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생 노동자가 말했다..."이 바닥은 '쌍팔년도'예요"

[작고도 가까운 노동, 그리고 싸움] ⑤ 주얼리 제조업 노동자

서울에서 점점 더 멀리

동료들의 출퇴근길 이야기를 한다. 어떤 사람은 천안, 어떤 사람은 인천, 이 말을 하는 자신은 양주에서 출퇴근을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았어요. 왜 다들 멀리 살지?" 이유가 있었다.

"2년에 한 번씩 이사철이 오는데, 우리는 대출을 못 받잖아요."

직장인 대출을 받을 수 없다. 자리에 앉자마자 물어본 그의 경력은 20년 차. 길게 쉬어본 적 없고, 지금 직장도 5년째 다니고 있다. 그런데도 직장인 대출 같은 것은 꿈꿀 수 없었다. 고용보험 가입자가 아니다.

"대출로 전세금을 마련하는 게 불가능하니까. 서울에서 더 먼 곳으로 가게 되고. 조금 더 멀리 가게 되고. 그러니까 우연이 아니었던 거예요."

우연은 고사하고, 직원들 4대보험 가입을 꺼리는 사업주와 이를 관리감독하지 않는 행정기관이라는 주체가 분명히 있는 일이다.

"그런데 사장들은 점점 서울 중심으로 모여요."

"왜요?"

"돈을 버니까. 뉴타운으로 가는 거죠. 용산, 한남…."

양주, 천안, 인천. 직원들이 사는 도시 이름을 들으며 나는 한가지 생각을 했다. 그래도 1호선이네. "어떻게든 종로로 가야 하니까요." 그들의 직장은 종로에 있다. 종로3가와 종로5가 사이 골목골목 들어선 쥬얼리샵. 그 옆 좁은 계단을 통해 2층에 오르면, 이들의 직장이 있다. 주얼리 제조업장, 이들은 귀금속 세공사다.

여기 아니면 일할 데가 없나

전국 주얼리 제조업체 중 78%가 직원 4명 이하의 사업장이라는 조사결과가 있었다(월곡주얼리산업연구소, 2018). 10개 중 8개가 영세사업장이라는 소리. 그러나 실제 일하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 열 명 이상 근무하는 사업장도 흔하다. 4명 이하는 근무자 수라기보다, 고용보험에 가입한 직원 수일 경우가 많다.

제2의 현금이라는 금을 다루는 시장은 음성 거래가 만연하다고 알려져 있다. 세공업체도 매출액을 감춘다. 대부분 거래가 현금으로만 이뤄진다. 금에 붙는 부가세 등을 피하기 위해서다. 자연스럽게 직원 수 등 사업 규모도 비밀이 된다. 월급도 현금으로 준다. 그러니 4대 보험에 가입할 리 없다. 주얼리 노동자 75%가 고용보험에 가입되지 않은 상태다.

사장은 손해 볼 것이 없다. 오히려 회사가 부담해야 할 보험비를 절약하고, 5인 미만 영세사업장이라며 각종 정부 지원을 받는다. 사장은 그렇다 치고, 수십 년 경력자들이 왜 4대보험 가입을 요구하지 않는 걸까?

실업 등에 대비하는 고용보험의 필요를 체감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니 사장 비위 거스르며 굳이 요구하지 않는다. 깔린 생각은 이것이다. "내가 여기 아니면 일할 데가 없을까." 기술자여서 그런다. 숙련된 기술을 가지고 '200', '300', '320'(월급 액수)으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해고도 잦지만 이직도 잦다. 부당한 일을 겪으면 문을 박차고 나가는 일이 쉬웠다. 내가 여기 아니면 일할 데가 없냐.

옛 어른들 말에, 가지고 있으면 밥 굶을 일은 없다고 하는 것이 '기술'이다. 주얼리 현장 15년 차로 서른 중반의 영준 씨(가명)는, 현장실습생 때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 중간에 다른 일을 하겠다고 나갔다가 돌아왔다. 서비스직은 적성엔 맞아도 생활은 불안했다. 미래를 고민할 때 선배들이 한 충고는 '기술'이었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기술이 주는 든든함이 있었다.

