문제인데, 사실은 자본에게 중요한 게 바로 그것이다. 어떤 비용인상 요인 때문에 모든 경쟁 자본이 100원씩 더 내는데 나만 50원 더 낸다면, 나는 50원의 경쟁우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누가 그런 우위를 확보하고 있는가? 일찌감치 친환경적인 생산공정과 생활양식을 함양하고 있는, 그리고 현재 기후위기 대응의 과정을 주도하고 있는 서구 대자본과 서구의 국민들이다. '녹색'으로의 자본주의 전환은 전후 황금기 이후 약화일로를 걷던 서구의 자본과 국민에겐 국면을 뒤집을 절호의 기회다.

우리의 대응─충분한가?

물론 '녹색'으로의 전환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세계 자본주의가 그러한 방향을 취하고 있으며, 이번에 코로나19라는 범지구적 재앙을 겪으며 전환의 발걸음이 한층 과감해진 것만은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미 우리 정부는 지난해 '한국판 뉴딜'을 발표함으로써, 이상과 같은 범지구적 움직임을 주도하겠다고 천명한 상태다. 그러나 이 뉴딜에서 현재 자본주의 변모의 의미가 충분하게 인식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현재의 뉴딜 계획은 '디지털'과 '그린'이라는 두 키워드를 중심으로 새로운 '먹거리'의 발굴, 즉 '사업'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시급한 것은 개별적인 사업꼭지를 발굴하는 게 아니라 우리 경제 전체의 체질을 바꾸는 일이다.

이를테면 그럴싸한 사업 아이템(전기차)을 가져오는 기업에 개별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것보다는 전기차가 다닐 수 있도록 도로나 충전소 등 인프라를 마련하는 데 우리 정부는 돈을 써야 한다. 그럼으로써 전기차와 전혀 무관해 보이는 기업이나 개인조차도 그런 환경에 적응하게끔 유도해야 한다. 무작정 폐기물 분리배출을 강제할 게 아니라 우리 시민들이 자신의 삶을 저탄소 방식으로 재편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데 돈을 써야 한다. 요컨대 지금 정부가 할 일은 우리 시민과 기업 모두를 '뉴딜'에 참여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치러야 할 비용은 앞으로 빠르게 증가할 것이고, 이는 그만큼 우리 국민이 가난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와 같은 방향으로 자본주의가 재편될 때, 지구 전체적으로 생산의 지리학에도 대변동이 야기될 것이다. 이를 이 자리에서 상세히 다룰 수는 없다. 다만, 그러한 변화가 우리와 같은 제조업 수출이 중요한 경제에 매우 좋지 않게 작용하리라는 것만큼은 언급해두려 한다. 보통 제조업은 탄소를 많이 배출한다. 어느 나라든 산업화 초기엔 제조업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선진국에서 제조업은 점차 후발국으로 밀려났는데, 그렇게 된 중요한 이유가 바로 높은 인건비와 더불어 환경 비용이었다. 하지만 이제 높은 환경기준이 글로벌 경제에 적용된다면, 제조업 생산기반을 굳이 후발국에 둘 필요가 없게 된다. 오히려 후발국의 신생 자본에게 선진국들이 매력적인 투자처가 될 수 있다.

숨 쉬기 좋은 지구? 누군가에겐 숨 쉬기 좋은 지옥!

탄소배출이 줄어서 지금보다 더 살기 좋아진 지구의 몇 가지 단면을 살펴보았다. 누가 주도하든 현재의 기후위기 대응 움직임이 결실을 맺어간다면, 어쨌든 우리는 더 나은 환경에서 더 편하게 숨 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서 발생하는 엄청난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세계의 어떤 국민은, 그리고 우리 중 누군가는 지금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해야 할 것이고, 더 지옥 같은 삶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혀 낯선 상황은 아니다. 나의 경험을 소개하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 친구의 부름으로 중앙아시아의 한 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해발 3천 미터 파미르고원에서 자연의 주기를 좇으며 유목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 그들과 어울리며 낮에는 꽃 보고 밤에는 별 보며 그야말로 꿈같이 열흘을 보냈다. 2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그때 생각이 종종 난다. 하지만 요즘 자꾸만 떠오르는 건 그런 달달함이 아니라 현지 공항에 내렸을 때 코끝을 찌르던 매캐함이다.

키르기스스탄 제2의 도시 오시에는 자동차가 많았다. 대부분 일본에서 건너온 중고차였다. 오래되기도 했고 주행거리도 30만 킬로미터를 훌쩍 넘기기가 일쑤인 고물차들. 매연도 매연이지만, 포장 안 된 흙바닥이 많아 차가 한번 지나가면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지?' 하지만 동시에 느껴지는 익숙함. '뭐지?'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것은 내가 어렸을 때 어딜 가든 볼 수 있던 풍경이었던 것이다. 불과 30여 년 만에, 대체 우리 삶의 환경은 얼마나 좋아진 것인가!

그런데 바로 그 해(2019년)에, 우리나라에서 11만 명이 산업재해를 입었고, 산재 사망자는 2020명에 달했다. 사고사망만인율(‱)은 노동자 1만 명당 사망자 수를 나타내는 지표다. 2019년 한국의 사고사망만인율(‱)은 0.46‱. 그러니까 10만 명당 4.6명이 일하다가 죽는다는 것인데, 이는 OECD에 속한 나라들 중 최고치에 해당한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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