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용대의 창립식에 참석한 궈모뤄
필자는 2018년 조선의용대 창립 장소를 찾기 위해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을 답사하였다. 우한은 중국인들에게 3대 화로로 알려져 있다. 무더운 여름 중국을 대표하는 더위의 종결자들인 충칭, 난징, 우한이 바로 그곳이다. 그래서 중국의 다른지역에서 더위를 함부로 이야기 하지 못한다.
몇 해 전 상영되었던 영화 <암살>의 주인공들은 의열단원들이며, 이들이 성장해서 조직한 군대가 바로 조선의용대이다. 1938년 7월 7일 김원봉은 중국군사위원회에 조선의용대의 조직을 정식으로 건의했다.
이 제안은 장개석의 재가를 거쳐 모든 항일세력의 연합을 전제로 하고, 무장부대를 규모상의 문제로 '군(軍)'보다는 '대(隊)'로 할 것과 조직될 무장부대를 군사위원회 정치부 관할에 둔다는 조건으로 승인됐다.
1938년 10월 2일 한국 및 중국 양측 대표들은 회의를 개최하여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지도위원회는 군의 명칭·조직 인선·편제·활동경비 등을 결정하였으며, 건립 후에는 의용대를 지도하는 기구로 작용했다. 지도위원회 위원으로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 측 인원 4명과 민족전선 산하 단체의 대표 김원봉·김성숙·김학무·류자명 등 4명이 선정됐다.
이러한 결과 민족전선은 1938년 10월 10일 한구(중화)기독교청년회관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울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다. 조선의용대는 1942년 한국광복군에 편입될 때까지 중국군 '6개 전구 남북 13개 성 전지'에 배속되어, 주로 일본군 포로 심문, 대일본군 반전선전, 대중국민 항전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조선의용대의 발대식은 1938년 10월 10일 중화민국 쌍십절(雙十節)에 거행됐다.
발대식에서 찍은 기념사진에는 'ㅈㅗㅅㅓㄴㅇㅣㅇㅛㅇㄷㅐ'라는 한글자모와 영문으로'KOREAN VOLUNTEERS(조선의용대)'라고 쓰여진 대기(隊旗)와 그 뒤에 서있는 대장 김원봉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속의 인물은 90명으로, 군복을 입은 대원이 74명이고, 양복 또는 중산복(中山服)을 입은 자가 14명이다. 긴치마를 입은 여성 2명이 눈에 띤다. 대원이었던 김학철(金學鐵)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이 사진은 1/4 정도가 잘려나간 까닭에 대원 30여 명의 모습이 누락되었다고 한다. 대장 김원봉을 중심으로 맨 앞줄 왼쪽에 이집중(李集中)‧윤세주‧김규광‧최창익 등 10명이 나란히 섰다.
발대식에는 조선의용대 결성에 직접 관여한 정치부 부장 천성(陳誠)과 비서장 허쭝한(賀衷寒)은 물론 정치부 부부장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정치부 제3청 청장 궈마뤄(郭沫若, 1892∼1978)도 발대식에 참석하여 연설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예속되어, 중국항일전쟁의 수요에 따라 활동했다. 대원들은 국민혁명군 복장을 차려입고, 왼쪽 앞가슴에 장방형 휘장을 부착하였다. 휘장 가운데에는 한글‧한문‧영문으로 '조선의용대'라고 씌어있었고, 휘장의 왼쪽에는 이름, 오른쪽에는 직함이 새겨져 있었다.
조선의용대가 창립된 지 3일 후인 10월 13일 저녁, 한커우(漢口, 해방 전 우창, 한커우, 한양이 해방 후 우한으로 합칭) 기독교청년회 강당에서 조선의용대 창설을 경축하기 위한 오락대회가 개최됐다. 700여 명의 관중이 참석했고, <민족해방가>, <자유의 빛>, <아리랑>을 비롯한 노래와 <쇠>, <두만강변> 등의 연극이 공연됐다.
한커우기독교청년회는(한커우YMCA)는 1912년에 결성되었고, 1920년대에 한커우의 삼교가에 있었다. 호북성 당안관의 '우한시 교회 개황'에 따르면 한커우에 위치한 기독교 청년회 중 남청년회가 여황피로(黎黃陂路)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1938년 우한시 지도와 우한시 기독교 청년회에서 편찬한 「1911-2011 YMCA 우한기독교 청년회 역사회고」를 보면 1938년 한커우기독교청년회의 위치는 지금의 여황피로와 중산대도 1090호가 교차하는 '적승명패세계(廸昇名牌世界)'라는 백화점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적승명패세계'라는 백화점 건물이 당시 조선의용대 성립식 축하 대회를 개최한 장소임을 입증해준다. 1938년 10월 14일 <신화일보>에는 조선의용대 성립 소식 및 김원봉의 연설과 유예대회에서 연출한 내용으로 지면을 장식했다.
