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복지원 사건, '과거사' 아닌 '현재사'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형제복지원, '사건'을 넘어 '레짐'을 극복해야…

지난 5월 20일,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이하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2010년 1기 과거사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한 지 10년 만의 일이다.

1기 과거사위는 9000여 건에 달하는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 권위주의 통치 시기 인권침해 사건 등에 대해 조사하는 성과가 있었지만, 사회 하층민에게 자행되었던 강제수용과 노역동원 등 '밑바닥 인권'까지 시선이 닿지는 못했다. 이처럼 '지연된 정의'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기나긴 싸움을 통해 다시 회복될 길을 찾았다. 2012년부터 시작된 이들의 투쟁은 단식농성, 국토대장정, 고공시위 등으로 이어지며 잊힌 기억을 다시금 공론장에 소환해냈다. 그리고 마침내 국회에서 수년간 잠자고 있던 과거사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국가의 시간표 안에 하층민에 대한 인권침해 진실규명이라는 과제를 기입해 넣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국가의 시간표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필연적으로 하나의 딜레마와 마주하게 된다. 이는 대부분의 과거사 이슈들이 겪는 것이긴 하나, 형제복지원 사건처럼 사회 하층민과 관련된 문제에서는 더 중요한 쟁점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딜레마를 다소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형제복지원 사건 해결하라"라는, 너무나 자명해서 의문에 부칠 필요도 없어 보이는 피해생존자들의 목소리를 국가가 이해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왜곡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뜻밖의 일'로 여겨지는 형제복지원 사건

형제복지원의 실상은 1987년 초 한 초임검사의 인지수사를 통해 처음 세상에 드러났다. 수사가 본격화되자 관련 보도들이 쏟아졌다. 어느 날 갑자기 부랑인으로 낙인찍혀 난데없이 가족과 이웃을 잃고 잡혀 들어왔다는 사람들, 이유를 알 수 없는 규율과 폭력 그리고 의문의 죽음들,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다는 박인근 원장 일가 등의 이야기가 지면을 가득 채웠다.

이때 형제복지원은 하나의 '사건'으로 인지되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사건'이라는 단어는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목을 받을 만한 뜻밖의 일'로 정의된다. 단어의 정의대로, 형제복지원은 우리 사회가 충분히 평화롭고 안전하다고 여기던 다수의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뜻밖의 일'로 다가왔다. 그래서 이는 진지한 성찰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한여름 밤 도시괴담처럼 소비되었고, 이내 6월항쟁의 파도에 밀려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뜻밖의 일'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명백히 드러난 범죄사실에 대한 적법한 처리조차 검찰 수뇌부의 외압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87년 당시 우리 사회가 마땅히 해야 했던 일은 그 '뜻밖의 일'의 감춰진 '뜻'을 헤아리는 일이었다. 형제복지원이 그저 박인근 원장 일가의 악마적 소행에 의해 건설된 지옥굴이기만 했다면 굳이 그런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형제복지원의 부랑인 수용 업무는 부산시와의 위탁계약에 의해 이뤄진 것이며, 정부 차원에선 '내무부훈령 제410호'를 제정해 부랑인 단속 및 수용 업무 전반을 관리했음이 이미 그때 다 드러났다. 형제복지원과 유사한 형태로 운영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부랑인시설도 36개나 확인되었다. 따라서 박인근을 중심으로 한 시설 운영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우리 사회의 어떤 구조적 문제점이 이러한 '생지옥'을 만드는 데 일조했는지 정확하게 분석하고 이를 개혁하기 위한 논의가 이어졌어야만 했다.

물론 그런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87년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은 형제복지원 사건을 계기로 전국 복지원 실태 특별조사를 진행하고자 했다. 그러나 특별조사의 첫 대상이었던 대전 성지원에서 신민당 의원들은 원장 노재중과 그의 호위대 격인 원생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는 수모를 겪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이후로 부랑인 시설에 대한 국가 차원의 어떠한 체계적 조사도 진행되지 못했다. 그 결과 형제복지원 '사건' 뒤에 가려진 '구조'는 드러나지 못했고, 오직 사건의 잔인하고 극단적인 이미지들만 남게 되었다. 최근 몇 년간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들의 노력으로 이 사건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언론의 보도는 그 극단적 이미지만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에 그치고 있다. 언론은 오직 더 잔인한 폭력의 증언, 그리고 그 폭력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 것처럼 보이는 '불쌍한' 피해자의 초상만을 쫓고 있다.

이런 조건이 그대로 유지된다고 할 때, 국가가 취할 수 있는 '형제복지원 과거사 해결'이란 무엇을 뜻하게 될까. 이 사건의 구조적 책임을 밝히는 진정한 의미의 진상규명이 수반되지 못했을 때, 피해자들은 그저 국가로부터 개별적인 피해보상을 받을 원자화된 개인으로만 인식될 것이다. 이는 곧 '과거사 해결'이 그간 누적된 부정의를 극복하는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국가와 피해자 사이의 묵은 채무 관계를 처리하는 회계 절차로 축소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국가는 이 채무 관계가 정리되면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역사적·정치적 책임도 완수된 것으로 결론지을 것이다. 이는 이미 5.18 피해보상법 등 기존의 많은 과거사 관련 법들이 거쳐 왔던 과오이기도 하다.