그러나 기술만으로 버티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시대 변화에 맞춰 개선되지 않는 현장이 있다. 젊은 사람은 버틸 수 없는 곳이 되어가는 주얼리 제조업이다.

"제 동기가 26명이었는데. 지금 한 명 남았어요. 다 떠나고. 그 한 명은 1인 사업장 열었고요."

지금 사장들은 세공사로 일하며 돈을 모아 마흔쯤 제조공장을 차린 사람들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세공사들의 꿈도 대부분 자기 사업체를 갖는 것. 하청이나 한둘 근무하는 소규모 사업장을 차려 나간다. 요즘은 개인 공방도 늘어나는 추세라 했다.

▲ 주얼리 제조업체 주변 거리에서 선전하고 있는 주얼리 노동자. ⓒ금속노조 주얼리분회

20대의 눈에 주얼리 현장은?

20대 후반에 주얼리 제조업장을 찾은 수현 씨(가명). 대학에서 주얼리디자인을 전공했다. 작은 공방을 차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현장 경험을 해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여기에 왔다. 각오 없이 온 것은 아니다. 앞서 현장 경험을 한 동기들이 있었다. 그들은 "월급 조금 주지. 맨날 야근하지. 환경 더럽지. 주얼리는 이미 망했다"며 도망치듯 떠났다.

"지금이 2020년도인데. 여기 정서는 90년대도 아니고, 70, 80년대인 거예요. 쌍팔년도."

80년대에 태어나지도 않은 이가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의 환경이다. "기존에 있는 분들은 여기는 원래 그렇다는 거예요." 원래 그런 일에는 무엇이 있나? 연차 없는 근무, 야근 수당 없는 야근, 환기 시설 없는 작업장, 보호장구 없는 위험작업 등이 되겠다. 그 수많은 '없음'에 4대 보험도 포함된다.

"면접 볼 때 4대보험을 지금은 못 들어준다고 해서, 3개월은 수습기간이라 못 들어준다는 소리인가 보다 했어요."

4대보험 가입이 선착순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5인 미만 사업장을 유지해야 하는 사장은 그에게 기다리라고만 했다. "나라에서 보면 나는 무직인 게 너무 억울한 거죠." 공식적으로는 백수인데, 야근은 어마어마하게 했다.

"밑도 끝도 없이 야근을 하면서, 체력적으로 그렇고. 피부 이런 거 다 망가지고. 저 같은 경우는 여기 들어오면서 안 되겠다 싶어서 마스크를 꼈거든요."

주얼리에 광택을 내기 위해서는 청산가리와 과산화수소를 섞는데, 그러면 하얀 기포가 올라온다. 각종 화학약품에 용접 흄, 금속 분진까지. "환기시설이요? 화장실에 보면 있는 그 환풍기, 그거 하나." (각) 공정이 공간별로 분류되어 있지 않으니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연기를 맡고 먼지를 흡입한다.

"나도 꾸미는 거 좋아했는데. 여기 오면서부터 추리닝 입고 오는 날도 있고. 내가 좋아서 이 일을 한 건 맞는데, 내가 너무 불쌍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내가 만든 것이 다른 사람 손목에 채워진다. 유독 예쁘게 만들어지면 뿌듯하다. 이 일의 재미라 했다. 그 재미를 야근이 지워나간다. 야근 수당마저 없을 때가 많다. 연차는 '원래' 없는 것이고, 야근 수당은 사장이 빚이 많아 1년 동안 못 준다고 했다. 무급노동이 야금야금 늘어 매일 반복되자 막내 직원인 수현 씨는 사장실로 쫓아갔다. 야근 수당을 달라고 했다.

사장은 뒤에서 "수현이 쟤가 어려서 그런다"고 했단다. 말하지 못한 '어린' 사람들은 이곳을 떠난다. 나가며 주얼리는 망했다고 한다. 선배들은 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냐 물었더니 수현 씨는 간명하게 대답한다. "가정이 있잖아요."

내가 여기 아니면 일할 데가 없냐는 '기술 부심'은 가정이 생기고 돈 들어갈 곳이 늘어나면 조금씩 흔들린다. 일할 데가 없으면 정말 큰일나니까. 그러다 보면 "여긴 원래 그래"로 귀결된다. 그렇게 70~80년대가 펼쳐진다.

