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과연 입양을 지지하는가?

[해외입양인, 말걸기]<22>한국 기독교와 해외입양 60년

해외입양과 국내입양을 주도해온 기독교인들

지난 11월 18일 서울 중구 정동에 소재한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는 <헤이그국제아동입양협약 가입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보건복지부가 주최한 이 회의는, 그 동안 귀환입양인공동체 '진실과 화해를 위한 해외입양인 모임(TRACK)'과 해외입양인센터 '뿌리의집(KoRoot)'이 주도해서 추진했고 최영희의원과 보건복지부의 협력에 의해서 지난 6월 국회통과와 내년 8월 시행이라는 결실을 본 <입양특례법>에 비추어 볼 때, 우리나라가 이제 국제간의 아동입양에 관한 국제간의 협약인 이 헤이그협약에 가입하고자 한다면 추가 입법 과제와 정책방향이 무엇인지를 따져보는 그런 토론회였다. 그런데 이 회의에서 토론자 중의 한 분이, 아동 입양의 철학적 기초로서 모세의 입양을 거론했는데, 비록 이런 거론이 이 날의 회의에서는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했지만, 한국 사회에서 입양을 주도해온 분들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고 이 분들이 종종 기독교 성서에서 그 근거를 찾고자 하는 모습을 지켜본 필자로서, 또 기독교 목사로서 이 문제에 관한 사려 깊은 성찰이 필요하지 않겠나 싶어서 그 논의의 일단을 펼쳐보고자 한다.

실제로 6.25전쟁 이후 지난 60년간 실천된 해외입양과 90년대 중후반 본격적으로 등장한 국내입양 운동을 주도해온 사람들의 대부분은 기독교인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해외입양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의 설립자 해리 홀트씨는 근본주의 기독교인이었고, 그의 사후 홀트의 회장을 역임한 사람들도 기독교인들이었다. 홀트아동복지회에 버금가는 대한사회복지회는 정부조직이 사적 입양기관으로 성장한 경우인데, 20여 년 동안 회장을 역임하고 이 기관의 위상 정립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 역시 기독교인이었고 그의 후임자는 목사였다. 또한 동방사회복지회는 십자군연맹이라는 반공주의 기독교선교기관을 모체로 해서 설립되었고 설립자와 그 후손들 역시 소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이 기관들을 통해서 보내어진 해외입양 아동들의 입양수령국의 입양기관들과 입양부모들 역시 대부분 기독교 정신에 기반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미국의 대표적인 입양기관 중의 하나로 성장한 홀트인터내셔날의 경우, 입양부모의 단 하나뿐인 자격이 '기독교인일 것'이었다. 미국의 다른 많은 입양기관 역시 루터교나 카톨릭의 사회복지시스템의 일부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대륙간 국제간의 아동입양 시스템에 의해 입양된 아동들의 대부분은 미국과 유럽의 주류 중산층 가정으로 입양되었는데, 이들의 종교적 기반 역시 기독교였다.

90년대 후반에 등장한 국내입양 운동의 설립자와 회장 역시 신실한 기독교인들이다. 또한 국내에서 입양하는 입양부모들 또한 카톨릭교도들을 포함한 기독교인들이 대부분이다. 많은 개신교 목사들이 입양을 자신의 목회자적 소명의 일부로 삼고 있으며, 개신교신앙을 고백하는 연예인들이 스스로 입양을 실천하고 나아가 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 우리 사회를 향한 입양 촉구의 메시지가 되고 있다. 한 마디로 지난 60년 동안 해외입양이든 국내입양이든, 입양에 관한 한, 기독교인들이 독보적인 위치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왔고 또 실천에 있어서도 책임 있는 역할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기독교인임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입양 실천이 신앙적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있음을 깊이 확신하고 있음은 물론 다른 이들에게도 이것이 기독인의 신실한 삶의 한 방식임을 권고하고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는 생각 혹은 믿음 중의 하나는 성경이 입양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대표적으로 드는 예가 모세의 입양이야기다. 모세는 이집트 파라오의 공주에게 입양되어 왕궁에서 자랐고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며, 한 시대를 이끄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 입양은 이렇게 한 사람의 생애의 미래를 열어주는 결정적인 사랑의 행위가 아닌가 하는 식의 주장이다. 과연 그럴까?

모세의 이야기는 과연 입양을 지지하고 있는가?

모세의 입양 이야기 배후에는, 제국 이집트가 제국을 규율하는 방편으로 제국 내부에서 노예계급으로 살아가고 있던 히브리민족에 대한 인종말살(genocide)정책이 놓여 있다. 제국의 통치자 파라오는 산파들에게 명하여 히브리인의 가정에서 새로 출생하는 모든 남자 아이들을 출생 즉시 직접 손으로 살해할 것을 명령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히브리 산파들은 저항했고 이에 파라오는 직접 살해하는 대신 강물에 수장할 것을 명했다.

