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깅하던 흑인청년 피살, 대선 앞두고 폭발한 흑인들의 '분노'

[2020 미 대선 읽기] '백인 인종주의' 앞세운 트럼프 대통령 '곤혹'

미국 조지아주에서 지난 2월 23일 백주대낮에 조깅을 하던 흑인 청년이 백인 아버지와 아들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하지만 백인 부자는 흑인 청년을 도둑으로 의심해 추격했고, 자기 방어 차원에서 총을 쐈다고 주장해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풀려났다.

그러나 지난 5일 사망 당시 영상이 공개되면서 사건은 급반전했다. 25세의 흑인 청년 아머드 알버리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조깅을 하다가 픽업트럭을 타고 쫓아온 맥마이클 부자와 마주쳤다. 알버리는 트럭을 피해 계속 조깅을 하려 했지만, 맥마이클 부자가 그를 막아서며 몸싸움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알버리는 총 3발을 맞아 현장에서 즉사했다.

전직 경찰 출신인 아버지 그레고리 맥마이클과 아들 모두 총으로 중무장한 상태였고, 알버리는 운동복 차림이었기 때문에 '자기 방어' 차원이라는 주장이 성립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공격을 먼저 시작한 것도 그레고리 부자였다.

알버리 변호사를 통해 공개된 이 영상 덕분에 맥마이클 부자는 피해자가 죽은 지 74일 만인 지난 8일 가중 폭행·살인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 조깅하던 흑인 청년을 무참히 살해한 맥마이클 부자. ⓒAP=연합뉴스

흑인들 '분노'..."우린 매일 사냥당하고 있다"

뒤늦게 범인이 체포되기는 했지만, 알버리가 무참하게 백인 부자가 쏜 총에 사망한 사실이 74일이나 지나서야 밝혀지는 과정은 많은 이들의 분노를 불러왔다.

게다가 8일은 숨진 알버리의 26번째 생일이었다. 이날 조지아주 그린카운티 법원 앞 등 미 전역에서 알버리를 추모하고 미국 내 인종차별을 규탄하는 시위가 열렸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 미디어를 통해 "내가 알버리다"라는 문구가 들어간 추모 게시물들이 크게 확산됐으며, 미국 프로농구(NBA) 선수 르브론 제임스는 "우리는 매일 사냥당하고 있다"고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알버리의 아버지 마커스는 8일 CNN과 인터뷰에서 "아들에 대한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랄 뿐"이라면서 "늦게라도 맥마이클 부자가 체포되어 다행"이라고 말했다. 알버리의 가족의 변호사는 사건 발생 당시 맥마이클 부자를 체포하지 않은 경찰 또한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8일 알버리의 생일을 맞아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미 전역에서 집회가 열렸다. ⓒAP=연합뉴스

코로나 사태 + 흑인 청년 피살, 여전한 인종차별 문제 드러나

흑인들의 분노는 미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서 드러난 '인종간 건강 불평등' 문제와 맞물리면서 더 커졌다. 시카고 등 일부 대도시와 남부 등 흑인들이 밀집한 지역의 경우, 인구 구성 비율로는 흑인들이 30% 정도를 차지하는데 코로나19 사망자들만 놓고 보면 흑인이 70% 가량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코로나 사태로 드러난 여전한 '2등 시민'으로서의 지위가 알버리 피살 사건으로 재확인된 셈이다.

알버리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하는 이들은 올해 11월 있을 대통령 선거에서 이를 쟁점화해야 한다고 본다. 이들은 특히 백인 인종주의를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보니 왓슨 하원의원(민주당, 뉴저지)은 10일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에서 "이번 사건은 현재 미국 사람들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아픈지, 또 얼마나 인종차별적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끔찍한 예"라면서 "조지아에서 일어난 개별 사건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의회의 블랙 코커스 의장인 캐런 배스 의원(민주당, 캘리포니아)은 "오벌 오피스(백악관의 대통령 집무실)에서 증오가 뿜어져 나오는데, 왜 놀라는가"라고 그 책임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돌렸다.

민주당 대선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8일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이번 사건에 대해 "너무나 명백하고 무자비하게 공격을 가한 것을 우리 눈으로 확인했다"며 "이 악행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측면이며, 최근 증가하는 증오의 팬데믹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온다"고 트럼프 대통령을 간접적으로 겨냥했다.

인종주의를 재선에 활용하려던 트럼프 당혹 "매우 끔찍하다"

한편,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 '중국 책임론'을 제기하며 인종주의를 재선에서 다시 한번 활용하려던 트럼프 대통령은 다소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흑인들은 원래 민주당 지지 성향이 강하다는 점에서 자신의 지지 세력은 아니지만, 알버리 사건을 통해 극명히 드러난 인종 차별 문제가 부동층의 표심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8일 <폭스뉴스>와 인터뷰에서 알버리의 죽음에 대해 "아주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며 "고인의 부모와 가족, 친구들과 마음을 함께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도 백인 부자가 무장도 하지 않고 조깅을 즐기던 청년을 총으로 쏴 살해하는 동영상을 봤다며 그걸 시청한 누구라도 "혼란스러울" 것이라면서 주지사와 사법당국이 "아주 강하게" 사건을 들여다볼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인종 문제로 빚어진 사건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정의가 이뤄지게 하는 일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란 원론적 답을 내놓는데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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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기혜

프레시안 편집·발행인. 2001년 공채 1기로 입사한 뒤 편집국장, 워싱턴 특파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한국의 워킹푸어>, <안철수를 생각한다>, <아이들 파는 나라>, <아노크라시> 등 책을 썼습니다. 국제엠네스티 언론상(2017년), 인권보도상(2018년), 대통령표창(2018년) 등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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