징벌적 치안행정과 공공부조제도의 잘못된 만남

그러나 과연 형제복지원 사건이 이처럼 개별 피해자에 대한 민·형사 사건처럼 이해되면 그만인 문제인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오늘날 우리의 마음을 덜 무겁게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드러난 자료들은 그런 편리한 이해방식에 '멈춤'을 요구하고 있다.

형제복지원이 자체적으로 기록한 입소자 규모는 75년부터 86년까지 총 12년에 걸쳐 3만8267명에 달한다(형제복지원 소식지 <새마음> 1987년 1월호, 183쪽). 매해 최소 1500명이 입소했고, 84년에는 4355명으로 최고치를 찍었다. 한편 87년 당시 확인된 전국 36개 부랑인 시설(형제복지원 포함)의 동시 수용 규모 합계는 1만2978명이었다. 어림잡아 이 수치를 연인원이라고 가정하고(1년 이상 장기수용자도 적지 않지만 2~3개월 정도 수용되었다가 퇴소하는 사람 수도 상당했으므로 실제 연인원은 이보다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75년부터 86년까지 12년간 총 수용인원을 계산하면 15만 명이 넘는다.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되는 죄인도 아닌 사람들이 이렇게 대규모로 수용시설에서 살았다는 것은 보통 일로 넘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현재 언론이나 시민단체를 통해서 자신의 수용 피해를 드러낸 사람들은 정말 빙산의 일각일 뿐이며, '복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강제수용이 한국 사회에 매우 규모 있고 견고한 시스템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우선 이 수치로나마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이 많은 사람들이 대체 무슨 이유로 시설에 수용되게 된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을 여기서는 형제복지원의 자체 자료를 바탕으로 찾아보고자 한다. 형제복지원 자체 자료는 주로 80년대 중후반에 집중되어 있고 부실하게 작성된 기록이 많아 그 신뢰성이 대단히 의심스럽지만, 형제복지원이 각각의 수용자를 어떻게 인식하고 처리했는지를 내재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자료에 기초한 분석이 중요하다.

필자는 지난해 말부터 올해 5월까지 부산시가 동아대산학협력단에 위탁해 진행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실태조사>(연구책임자: 남찬섭 동아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에 참여하면서, 형제복지원에서 86년도에 퇴소한 사람들 중 127명의 신상기록카드를 확보하여 분석해 볼 수 있었다. 신상기록카드의 첫 페이지 하단에는 입소 사유가 한 문단 정도로 간단히 적혀 있는데, 이를 비슷한 사유끼리 묶어 유형화 해 보았다. 그 결과 노숙 및 단순 배회 등 흔히 '부랑인'이라 여겨지는 이들을 단속해 수용한 경우는 51건이었다. 그러나 이보다 많은 수를 차지한 유형이 있었다. 그것은 음주·폭행·소란·가정폭력 등 각종 무질서 행위 또는 소년비행이나 준(準)절도와 같은 경범죄에 해당하는 것들로, 총 61건이었다.(그 외 사유는 타 시설 입소 의뢰, 미아, 자진 입소 등이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에서 음주·폭행·소란 등 무질서 행위는 경찰이 개입된다 하더라도 현장에서 소란을 자제토록 하거나 벌금 또는 구류와 같은 즉결처분 등으로 해결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또한 소년비행에 해당한다면 소년법 절차에 따라 보호처분을 받거나 소년원에 가는 것이 적법하다. 형제복지원이 부산시와 1975년 7월에 맺은 '부랑인 선도(수용보호) 위탁계약'은 '부산시 재생원 설치조례'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 조례는 아동복리법 및 생활보호법에 의거하고 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두 법령은 경범죄 및 소년비행에 대한 처분과는 무관하며, 일상 치안 문제에 대한 경찰력 개입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전자의 경우, 즉 노숙 및 단순 배회의 경우라 하더라도 형제복지원과 같은 시설에 기한의 정함 없이 수용하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생활보호법에는 '생계보호를 행할 장소'로서 "피보호자가 그 주거가 없거나 주거가 있어도 그곳에서는 보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경우 또는 피보호자가 특히 희망하는 경우"에는 보호시설에서 보호를 행할 수 있다고 규정(제10조 제2항)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제1항 "생계보호는 피보호자의 주거에서 행한다"에 대한 보충적 조항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수용조치가 불가피하게 요청된다 하더라도, 그에 앞서 연고자 및 주소지 파악 등이 철저하게 이뤄져야만 했다.

