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서 찾은 새로운 길 : 밀리에듀, 밀리테크

[단번도약, 북조선] 이스라엘① 국방과 과학의 결합

1. 고난의 행군

지중해 같은 깊고 맑은 눈이었다. 에메랄드 빛깔 안구로 고요히 푸른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았다. 석 달째 새벽에 일어나 삼천 배를 올린다고 했다. 삼백일을 지속하고 귀국할 계획이라 한다. 돌아갈 나라가 이스라엘이었다. 유라시아 떠돌이 생활 2년차, 다람살라에서 붙박이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친구와 연을 맺었다. 살람이었는지 알롬이었는지, 이름은 가물가물하다. 다만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지금껏 또렷하게 남아있다.

어딜 가나 단골집을 만들어두는 편이다. 다람살라에서 지낸 일주일, 아침마다 글을 쓰기 위해 찾았던 카페가 하나 있었다. 커피의 향과 맛이 아주 훌륭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취향저격, 천장이 아주 높고 전망이 확 트인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그 친구와 사흘 연속 눈이 마주치면서 말까지 트게 되었던 것이다. 나의 얕은 상식을 죽비처럼 사정없이 깨뜨리는 파천황이 콸콸콸 쏟아져 나왔다.

탈피오트(Talpiot), 텔아비브(Tel Aviv), 테크니온(Technion), 3T 모두 당시로서는 처음 접하는 정보였다. 탈피오트에서 군복무를 했으며, 테크니온에서 의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텔아비브에서 생명공학 스타트업을 차릴 것이라고 했다. 학업에서 창업 사이 1년을 다람살라에서 안식년으로 보내고 있던 것이다. 0과 1로 작동하는 디지털 월드 WWW(world wide web)와 불일불이(不一不二)를 설파하는 삼라만상 사바세계가 어떻게 융합되고 합장할 수 있을지 흥미진진한 대화를 나누었다. 과학자이자 경영가이기도 했던 그는 아시아의 언어에도 능통했다. 나와 섞은 말은 영어였으되, 군대에서는 힌디어를 공부했고, 다람살라에서는 티베트어를 배우고 있었다. 유대인의 히브리어부터 인도인의 힌디어까지, 서아시아부터 남아시아까지 세계감각 또한 탁월했던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 대한 나의 선입견 또한 산산이 조각났다. 가장 종교적인 나라로만 알았는데 가장 과학적인 국가였으며, 가장 민족적인 나라인 줄 알았더니 가장 세계적인 국가였다.

