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해서 제 몸을 만지던 장면과 느낌만 강렬하게 떠올라요"

[이변의 예민한 상담소 2] 네 번째 이야기

전날 술을 마시던 시간까지, 상대방은 진로 상담을 자처하고 나선 팀장이었다. 기억에도 술자리는 비교적 유쾌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눈을 떠보니 낯선 모텔 방에 혼자 속옷 차림으로 잠들어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와 기억을 더듬어 봤다. 그랬더니, 누군가가 나를 부둥켜안고 있었고 그게 싫어서 뿌리치려고 몸부림 쳤던 장면과 느낌이 떠올랐다. 이게 술에 잔뜩 취한 상대방을 대상으로 한다는 성추행이거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원치 않는 간음을 당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에는 없는데, 어디에서 넘어졌는지 무릎에도 멍이 들어있었다. 젠장, 샤워를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어떻게 모텔 방까지 들어왔는지 알고 싶어 모텔에 CCTV를 보여달라고 했더니, 경찰에 신고해야 보여줄 수 있다며 보여주지 않았다. 범인은 십중팔구 전날 술자리를 함께 한 팀장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니…. 대신 모텔에서 숙박료를 결제했다는 카드 영수증을 받아왔다.

회사에 출근해 경비 처리 영수증을 확인해보니, 팀장의 카드가 맞았다. 팀장에게 사내 메신저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항의했다. 팀장은 뻔뻔하게도 '네가 술에 취해서 챙겨줬을 뿐'이라며 발뺌을 했다. 더 화가 났다. 고소하기로 결심했다.

직장 상사로부터 직장 밖에서 성범죄 피해를 입는 사건들 대부분에 술이 등장한다. 음주를 빙자한 성범죄 중 상당수는 피해자의 만취 상태를 악용한 사건들이 차지한다. 그런데 범죄 성립에 있어서의 피해자의 만취 상태란, 피해자 입장에서 기억이 나는지 여부에 따른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비롯하여 제3자가 봤을 때 인사불성인 수준을 말한다.

문제는 피해자가 만취인 경우 기억이 온전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DNA 검출이나 CCTV 영상 등 객관적 증거가 남아있다면 괜찮겠지만, 피해자가 피해 장면 일부만 기억하거나 그마저도 못 하는 사건에서는 피해자의 진술이 오해되거나 불충분하여 불이익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이 같은 사건사고는 1년 동안 칼럼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오늘 사례는 준강간 또는 준강제추행의 사례가 아니라, 만취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무고를 의심받게 되는 사례이다.

피해자가 인사불성이었다고 평가될 경우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은 당연하다. 온전하지 않은 전날의 기억 속에서 내가 잠에서 깨어나 혼자 눈뜬 상태가 안전하게 집에 돌아온 결과인지, 누군가로부터 성범죄 피해를 입은 사건 현장인지 혼자 힘으로 알 방법이 없다. 특히나 눈을 뜬 장소가 낯선 곳이거나 또는 집에서 정신을 차렸어도 전날 누군가 몸을 만지거나 어딘가로 데려가려 했던 기억은 불안하고 찝찝하다. 전날 술자리를 함께한 상대방과 연애 관계에 있거나 섹슈얼한 호감을 가진 경우 아니라면, 상대방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어 안전한 귀가의 결과라는 답을 들어도 불안하긴 매한가지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성관계의 흔적이 확인되거나 기억이 있는 경우는 낫다. 추행을 당한 것 같은데, 그 상황이 불완전한 기억의 편린 정도일 때 피해를 걱정하는 입장에서는 신고를 하기도 망설여지지만 신고를 하지 않는 것도 썩 내키지 않는다.

그렇게 신고나 고소가 된 사건 중 피해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문제는 피해라는 사실이 명확하게 확인되는 경우다. 특히 고소한 이의 기억과 실제 상황이 매우 다르다는 것이 객관적인 증거로 확인되는 상황에서 상대방이 악감정을 갖고 무고로 역고소를 하는 경우가 생기면, 난감해진다.

위 사례의 경우 사례자가 혼자 모텔 방에서 눈을 뜬 경우인데, 고소 후에 모텔 CCTV 확인한 결과 사례자가 팀장의 팔짱을 끼고 들어와 엘리베이터로 이동한 장면과 이후 팀장이 사례자와 모텔 복도를 따라 방으로 이동하여 다시 나왔는데 그 간격이 3분 이내의 짧은 시간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모텔 내부 CCTV에서는 사례자가 많이 비틀거리지 않지만, 모텔까지 걸어오는 노상에서는 많이 비틀거려서 팀장이 사례자의 어깨를 꽉 안는 방식으로 부축해 이동했는데 그 과정에서 사례자가 넘어지기도 하고 팀장이 일으켜 세우는 과정에서 뿌리치려는 동작이 나오기도 하였다.

사례자가 기억하는 장면이 '누군가 부둥켜안고 있었고 그게 싫어서 뿌리치려고 몸부림을 쳤던 장면과 느낌'이었는데, 모텔 외부 노상에서 이와 유사한 장면이 포착되고 팀장이 방에서 머문 시간이 추행 등을 하였다고 보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모텔 방 안을 찍은 영상은 없으니 실제 안에서 추행이 없었다고 100% 단정하긴 어렵지만, 사례자의 팀장이 사례자를 방 안에 앉혀두고 바로 나왔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상황이었다.

이런 사건이 무고로 역고소를 당하면, 특히 노상과 모텔 내부에서 찍힌 고소인의 당시 주취상태가 사뭇 다르면, 수사기관이 고소인이 정말 주취로 기억을 못하여 불가피하게 하였던 고소가 맞는지에 대하여 쉽게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이런 경우, 그러지 않아도 성범죄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 생각하면 스트레스가 컸을 텐데, 무고 피의자가 돼서 하는 마음고생이 적지 않다.

의심스러운데도 고소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꼭 성범죄 우려 때문만이 아니라 적당한 음주량을 조절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세상사가 마음먹은 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전날 만취해 낯선 곳에서 눈을 떴는데 성범죄 피해가 의심된다면, 우선은 씻지 말고 '해바라기센터'나 산부인과를 찾아 전날부터의 상황을 자세히 말하고 검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모텔 같은 곳에 가서 CCTV를 복사해 달라고 하면 거절당하기 쉬우니, 해당 시간대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억을 잘 더듬어 보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다만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수사기관에서 진술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모텔 방 등에서 일어난 직후의 상태를 핸드폰으로 찍어놓는 것도 필요하다. 고소를 무조건 하라거나 하지 말라거나 하는 것보다는, 고소를 하기 전에 당사자가 점검해 볼 수 있는 것을 점검해 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고 무엇보다 중요하다.

* 이은의 변호사의 칼럼 '이변의 예민한 상담소'가 시즌2로 돌아왔습니다. 일상생활 속 성희롱·성폭력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언제든, 어떤 사연이든 언니에게 털어놔!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이은의 변호사 메일(ppjasmine@nate.com)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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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의

이은의 변호사(ppjasmine@nate.com)는 이은의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위 글의 내용에 대한 추가적인 문의 사항이나 법률 상담을 원하시는 분은 메일이나 아래 전화로 연락을 주십시오. (평일 오전 9시 30분~오후 6시 : 02-597-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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