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으로 가는 길
2020년 6월 7일,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던 '봉오동 전투'가 있은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해 8월에는 독립군 활동을 주제로 한 영화가 개봉된다고 연일 언론에 보도가 되기도 했다. 이렇듯 '봉오동 전투'는 한국인이라면 역사책에서 한 번쯤 본 기억을 소환할 수 있는 단어다.
중국 연변지역 답사 코스 가운데 훈춘 코스는 관광만을 했다는 가벼움을 독립운동 사적지가 지그시 눌러주는 묵직함을 곁들인 여정이다. 그 시작이 봉오동 전적지이며 정점은 삼국 접경 지역인 방천이다.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중심도시인 연길의 북시장을 지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연길과 도문 간 고속도로 이정표가 나온다. 연길-도문 간 고속도로는 한국의 속도광들이 꿈에 그리는 질주 본능을 자극할 수 있는 곳인데, 총 길이 26km로 차량이 거의 없다. 2001년 개통 당시에는, 좀 과장하면 1km마다 차 한 대가 다닐 정도였다. 도문 17km 이정표를 지나면 도문에서 베이징까지 가는 철교를 볼 수 있다. 장안터널과 소반령 터널을 지나 약 25분을 달리면 도문 이정표가 보인다.
도문 나들목에서 왕청 방향 이정표를 따라 1.3km가면 도로 오른쪽에 수남촌(水南村) 팻말이 나온다. 길을 따라 곧바로 올라가면 3km 지점에 도문시 수도국 봉오동 저수지 관리소 대문이 굳게 빗장을 걸어놓고 있다. 여기를 지나야 비로소 봉오동 기념비를 볼 수 있다. 지금 세워져 있는 봉오동기념비는 2013년에 건립한 것이며, 이미 1989년에 도문시에서 건립한 것은 다른 곳으로 치워진 상태다.
멋진 소나무를 감상하면서 10여 분을 위로 올라가면 봉오동 저수지가 찾는 이를 맞이한다. 이곳에서 멀리 보이는 갓모양의 봉우리, 즉 초모정자가 보이는 지점이 홍범도, 최진동 부대가 일본군과 격렬하게 전투를 펼친 봉오동 전투의 현장이다. 지금은 저수지를 돌아가야만 볼 수 있는 곳이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와 최진동이 지휘한 독립운동 연합부대는 봉오골 저수지에서 북쪽 10km 지점에서 유격전으로 일본군 수십 명을 살상했다. <독립신문> 85호에는 봉오동 전투의 상황이 명료하게 정리돼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에서 발표한 봉오동 전투의 일본군 사망자는 100여 명이며, 독립군 희생자는 3명이라고 했다.
일광산에서 바라본 투먼, 남양, 간도
봉오동에서 불과 10km 떨어진 곳에 국경 도시 투먼과 남양이 있다. 두 도시를 좀 더 자세히 보려면 일광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일광산은 해발 약 450미터 높이의 산으로 사찰 일광사가 있다. 정상에 오르면 도문시와 북한의 온성군 남양읍이 한눈에 보인다.
일광산 정상에서 10시~11시 방향으로 바라본 도문과 남양은 한눈에 보기에도 도시 규모가 확연하게 차이 났다. 도문과 남양은 해방 전까지 거의 같은 규모의 도시였지만 현재는 누가 보더라도 경제적인 규모면에서 뿐만 아니라, 도시의 색채 역시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도문이 컬러라면, 남양은 흑백이었다. 그 사이에 두만강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유유히 흘러갔다.
일광산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보면 간평지역이 한눈에 들어오고 거기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더 가면 사잇섬(일명 간도)라는 지명으로 유명한 곳이 눈에 들어오는 데 지금은 사잇섬이 아니라 붙어 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하다.
다시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보면 홍범도 장군이 습격한 강양동 초소가 성냥갑 만하게 보인다. 그곳을 통과하는 함경선 기차가 남양에서 힘겹게 달려오고 있다. 분단된 한반도에서 한국에 사는 우리들은 경부선을 비롯한 남쪽 철도에만 익숙하다. 당연한 현상이다. 공간을 이해하지 못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북선철도인 함경선은 함경북도 청진을 지나 경원, 온성, 회령을 거쳐 무산까지의 산악지대를 힘겹게 달리는 노선이다.
국경도시 투먼과 남양
도문은 중국어 발음으로 '투먼'인데, 1712년 백두산정계비의 비문 가운데 <서위압록 동위토문>에서 토문(토문) 역시 중국어로 투먼이다. 중국에서 투먼은 도문강의 국경도시이다. 도문은 만주어로 모든 물의 근원이라 한다. 도문의 원명은 회막동이었는데, 1933년 도문으로 고처 불렀다. 현재도 도문시 10만 인구 가운데 50% 이상이 조선족일 정도로 민족적 색채가 강한 도시이다. 도문 톨게이트에서 중심거리를 따라 9.6km에 위치한 도문해관은 주로 북한과의 무역창구이다.
도문 시내에서 남양과 도문을 잇는 철교로 가기 전에 국경로 회전교차로에서 좌측으로 돌면 도문 해관 건물이 보인다. 40m 정도 들어가면 양 옆에 가짜 러시아제 물건과 북한산 우표 등 기념품 상점이 자리 잡고 있다.
주차장도 아니고 광장도 아닌 용도가 묘한 나대지를 지나 둔덕에 오르면 바로 두만강이 눈앞에 있다. 2010년에는 폭 150cm의 기단에 <중국도문변경>이라고 음각한 오석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그전에는 중조변경이라고 쓴 표지석을 설치했는데 주기적으로 바뀌는 것 같다.
그 옆에 1991년 5월 8일 강택민이 쓴 <중국전문구안(中國前們口岸)>이 주위의 변화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에서 두만강 상류로 눈을 돌리면 철교가 보이고 하류에는 해관 정문이 북한의 남양 쪽을 응시하고 있다.
10여 년 전에는 한국관광객들이 압도적이었지만 요즘은 중국의 신장된 경제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국경을 체험하기 위해서 삼삼오오 북녘을 향해서 카메라 세례를 퍼붓고 있다. 해관 정문 전망대에 오르면 북한의 남양을 보다 자세하게 볼 수 있다. 상록에 묻힌 남양의 모습은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수수하지도 않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우리에게 국경선이란
도문 외곽을 지나 두만강 하류를 끼고 가는 길은 중국 땅과 한반도의 경계를 명확하게 하는 것 같다. 아름다운 길이다. 두만강을 따라가는 길은 이곳 이외에도 도문에서 간평을 지나 개산툰, 용정으로 빠지는 길과, 삼합에서 북한 무산이 보이는 숭선까지 가는 길이 있는데 각 구간마다 특징적인 아름다움이 있지만 하류 쪽은 넉넉한 두만강의 수량과 한반도 최북단 온성과 경원을 감상할 수 있어 마치 동해바다로 빨려가는 느낌을 받는다.
70여 년간 잊혀진 곳, 눈에서만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인식 저장 공간에도 없는 곳, 다만 아직까지도 초등학교 사회과 부도에는 한반도 전체의 식물의 북방한계선, 지하자원 지도 등이 실려 있지만 정작 가상세계와도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 북녘땅의 현주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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