오래 파편처럼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다. 무려 2000년이 넘도록 나라 없이 살아왔다. 겨우 허허벌판 황무지에 이스라엘을 세운 해가 1948년이다. 전 세계 디아스포라들이 중동의 모래 언덕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건국만으로 '고난의 행군'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당장 건국 첫날부터 전쟁이 시작되었다. 적국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란부터 이집트까지 사방팔방이 온통 적대국이었다. 게다가 모두 이스라엘보다 덩치가 훨씬 큰 나라들이었다. 이슬람 문명권, 아랍문자 세계의 동떨어진 섬으로 존재한 것이다. 이슬람 견문 6개월 차, 텔아비브 공항에 내리자마자 이질감이 훅 끼쳐왔다. 겨우 눈에 익었던 아랍어가 아니다. 문자도 다르고, 달력도 다르다. 서력 2016년은 이슬람력으로는 1437년, 유대력으로는 5776년이었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만큼이나 자력갱생, 주체노선을 고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집단농장 키부츠를 만들어 유격전과 진지전을 펼쳐갔다.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른바 '6일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비로소 온전한 나라로 바로 서는 듯 보였다. 그러나 6년 후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한다. 이른바 욤 키푸르 전쟁이다. 유대력의 제10월, 유대교의 5,734번째 속죄일에 맞추어 개시된 전쟁이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경건한 날을 겨냥하여 이집트가 공격하고 시리아가 뒤를 이었다. 요란한 비상 사이렌이 회당의 은은한 종소리를 잠식해버렸다. 철두철미 정밀하게 설계된 아랍연합군의 파상공세에 이스라엘은 속수무책 완패를 당한다. 6일 전쟁 승리 6년 만에 맛보는 참담한 역전패였다. 종교적인 모욕까지 감내한 치욕적이고 굴욕적인 패전이었다. 고난의 행군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건국 이후 장기 집권하던 노동당의 정통성마저 뿌리째 흔들렸다. 기어이 1977년 최초의 정권 교체까지 야기한다. 이스라엘에서 욤키푸르 쇼크는 미국의 스푸트니크 쇼크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새 정권은 200만 인구로 2억의 아랍에 맞대응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힘 대 힘, 강대 강 정면승부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싸움을 벌이기로 했다. 판세를 역전하는 전략이 아니라 새 판을 짜는 대전략을 취했다. 발상의 전환, 패러다임 시프트였다. 질적 경쟁력을 높이기로 했다. 하드파워가 아니라 소프트파워에 집중하기로 했다. 근력과 체력, 완력이 아니라 지력을 키우기로 했다. 연구와 교육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기술력에서 초격차를 벌이는 미래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온 나라 만백성을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중무장하기로 결정했다. 이스라엘 2.0이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환골탈태,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형질 전환하는 특이점이었다. 이스라엘 판 단번도약이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그 대전환의 상징이 바로 탈피오트였다. 10대 후반 최고의 두뇌를 선발하여 과학기술로 특화된 최첨단 정예사단을 창설키로 한 것이다. 탈피오트의 출범은 일파만파 연쇄효과를 일으켰다. 1924년 나라가 서기도 전에 아인슈타인의 도움을 받아 만들었던 하이파의 미래대학 테크니온도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혁신도시이자 기업도시인 텔아비브도 생기를 띄기 시작했다. 가장 창조적인 군대로 말미암아 대학과 도시까지 동반성장하는 이스라엘식 '선군' 산학복합체가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선군정치와 군산학 복합체가 융합되어 창조경제가 만발하였다.

▲이스라엘의 '선군 산학복합체 도시' 텔아비브. ⓒ이병한

2. 밀리에듀, 밀리테크

도처에서 랍비들을 목도할 수 있지 않을까 했다. 경건한 종교인보다 더 자주 눈에 띄는 사람들은 군인이었다. 예루살렘에서도 텔아비브에서도, 곳곳에서 군복 입은 젊은이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언제 어디서 로켓포가 날아들지 모르고, 어디서 언제 테러가 일어날지 모르는 항상적인 비상사태가 일상으로 정착한 나라다. 전 국민의 군인화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고등학교를 마치면 모두가 곧바로 입대한다. 남자 3년, 여자 2년을 의무 복무 기간으로 삼고 있다. 남다른 점은 군대와 대학 사이 갭이어(gap year)가 있다는 점이다. 의무는 아니지만 의례에 가깝다. 거의 모든 이들이 1년 6개월가량 해외여행을 떠난다.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 제3세계를 선호한다. 파타고니아부터 히말라야, 킬리만자로와 안데스 등 지구의 지붕을 죄다 올랐다가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동안 반드시 제2외국어도 배우도록 한다. 영어와 히브리어가 이스라엘의 공용어임을 감안한다면, 여행을 통해 최소 3개 국어를 구사하게 되는 것이다. 낯선 땅에서의 수많은 시행착오와 다양한 현지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넓고도 깊은 안목을 키운 후에야 비로소 학문의 전당, 지성의 요람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다.