그러나 필자가 직접 자료를 확인해 본 결과, 이런 기본적인 절차는 완전히 무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85년 12월 한 달간 입소한 총 300명의 신병인수증(입소 전 작성)과 수용자연명부(입소 후 작성)를 일련번호 순으로 대조한 결과, 주소가 다르게 적힌 경우가 122건이나 됐다. 그것도 단지 번지 정도만 다른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시·도가 적혀 있거나 심지어 '주례동 산18번지'(형제복지원 주소)가 적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통해 형제복지원 운영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국민의 일상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치안 문제를 가장 징벌적인 방식으로 대처하되 이에 '복지'라는 외양을 씌웠다. 둘째, 적절한 공공부조제도에 의한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집단수용이라는 행정·재정적으로 가장 손쉬운 처방으로 대응했고 이 과정에서 인권적 고려는 전무했다. 형제복지원은 취약계층을 위한 공공부조제도가 징벌적 치안행정과 결합했을 때 어떤 모습이 될 수 있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형제복지원 사건에 응답해야 할 정치적 책임

사회복지서비스의 한 형태로서 시설보호는 한국전쟁 직후 전후 복구 과정에서 자리 잡았고, 따라서 다소 불가피한 측면도 존재했다. 초기의 시설수용 대상은 주로 전쟁고아, 미망인 등이었다. 그러나 전후 복구가 완료되고 전쟁고아가 성인이 된 시점에는 시설보호의 사회적 필요성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게다가 재원의 대부분을 제공하던 해외원조 단체들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시설의 물적 기반도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설은 살아남았다. 정부는 사회적으로 불건전한 주체들을 교화한다는 명목의 '사회정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시설의 필요성을 계속해서 환기시켰다. 또한 전후 해외원조 단체의 지원을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권력 형성에 활용했던 시설운영자들에게, 70년대 이후 정부가 수익 사업화의 길까지 열어주면서 '사회복지적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인 자체의 '비즈니스적 필요'에 의해 시설을 운영하는 것을 정당화해 주었다. 나아가 시설보호가 징벌적 치안행정과 결합되면서 우리 사회의 하층민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준경찰기관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형제복지원은 '뜻밖의 일' 또는 '사건'이 아니라, 한국 공공부조 역사의 모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명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한국의 공공부조는 상당 기간 동안 형제복지원 레짐(regime) 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1차적 피해자는 당연히 그곳에서 수용피해를 겪었던 당사자들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모든 논의가 이들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전제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가 수용당사자가 아니었던 사람들이 이 사건에 대해 제삼자로서 거리를 두는 알리바이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절멸 수용소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의 재판에 대해 논하면서, 이 학살을 유대인이라는 특정한 민족에 대해 범해진 범죄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유대 민족의 몸에 범해진 '인류에 대한 범죄'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형제복지원을 포함한 당시의 부랑인 강제수용 정책에 의해 훼손당한 것은 수용당사자 뿐만이 아닌, 포용적인 복지체계 발전을 통해 건강한 공동체를 수립할 가능성을 억제당한 '사회' 그 자체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훼손된 '사회'는 결국 배제된 사람들을 추방하는 가해자의 얼굴을 띄게 되었다.

따라서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정치적 응답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다. 또한 그 책임은 단순히 개별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구제를 넘어서, '형제복지원 레짐' 하에서 누적된 한국 공공부조의 모순을 성찰하고 이를 개혁하는 것으로 이행되어야 한다.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상당 부분 사회복지계가 짊어져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12년 한종선 씨의 시위로 이 사건이 재점화된 이후 지금까지 사회복지학계의 집단적 성찰 노력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2018년 2월 19일에 일부 학회와 지역 사회복지사협회 등이 공동으로 특별법 제정 촉구 성명서를 발표한 게 전부였다.

이처럼 소극적인 사회복지계의 태도는 냉정히 말해 한국 사회가 여전히 형제복지원 레짐 하에 있으며 학계와 사회복지단체 역시 이 체제의 침묵의 동조자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실제로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은 2년 6개월의 짧은 감옥살이를 마치고 돌아와 오랫동안 지역의 복지재벌로 행세했으며 2016년에야 비로소 형제복지원 운영 법인은 해산 처분을 받았다. 더 큰 문제는 87년 형제복지원과 함께 문제로 지적되었던 36개 부랑인 시설 중 상당수가 여전히 사회복지법인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난 30여 년 간 사회복지계에서는 이 사안에 대해 별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못했다.

형제복지원이라는 '과거사'는 결코 과거의 일일 수 없다. 사회복지계를 포함한 우리 사회 전체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형제복지원 레짐'을 극복하기 위해 정치적 응답을 내놓아야 하는 '현재사'이다. 이는 올해 말 2기 과거사위원회 활동 개시와 함께 당장의 과제로 떠오를 것이다. 이를 과거사위원회만의 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시민사회와 사회복지계 등의 적극적인 참여 속에서 시설 중심의 공공부조 역사를 성찰하고 개혁의 전망을 내놓는 과정이 함께 이뤄져야만 '형제복지원 사건 해결'은 완수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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