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년 전에 법제화 통해 중국인 강제 축출한 미국

[기고] 꿈의 나라로 가는 죽음의 길 (6)

19세기 중반 들어 노예무역이 금지되자 노동력 부족을 메우려고 영국이 앞장서 유럽에서 계약노동자들을 식민지로 데려가 부렸지만 임금이 비싸 수지가 맞지 않았다. 영국이 눈을 아시아로 돌렸다. 주로 인도, 중국에서 일꾼들을 계약이란 형식을 빌려서 데려갔는데 계약기간은 보통 10년 이상이었다. 그들을 쿨리라고 불렸다.

명나라를 쫓아내고 중원을 차지한 청나라가 남중국해안의 잔명세력을 소탕한 다음에는 해금령을 해제했지만 해외이주는 여전히 금지했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1차 아편전쟁에서 영국한테 패배한 이후에는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영국의 강압에 의해 인력수출 자유화가 이뤄졌던 것이다. 그에 따라 영국이 중국인 일꾼들을 미국에 데려다 팔았다.

2차 아편전쟁이 끝난 지 8년이 지나서 미국이 1868년 청나라와 벌링게임 조약(Burlingame Treaty)을 체결했다. 그 조약에 의거해 미국이 중국인 일꾼을 직접 수입하는 길이 열렸다. 그에 따라 중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쿨리를 선발하는 과정이 영국에 비해 자발성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었다.

그러나 막상 미국에 도착하면 중국인의 작업조건과 노동환경이 혹독하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도 중국인의 품삯이 인디언과 흑인의 그것보다 훨씬 쌌다. 노동력 부족사태가 심각한데도 불구하고 중국인의 작업환경이 너무나 열악하여 무수한 생명이 쓰러져 나갔다. 대형토목공사는 중국인 쿨리의 공동묘지나 다름없었다. 인종차별도 극심했다.

중국인은 미국인들이 말하는 이른바 유색인종이다. 중국인 쿨리가 늘어나자 미국에서 반중감정이 격앙되는가 싶더니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났다. 선동가들은 중국 놈들과 같이 사느니 차라리 죽은 게 낫다며 반중감정을 부추겼다. 끝내 살벌한 축출운동이 벌어져 곳곳에서 중국인에 대한 폭행사건이 잇달았다.

각종 대형토목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어 일자리가 줄어들자 구직경쟁이 치열해졌다. 거기에다 남북전쟁이 끝나면서 불황이 겹치자 노동조합의 백인간부들이 중국인 축출운동에 앞장섰다. 백인의 일자리를 뺏는 중국인들을 쫓아내야 한다며 폭력행사를 예사로 알았다.

▲반쿨리법 제정을 다룬 카툰. ⓒUC 버클리 소장.

캘리포니아 주지사 존 칼리반은 반중감정을 정치적으로 악용했다. 그가 주도해 캘리포니아 주의회가 1862년 반쿨리법(Anti-Coolie Act)을 제정했다. 그 법에 따라 미국인과 미국선박에 의한 쿨리무역을 금지했다. 중국쿨리의 수입을 봉쇄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노동조합이 가세해 저임의 원인을 중국인 탓으로 돌리며 더욱 결렬한 중국인 축출운동을 벌여 폭력이 난무했다.

미국의 중국인 이주자가 1851~1860년 4만1,397명, 1861~1870년 6만4,301명으로 증가하다 1871~1880년 12만3,201명으로 정점을 이루었다. 그 후 1881~1890년에는 6만1711명으로 증가세가 둔화되었다. 그 원인은 금 매장량이 점차 고갈되어 채굴량이 줄어들고 철도공사가 끝나가면서 노동력 수요가 감소한 데 있었다. 또 법제화를 통해 중국인을 강제로 축출했기 때문이었다.

실업난에 따른 불만여론을 등에 업은 연방정부가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이른바 유색인이라는 이유로 중국인의 정착을 방해했다. 그러더니 연방정부가 1882년 5월 중국인의 이민을 금지하는 중국인 배제법(Chinese Exclusion Act)을 제정하고 중국인들을 본격적으로 색출, 축출하기 시작했다.

중국인 배제법은 한마디로 계약기간이 만료된 중국인 노무자는 더 이상 미국에 머물지 말고 나가라는 소리였다. 원래는 중국인 배제법이 10년 한시법으로 제정되었는데 1892년 한 차례에 연장되었다가 1902년 영구법으로 개정되었다. 그에 따라 이미 미국에 거주하던 중국인도 시민권 자격이 박탈되었다. 따라서 모든 중국인은 연방정부가 발행하는 사진이 부착된 신분증을 소지하도록 강제화되었다.

인종차별과 축출운동에도 불구하고 많은 중국인들이 대도시 변두리에 그냥 주저앉아 숨어 살았다. 대부분이 돌아갈 레야 돌아갈 뱃삯도 벌지 못했으니 귀국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들이 결국 오늘날 미국과 캐나다의 서해안 일대 대도시에 형성된 차이나 타운을 일군 시조격이 되었다.

미국은 중국인 배제법을 제정한지 61년이 지난 1943년 12월 17일에야 폐지했다. 그것은 국제정세가 변화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일본이 중국침략을 감행하자 중국이 일본에 대항해 선전포고를 했다. 그 연유로 중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함으로써 미국 연합군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2012년 6월 18일 미국하원은 중국인 배제법에 대해 사과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 법이 인종적인 이유로 중국인의 이민과 귀화를 전면적으로 제한하고 중국계 미국인의 기본적 인권을 거부한 데 대해 사과한다는 내용이었다. 그에 앞서 미국상원은 2011년 10월 비슷한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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