며칠간 점만 찍고 부리나케 돌아오는 배낭여행이 아닌 고로, 응당 비용도 만만치 않기 마련이다. 13세 성년식에 부모와 친지로부터 유산 일부를 아낌없이 투자받는 전통이 오래 쌓여 왔다. 닫힌 공간 군대에서 익힌 규율과 열린 세계 여행에서 쌓은 자율이 결합되어 자유로운 영혼이면서도 성숙한 인격을 갖추고 대학생이 되는 것이다. 이들은 이미 무엇을 공부해서 어디에 활용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공부한다. 뚜렷한 목적과 원대한 이상을 품고 학업에 매진하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면적은 대한민국 4분의 1, 충청도 크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음을 알고 있는 늦깎이 대학생들의 포부는 비전과 영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견문을 먼저 넓힌 후에 깊은 학문의 세계로 들어가는지라 20대 초반 특유의 경직성과 도그마 같은 병폐도 드문 편이다. 실용적이고 실질적이고 실리적인 실학자로 단련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혁신적인 실험이 바로 '과학 군대' 탈피오트라고 하겠다. 욤키푸르 쇼크 이후 1979년에 도입된 특수부대다. 히브리어로 몇 가지 뜻이 있다. 가장 대중적으로는 '견고한 산성' 또는 '높은 포탑'을 의미한다. 구약 성경 가운데 <아가서>에서는 리더십을 뜻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쓰이기도 했다. 드높은 리더십을 지향하는 고로, 여느 전투 부대와는 모집 방식부터 전혀 달랐다. 고도의 학습 역량을 가장 중요한 준거로 삼았다. 교관들도 수학과 과학, 공학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박사와 교수들로 구성되었다. 과학적 역량을 군사적 역량으로 전환하는 연결고리로 탈피오트를 창립한 것이다. 군대 안의 대학이었고, 대학을 넘어서는 군대였다. 군사와 교육의 공진화, 밀리에듀의 첨병이었던 것이다. 복무 기간도 10년이나 된다. 고교 성적 최우수자들을 선발하여 다양한 시험을 거친 다음 히브리대학에 위탁하여 3년 만에 학사과정을 마치고 다음 6년을 더 복무하도록 설계했다. 이를 통하여 전 세계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든 압도적인 실력의 과학자 군인, 초엘리트 공학자 군인, 슈퍼 솔저들이 육성된 것이다. 두뇌로 전쟁하는 '브레인 아미'(Brain Army), 총칼을 든 전사(戰士)에서 지력과 지략으로 승부하는 사(士)의 본질을 회복한 셈이다. 손자병법, 사무라이를 사대부로 되돌렸다.

밀리에듀는 곧 밀레테크와 직결된다. 군대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곧바로 사회에 환원한다. 군에서 익힌 기술을 산업에 접목하여 전 세계를 무대로 천문학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수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낸다. 총탄을 대신하여 돈으로 승부하는 또 하나의 전장, 글로벌 시장에서도 탈피오트 출신이 최전선에 서는 것이다. 현재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아이언 돔'부터가 탈피오트 사관후보생의 아이디어로 출발하여 탈피오트 졸업생들이 완성한 것이다. 에어로 스페이스 인더스트리, 엘타, 라파엘 등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방위산업체들도 아이언 돔 프로젝트와 긴밀하다. 가상의 철갑 요새를 촘촘하게 구축하게 되면서 이스라엘인들은 아랍의 봄부터 IS의 등장까지 불안한 정세가 영 그치지 않는 중동의 한복판에서도 안심하고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예외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밀리테크의 상징 '탈피오트.' ⓒwikimedia