이거 다 내 이야기

앞서 등장한 영준 씨는 결혼하고 처음으로 4대보험 가입을 요구했다고 한다. 안 들어주면 그만둘 생각으로 강경했다. 다행히 그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선착순 안에 들었다. 주변 사람들도 영준이는 4대보험 들게 해달라고 말했다. 주변에서 그리 말한 이유는 짐작이 간다. 그에게 가정이 있으니까.

가정은 있으나, 사회 통념상 '가장'의 자리에는 있을 수 없는 기혼여성들이 4대보험 선착순 안에 들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걸까. 일단 비혼여성인 수현 씨는 1년을 꼬박 기다렸다. 노동조합에 가입한 후에야 4대보험 가입도 '성사'됐다.

수현 씨는 선전전을 하는 노동조합 사람에게서 수첩 하나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이런저런 경우에 노동조합을 찾아오라는 글이 있었다. "어머, 이거 다 내 이야기야" 연차 없음, 수당 없음. '없음'으로 채워진 수첩을 들고 망설였다. 막내였으니까. 자신은 '원래' 그렇다는 이곳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노조 가입 망설이던 게, 남의 시선을 의식했던 거 같아요. 쟤 왜 나대? 막내가 왜? 저는 그만둘까도 많이 생각했는데. 누가 이기나 해보자 이런 마음으로 왔던 것 같아요. 저 말고도 이 일을 해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을 거고. 그 사람들이 저처럼 상처를 안 받았으면 좋겠다. 이 마음으로 가입을 한 거 같아요. 왜 일하러 와서 상처를 받고 가야 해요?"

수현 씨가 70~80년대 문화라 지적했던 것 중 하나는 하대였다. 일이 몰아치면 말도 몰아친다.

"이거 100개 해. 몇 시까지 해. 다 안 됐어? 야, 가져와. 이런 식. 옛날에는 다 그 시간 안에 했다 어땠다. 그건 옛날이고."

옆에서 그이보다 15년쯤 경력이 많은 영준 씨가 옛날에는 맞으면서 했다고 말을 거든다. "때리면 고소하는 거지." 세월이 달라졌다. 2년 전 노동조합 생긴 후로는 더 달라졌다.

"노동조합 생기고는 그런 말투 금지. 사장님에게 건의했더니. 요즘은 관리자들도 좀 부드럽게 말하려고 노력하는 게 보이는 거 같은데."

▲ 주얼리 노동자가 쓰는 장비. ⓒ서울노동권익센터

6시 퇴근과 월차

두 사람에게 노동조합 생기고 좋아진 것을 이야기해달라고 하니 '6시 퇴근'을 말한다. 원래 퇴근 시간이 6시다. 그런데 가지 못했다. 일이 없어도 포괄임금제로 정해둔 잔업시간인 7시 반까지 기다리라 했다.

이들과 다른 업체에서 근무하는, 20년 경력 용규 씨(가명)는 노조 생기고 좋아진 점으로 '월차'를 들었다. 연차가 아닌 월차. 1년에 12일 쉴 수 있게 됐다. 500여 개의 주얼리 제조업체가 모여 있는 종로에 연차 수당이 있는 사업장은 한두 곳이나 될까.

언제나 쉬는 일이 문제였다. 주얼리분회(노조)가 제일 먼저 한 캠페인이 "5월 1일에는 쉬자." 그전까지는 사업주들이 이리 말했다. "우리가 그날 어떻게 쉬니?" 노조 생기고 다음 해 많은 사업장이 5월 1일 노동절에 쉬었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자식 입학식 못 간 거, 졸업식 못 간 거. 다 자랑처럼 이야기하세요." 일감 많은 것은 기술자에게는 자부심이다. 동시에 다른 이름은 '빼앗긴 휴식'이다.

회사도 좋아질 거라는 생각으로

노조 초창기 멤버인 용규 씨는 노동조합에 왜 가입한 거냐 물으니, "회사도 좋아질 거라는 생각으로" 했다고 한다. 그 대답이 해맑아 몇 번을 내 쪽에서 되물었다. 그에게 사장은 좋은 사람이었다. 회사에 캔커피도 배치해두고, 일요일 늦게까지 잔업을 하면 술 한잔 사주고, 명절 떡값이라는 것도 있었다.