곽말약과 <구망일보>(救亡日報)
중국의 검색 사이트 바이두(百度)에 궈모뤄의 이력에는 한국과의 인연이 없다. 몰라서 게재하지 않은 것인지 의도적으로 서술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엄연히 궈모뤄는 제국주의 일본에 대항했던 한국의 젊은 청년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 대표적인 역사적 사실이 바로 <구망일보>와 조선의용대의 관계이다.
1937년 8월 24일 상해에서 창간된 <구망일보>는 1931년 9월 18일, 이른바 '만주사변(9‧18)' 이후 중국이 일제의 침략을 받고 있는 당시 상황을 대변한 신문이다. 이 신문은 상해 구망협회의 기관지로서 발간되었으며, 궈모뤄가 사장, 편집장은 샤엔(夏衍)이었다.
상해 구망협회는 1937년 '7‧7사변'으로 인한 중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공산당과 국민당의 영향 하에서 조직된 통일적 군중단체이다. 이 단체는 군중 속에 침투하여 항일역량을 결집시키는 데 주력했다. 창간 당시 비용은 공산당과 국민당이 공동으로 부담했으며, 후에는 국민당 관련 인사들이 퇴출되면서 점차 공산당의 영향 하에서 발간됐다.
<구망일보>는 당시 각 정치세력의 항일에 대한 주장과 활동을 주로 내보냈으며, 투항과 분열 등에 대한 반대기사도 지속적으로 실었다. 발간 당시 1000명 정도의 독자가 있었는데 기사의 정확성과 내용이 풍부하기 때문에 독자들의 신망을 얻어 단기간에 3500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일제의 상해점령으로 1937년 11월 22일 제85호로 신문이 정간되는 비운을 겪었고, 다시 광저우에서 1938년 1월 1일 복간됐으며 그해 10월 21일 정간되는 등의 우여곡절 속에서도 논조의 일관성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조선의용대와 본격적인 연관을 맺기 시작한 꾸이린(桂林)으로 <구망일보>사가 이전하면서 1939년 1월 10일 복간되어 2년간 발행됐으며, 1941년 2월 28일 다시 정간되었다.
<구망일보>와 조선의용대의 유대관계
조선의용대와 <구망일보>가 공동 항일투쟁의 공통분모를 찾게 된 것은 <구망일보>사 사장 궈모뤄의 활동과 연관이 있다. 국공합작파인 궈모뤄는 조선의용대의 활약에 대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할 정도로 한국인의 항일투쟁을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궈모로는 일제가 우한을 점령할 때 조선의용대가 끝가지 저항하면서 대적(對敵)표어 및 구호를 거리 곳곳에 써놓았고 이에 대한 감동을 받은 것 같다.
1938년 10월 25일 우한이 함락되자 조선의용대는 대본부를 꾸이린으로 이전하였다. 총대장 김원봉을 비롯한 조선의용대원들은 동녕가 1호에 본부를 두었다. 이후 일제의 빈번한 공습으로 인해 동녕가에서 시가원으로 본부를 이전했다.
여기에서 조선의용대는 중국과의 공동항일과 관련한 문제를 토론하고 업무상 경험과 교훈을 서로 교환하여 업무수행상의 장단점을 서로 공유하기 위해 간행물을 출간해야 한다는 데 공통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꾸이린은 한중 양국의 공동항일투쟁을 논의할 만큼 문화도시이자 혁명의 도시이기도 했다. 柳子明(유자명)과 빠진(巴金)이 문화생활출판사를 중심으로 교류했으며, 중국 군사위원회가 이전한 곳으로 양국간 공동항일전선을 구축하는 데 내외적 조건이 부합되는 곳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궈모로 역시 이곳에서 <구망일보>를 속간하였다. 이 때 조선의용대는 <구망일보>의 판매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 조선의용대는 <구망일보>사 앞에서 "우리는 고향을 만리밖에 두고 부모처자들을 일본제국주의자들의 구두발 밑에서 구해내고자 중국항일전쟁에 참가한 조선의용대 전사들이다. 우리는 지금 국제의무신문판매대를 통해 민중들의 마음을 전달하는 <구망일보>를 판매하고 있다"라고 선전했다.
<구망일보>의 설립자 궈모로는 조선의용대의 활동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이는 조선의용대가 <구망일보>를 선전하고 판매하는 협력관계로 발전하는 힘이 됐다. 특히 조선의용대의 활동 가운데 하나인 대민활동에 <구망일보>는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한국독립운동의 현황과 식민지 조선의 실상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예컨대 연극 '조선의 딸'은 중국인들의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조선의용대의 활동이 결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닌 당시 반파시스트 투쟁 국가들의 공통사임을 환기시켰다. 한중 연합은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조선의용대가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오늘날에도 동북아의 역사전쟁은 진행형이다. 과거 자국의 선배들이 제국주의 일본에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공동으로 싸웠던 역사적 사실을 소환할 때이다. 그것이 미래의 동북화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