방어의 개념도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날아오는 로켓을 미리 감지하고 격추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디지털 공간에서 적대국 기간산업의 핵심 깊숙이 침투해 들어감으로써 사전에 공격 자체를 무력화한다. 압도적인 소프트파워의 힘으로 하드파워의 사용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다. 이 국방용 테크놀로지는 곧바로 산업기술로 이전되어 이스라엘 국내총생산(GDP)의 6%에 달하는 스타트업 비즈니스 생태계를 구축한다. 미사일 광학 유도장치가 캡슐형 내시경 진단 기구로 진화하고, 미사일 추적 기술이 자율주행의 알고리즘으로 변환되며, 정보망 침투 기술이 인터넷 방화벽 기업으로 전환되는 식이다. 이스라엘은 미국 다음으로 나스닥 상장사를 많이 보유한 나라로 명성이 자자하다. 그 창업자들의 8할이 바로 탈피오트 출신이다. 이쯤이면 선군정치에서 선군산업으로 이행하는 선봉부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끈끈한 전우애는 '탈피넷(net)'이라는 플랫폼을 통하여 평생을 지속한다. 매년 한 번씩 열리는 '탈피밋(meet)'은 미래산업을 선도하는 하이테크와 딥데크의 전시장이자 사교장이 되었다. 탈피오트가 촉발한 '선군' 산학복합체가 밀리에듀와 밀리테크의 선순환을 낳고, 이스라엘을 혁신국가 창업국가로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건국 직후 이스라엘의 급선무는 키부츠를 통해 척박한 모래땅에 생명이 피어나게 하는 일이었다. 건국 1세대 30년 동안 농업국가의 기틀을 다졌고, 건국 2세대 30년은 창업국가의 초석을 놓았다. 1970년대에는 물 산업에 주력했다. 연간 강수량이 400㎜에 불과한 사막국가가 역삼투압이라는 생화학적인 기술을 접목하여 바닷물을 담수화하는 혁신 산업을 일구었다. 1980년대는 원자력 에너지에 집중했다. 핵분열 시 튕겨져 나오는 중성자 수를 조절하여 분열 속도를 통제하면 발전소로도 활용이 가능했다. 1990년대는 역시나 인터넷 보안 기술이 요체였다. 세계 최초의 인터넷 방화벽 '체크포인트'를 탄생시켰고, 이를 토대로 세계 최초의 인공지능 자율주행 기술도 선보일 수 있었다. USB가 탄생한 곳도 이스라엘이고, 박테리아를 통해 친환경적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는 신기술을 가장 먼저 선보인 나라도 이스라엘이다. 국가 전체로 특허만 7000개에 달하니 전 세계에서 로열티로 거둬들이는 돈만 1조 원에 달한다.

건국 3세대, 다음 30년 이스라엘이 주목하는 영역은 우주산업과 생명산업이다. 사피엔스의 생활공간과 생산 공간이 지구 밖으로 팽창하는 우주시대가 개창하고 있다. 우주야말로 새로운 전장이고 미지의 시장이다. 이스라엘이 인공위성 오페크(Ofek, 지평선을 뜻하는 히브리어)를 처음 쏘아올린 해가 1988년이었다. 단 한차례의 실패 없이 단번에 위성을 우주에 업로드했다. 세계 8번째 인공위성 보유 국가로서, 지금까지 9대의 인공위성을 발사했다, 지금도 오페크 사단은 매일 지구를 6바퀴 돌며 세계 전역의 고해상도 사진을 촬영하여 군과 정보기관에 제공한다.

우주산업이 지구 밖으로 더 멀리 나아가는 비즈니스라면, 생명의 본질 깊숙이 파고들어가는 바이오산업 역시 프런티어 시장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독 장애인 올림픽에 열광한다. 사이보그와 강화인간, 트랜스휴머니즘의 최전선이기 때문이다. 참가 선수들의 각막부터 연골까지 인공장기와 인공장비를 일일이 열거하며 어느 대학, 어느 연구소, 어느 연구자가 개발했는지를 세세하게 설명한다. 스포츠 대회라기보다는 산업박람회에 가깝다. 인간과 기술의 융합으로 만들어가는 미래직업을 상상해보는 교육의 현장으로 삼는 것이다. 가령 미국의 의과대학은 이스라엘보다 30배나 크지만, 세계 8조 달러 시장의 의료보건산업에서 특허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대학은 이스라엘의 테크니온이다. 테크니온에도 의대와 약대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의사나 약사 자격증을 공부하지는 않는다. 오로지 의과학, 생명과학을 연구한다. 과학에 공학을 융합하면서 생명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8백만 이스라엘의 창업 숫자가 EU 전체 규모에 맞먹는 혁신의 근간이라고 하겠다.