내가 보기에 이런 일에는 전제가 있다. 사장이 하고 싶으면 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떡값 액수마저 주는 사람 기분에 따라 달랐다. 기준이 없었다. 모든 것이 사장의 선심으로부터 나오니 사장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등장하고 '선심'을 '복지'로 공식화하자고 하니, 사장은 돌변한다. 노조가 요구한 것은 임금체계 개선, 4대 보험 가입 등이었다. 그때부터 노동조합과 사장은 내내 갈등이다.

그러던 중 코로나19가 닥쳤다. 사장은 주 4일 근무에 연봉을 삭감하자고 했다. 노동조합은 임금삭감에 동의했다. 다만 사장 마음대로 삭감액을 정하는 게 아니라 매출액(수입) 변동을 알려달라고 했다. 아무 근거없이 생계비를 삭감당할 수 없다는 노동자의 말에 사장은 협상을 파토낸다. 급기야 단체협약도 거부한다.

선의는 그저 선의일 뿐이다. 노동조합을 하면 회사도 좋아질 거라는 용규 씨의 바람은 자꾸만 깨졌다. 애초에 사장과 그가 '회사가' 좋아진다고 믿는 방향이 달랐던 거였다. 회사는 조합원들의 4대보험 요구에 마지못해 월급을 최저임금 기준으로 맞춰 가입시켰다. "계약서에는 이 금액, 고용보험에 올라가는 건 저 금액, 현금으로 받는 월급은 또 다르고." 제멋대로 임금에는 이유가 있었다. 자체적으로 '면세'를 하는 주얼리 업체가 많았다.

사장님들도 하소연을 한다. 중국 등에서 오는 수입 주얼리가 가격으로 경쟁이 안 된다고. 주재료인 금에 과도한 부가가치세가 붙는다는 주장도 있다. 그렇다고 그 돈 다 내고 사업한 것도 아니었다. 십수 년 '뒷금(비공식 루트를 통해 세금을 내지 않고 구매하는 금)'과 직원들을 숨기며 자체 면세, 아니 탈세를 해왔다.

세금만 내지 않은 것이 아니다. 직원들의 '노후'와 '안정'을 돈과 맞바꿨다. "55세만 되면 내쫓기듯 나가는 거예요. 나가서 수리방 하나 차리면 잘한 거. 그것도 못 차리면 연금도 없고 노후가 막막한 거죠. 고향 가야죠." 주얼리샵 건물 지하에는 노년 세공사들이 차린 1인 수리방들이 있다고 했다.

▲ 주얼리 제조업체 중 한 곳에서 농성 중인 주얼리 노동자. ⓒ금속노조 주얼리분회

재미있게 일하고 싶어요

용규 씨의 업체에는 지난달 '희망퇴직 공고'가 떴다. "수순을 밟는구나 생각했죠." 무슨 수순이요? "폐업이요." 사장이 그랬다고 한다. 부부도 안 맞으면 이혼을 하는 거 아니냐고. 절이 싫으면 나가라던 사장들은 노동자가 나가지 않자, 아예 절을 불태우려 한다. 회사를 문 닫는 일도 다시 세우는 일도 쉬워서 그런다.

당장 폐업 위협이 없더라도, 서울 내 주얼리 업체는 대다수 종로에 모여 있다. 좁은 바닥이라 소문 도는 일을 걱정 안 할 수가 없다. 외벌이 중이라 짊어진 짐이 더 무겁다던 영준 씨에게 왜 노동조합에 가입했냐고 물었다. 노조하면 손해볼 수도 있는데?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했다.

"재미있게 일하고 싶었어요. 내가 일한 만큼 받아가고 싶고. 먹고 살고 싶어요."

일하는 사람으로 너무 당연한 바람이다. 마치 6시 퇴근처럼. 새로 들어올 사람들이 실망하고 떠나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던 수현 씨는 이리 말했다. 주얼리 현장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한 답이었다.

"사람 소중한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여기는 사람 소중한 걸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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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정

기록노동자다. 저서로는 르포집 <노동자 쓰러지다>,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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