▲세계 의료 특허의 중추인 이스라엘 테크니온 대학. ⓒ이병한

3.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

2019년 2월, 하노이로 달려갔다. 동아시아론에서 유라시아 문명사로 나의 인식이 넓어지고 깊어지는데 하노이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귀국은커녕 더 멀리까지 가보기로 작정하게 된 운명적 장소였다. 내 인생의 궤적을 통째로 바꾼 도시에서 북미관계의 새 국면이 열리고 우리 민족사의 새 지평이 솟아나는 줄 알았다. 그런 만큼이나 하노이 노딜 뉴스에 무릎이 꺾일 듯 황망하였다. 요란하게 흔들리는 마음은 곧장 몸의 반응으로 이어졌다. 2019년 삼일절, 3.1혁명 100돌을 골방에서 골골 감기로 앓았다. 아무런 성과 없이 빈손으로 평양으로 되돌아가는 대륙기차, 김정은과 김여정은 어떤 생각을 했을 것인가? 핵능력을 최대한 고도화하여 탑다운 담판으로 일거에 체제를 보장받으려 했던 지난 9년의 전략을 복기하고 곱씹었을 것이다. 장사꾼 양아치 대통령의 쇼맨십에 놀아난 꼴이니 치욕과 굴욕을 감내하며 정면 돌파, '새로운 길'을 모색했을 것이다. 때로는 외부 쇼크가 철저한 자기파괴와 자기혁신을 자극하기도 하는 법이다. 새로운 역사도 이제부터이다.

더는 핵을 이마에 지고 살아갈 까닭이 없다. 너 먼저 죽고 나도 죽자, 어차피 사용치도 못할 핵단추이다. 값비싼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 100만 대군을 거느릴 이유는 더더욱 없어진다. 군대가 커야할 까닭이 없다. 미래의 전쟁은 인해전술, 사람 머릿수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두뇌 싸움, 브레인의 퍼포먼스를 극대화하는 지식전쟁, 과학전쟁, 수학전쟁이 된다. 지피지기 백전불퇴(知彼知己 百戰不殆), 아는 것이 힘이니,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방법을 연마해야 한다. 21세기 전장의 최전선은 피 흘리는 필드가 아니라 연구실이고 사무실이다.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리는 키보드 워리어가 승패를 좌우한다. 미래 전쟁의 요체는 선제타격이 아니라 선제 무력화이다. 인공지능(AI)을 탑재한 드론이나 사이버 공격, 우주 전쟁 모두 전투 이전에 상대방의 지휘 체계를 무력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완력으로 싸우지 않고도 지력으로 이기는 전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첫째도 AI, 둘째도 AI, 셋째도 AI가 된다. 진실로 과학과 수학이 필요한 시간이 된 것이다. 늦게나마 평양에 '과학자 거리'를 조성한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강성대국의 기초는 소프트파워 기초학문이지, 허장성세 가득한 하드파워 군부가 아니다.

설사 육박전이 벌어진다고 해도 군인이 직접 투입되는 경우 또한 점점 드물어 질 것이다. 로봇이 사람을 대신한다. 이스라엘 방위군에서는 이미 적지 않은 로봇들이 국경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적진에 먼저 달려가는 선봉대도 로봇 군단이 될 것이다. 센서와 카메라를 장착한 무인 자율 전투차를 타고 적진 깊숙이 침투하여 전장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전술과 전략 또한 거듭 업데이트하게 될 것이다. 무기 체계의 무인화는 물론이요, 지휘 통제마저 인공지능형 체제로 진화해갈 것인 고로 가슴팍과 어깨에 훈장을 줄줄이 달고 있는 장성도 여럿 거느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북조선 역시도 탈피오트를 적극 참조하여 매년 30-40명의 정예과학자 부대를 양성하는 것이 장래의 국가 안보에도 훨씬 이로울 것임에 틀림없다. 비용은 대폭 줄고, 효용은 전폭 늘어나는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019년 2월 27일~28일 이틀간 열린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제2차 북미정상회담).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AP=연합

다시금 타고난 시운이 참으로 좋은 것 같다. 미국이 누리던 기술패권이 끝물에 도달했다. 이스라엘에서 탈피오트가 출범한 1979년부터 세계금융위기가 일어난 2008년까지, 혁신의 보루는 누가 뭐래도 실리콘밸리였다. 이스라엘과 미국의 특수 관계는 널리 알려진 바, 이스라엘이 창업국가와 혁신국가로 대전환하는 데에도 실리콘밸리와의 밀접한 관계가 큰 도움이 되었다. 헌데 2010년 이후로 전례 없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기술 분야에서 동방이 서방을 맹추격하고 있다. AI와 빅데이터, 생명공학, 우주과학 등에서는 역전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중국을 대상으로 무역전쟁을 발동한 근간에도 기술 대역전의 위기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왕의 육해공군 전력에서는 여전히 미국이 앞서가지만, 사이버전과 우주전에서만큼은 중국이 미국을 능가할 수도 있다.

알리바바는 아마존에 못지않으며, 화웨이는 5G 시장을 선도해간다. 변방으로 밀려났던 중의학으로 생리의학 노벨상을 받고, 유전자 편집에서도 발군의 원천 기술을 확보했다. 가상공간에서 축적되고 있는 빅데이터에서도, 생명의 근원인 딥데이터 DNA 연구에서도 독보적인 실력을 과시하고 있다. 달 탐사는 앞서가고 있고, 화성탐사는 뒤처지지 않고 있다. 1840년 아편전쟁 이래 동서양의 대분기를 야기했던 과학과 공학에서 대역전, 대반전의 기운이 넘실대고 있는 것이다. 고로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이 되는 2021년 현재, 중국을 이해하는 키워드는 단연 '테크노-차이나'이다.

2018년 바이두와 텐센트, 알리바바 등의 AI 투자액은 128억 달러에 달했다. 구글과 아마존, 애플과 페이스북의 투자 총액 17억 달러를 크게 초과하는 규모였다. AI 스타트업 투자에서 중국이 미국을 추월한 해가 2017년이다. 2017년 AI 스타트업에 투자된 전 세계의 152억 달러 가운데 중국은 48%, 미국은 38%를 차지했다. 그 후 추세의 역전이 일어나기는커녕, 격차가 더더욱 벌어지고 있다. 2015년 이래 중국의 AI 산업 투자 확대 규모는 연평균 70%를 오르내린다. 일로매진, 일취월장이다.

독자적인 GPS 서비스인 베이더우를 시작한 때가 2018년 12월 27일이다. 북두(北斗), 베이더우는 민간과 군사 영역에서 중국이 미국 GPS 의존을 벗어나기 위해 2000년부터 추진해온 독자적인 위성항법시스템이다. 베이더우 위치 확인 서비스는 전 세계적으로는 10m 이내, 동아시아에는 5m 이내일 만큼 획기적이다. 구글 어스나 카카오 맵의 성능을 가뿐히 능가한다. 정밀하게 측정되는 위치와 방향, 시간 정보는 통신과 교통, 물류를 대폭 개선할 수 있다. 더 중요하게는 전투기와 군함 운항 및 미사일 유도에서 관건적이다. 베이더우 GPS가 인민해방군의 전자전 대처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라고 평가받는 이유이다.

이처럼 테크노 차이나의 굴기가 약여한 시점에 김정은과 김여정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 30년 이스라엘과 실리콘밸리의 그 돈독한 관계만큼이나 앞으로 30년 북조선은 베이징의 창업특구 중관촌이나 혁신도시 선전(深圳) 등과 긴밀해야 할 것이다. 10년 안팎으로 세계 최대의 시장 또한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 될 것이다. 저무는 패권국 미국을 향하여 체제보장을 안달복달 구걸할 것도 구태여 없다. 인구로 보나 생산력이나 소비력으로 보나, 동북아만으로도 먹고 살 길이 활짝 열린다. 특히 IT와 DT, 우주산업, 생명공학 등 미래산업의 핵심 영역에서는 더더욱 중국, 한국, 일본, 러시아만으로도 미국과 EU에 못지않을 것이기 분명하다.

제4차 산업혁명의 약진과 함께 부상하고 있는 새로운 군산학 복합체, 밀리테크 4.0의 가장 큰 특징은 민군 겸용 기술이라는 점이다. 냉전기 밀리테크 3.0까지만 해도 군사기술 혁명이 민간으로 파급되는 데에는 일정한 시차가 걸렸다. 가령 애플 제국을 낳은 아이폰은 냉전기 밀리테크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정부의 군사기술 개발로 지원된 디자인과 공학 기술에 달통한 기업이 바로 애플이었다. 냉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군사기술을 민간으로 이전하여 시장과 결합했을 때 혁신적인 기업이 등장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늘 그래왔다고도 말할 수 있다. 군사적 혁신 기술이 인류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꿔왔다. 전자레인지도 인터넷도, 심지어 하이힐까지도 군사용으로 먼저 개발된 것이다. 레이더와 잠수함, 로켓, GPS도 마찬가지다. 라디오, 컴퓨터, 디지털카메라, 제트엔진, 초강력 접착제, 지프차, 캔, 페니실린, 손목시계, 야간 투시경, 앰뷸런스 등 그 사례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다만 탈피오트가 상징하는 것처럼 밀리테크 4.0에서는 민/군의 경계가 극적으로 허물어진다. 기초학문과 군대기술과 스타트업이 일심동체, 하이브리드가 된다. 진작부터 민군 통합의 성격이 강했던 중국이 앞으로의 기술경쟁에서 유리할 것이라고 전망하는 까닭이다.

3세대 지도자 집권 10년차이자, 주체 110년을 맞이하는 북조선 또한 민군의 융복합만큼은 중국에 못지않다. 밀리테크 4.0에 최적화된 나라이다. 국가적으로도 가장 비대한 조직인 군대를 미래 산업의 인큐베이터이자 테스트베드로 삼아야 한다. 독자적으로 개발했던 인공위성 기술은 우주산업의 기초가 되어줄 것이며, 핵무기 기술 또한 미래 에너지산업의 초석이 될 수 있다. 고로 원료를 추출하거나 수입해서 공장에서 가공한 후 세계 시장에 내다 파는 제조업국가, 무역국가의 발전모델을 답습할 필요가 전혀 없다. 곧장 지식을 산업화해야 한다. 당장 상상을 혁신의 원동력으로(imagination to innovation) 삼아야 한다. 곧바로 4차 산업으로 퀀텀점프해야 한다.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 다음 30년을 군대로부터 설계해야 한다.

다만 대약진 대도약에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필수적이다.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다.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는 든든한 뒷배가 버티어 서있어야 한다. 특공대 탈피오트가 창업국가 이스라엘로 가는 길목에 이 역할을 해주었던 조직이 바로 요즈마 펀드이다. 밀리에듀를 밀리테크로 진화시키는 촉매가 금융이었다. 원천기술이 스타트업으로 진화하고 스케일업으로 성장하는 데 벤처 캐피털의 공헌이 혁혁했던 것이다. 요즈마 그룹의 본사가 있는 텔아비브를 꼭 가보아야 하는 까닭이다. 서성거림 없이, 서슴없이, 성큼성큼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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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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