모세는 히브리인 남아에 대한 인종말살이 자행되던 잔혹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출생한다. 파라오의 명령을 거부한 히브리 산파들의 목숨을 건 저항이 모세의 생존을 일정 정도 담보했고, 생모는 이 이상 숨겨 둘 수 없을 때까지 키운다. 결국 생모는 최후의 선택으로 역청과 송진으로 방수한 갈대상자에 아이를 담아 강가로 나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갈대숲에 조심스럽게 끼워 놓아둔다. 이 장면은 이 본문 읽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장면인데, 통상 알려진 담화의 방식은 생모가 아기를 갈대상자에 나일강물에 떠내려 보냈다고 하지만, 세상의 어느 생모가 이 상황에서 갈대상자를 물가 갈대숲 사이에 끼우면서 떠내려가지 않기를 바라지, 잔인하게(!) 떠내려 보낼 것인가 하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모에게 이것은 수장에 다름이 아닌 일이었을 것이다. 아기가 백일을 맞으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백일박이 자기 새끼를 수장하는 일, 모세의 생모는 가슴을 찢는 아픔에 오열했으리라.

조금 철이 들었을 법한 나이에 이른 모세의 누나는 갈대숲에 걸려있는 동생 아기의 갈대상자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자칫 큰 물결이 갈대상자를 강물 한 가운데로 밀고 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한 채로. 마침 날이 저물 무렵 파라오의 딸, 공주가 강가에 목욕하러 나왔다가, 갈대 상자를 발견한다. 공주는 아기가 히브리인의 아기일 거라고 중얼거리는 것으로 보아서, 남자 아이의 수장 명령을 받은 히브리인들이 차마 아이를 맨몸으로 수장시킬 수 없어, 갈대상자에 담아내어 놓는 일들이 더러 있었던 일처럼 보인다. 모세의 누나는 공주에게 다가가 아이의 젖을 먹일 유모를 찾아주겠다는 제안을 하고, 짐짓 모세의 생모를 공주에게 소개한다.

생모는 공주와의 약속에 따라, 아이에게 젖을 먹여 아이가 자라자, 왕궁으로 데리고 가서 공주에게 넘겨준다. 공주는 아이를 자기 아이로 삼고, 모세라는 이름을 지어 준다. 공주는 강가에서 아이를 발견했을 때, 아이를 자기 아이로 삼았는데, 그녀의 긍휼이란 매우 한계가 지어진 긍휼에 불과했다. 공주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아기에게 친엄마를 찾아주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또 이집트의 인종말살정책을 폐기하는 일이, 아이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해결책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공주는 아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따라 단순히 본능적으로 반응했을 뿐, 그 아이의 행복이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공주의 후견 하에 궁정에서 청년기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세의 정체성은 히브리인이었음이 드러나고 만다. 그는 목숨을 걸고 히브리인 편을 드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생모의 품에서 젖먹이로 자라는 동안, 누나와 함께 소년시절을 보내는 동안 그는 자기의 정체성을 구축했고, 파라오의 제국이 동족 히브리인을 향해 가하는 인종적 압제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이다. 입양모의 후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결국 그의 입양모의 나라 제국 이집트와 정면대결에 나서는 사람이 된다.

모세의 입양 이야기에는 제국 이집트의 인종말살정책을 거슬러 아동의 생명을 지켜내는 산파들의 저항 이야기, 자기 아이를 수장해야 하는 잔혹한 시대의 정황 한 가운데서 파라오의 공주를 압도하는 지혜로 결국 친생자녀의 생물학적 문화적 양육권을 지켜내는 모세의 엄마와 누나의 이야기, 공주의 후견과 왕궁에서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낸 모세의 이야기로 전개된다. 입양하는 자의 주도권이 드러나는 입양이 아니라, 입양에 대해서 저항적이고 그것을 성공적으로 극복해내는 치열한 삶의 과정이 나타나 있고,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에 개입하시고 인도하시며 지지하시는 분이시라고 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중심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사실 이 이야기의 어느 구석에서도 오늘날 실천되고 있는 국가 간의 아동입양제도나 개인적인 입양 선택을 지지하고 교훈하는 바를 찾아낼 수 없다. 유일한 이야기는 공주가 갈대상자에 누인 아기를 보고 불쌍히 여겨 이 아기를 키우기로 결심하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서의 이야기가 바로 이와 같은 공주의 결심을 지지하거나 미화하거나 다른 사람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공주와 같은 선택을 하도록 교훈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 분명하다. 이 본문을 아동의 입양, 혹은 아동의 해외입양을 뒷바라지 하는 본문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 본문에 대한 오독이며, 그런 점에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이자 오용에 다름이 아니다. 진정 신심이 깊은 이들이라면 이런 하나님의 말씀의 오독과 오용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혹자는, 그러면 공주가 모세를 발견하지 못하고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거두어 키우기로 하지 않았다면, 결국 모세는 죽음으로 내어 몰렸을 것 아니냐, 그러니, 공주의 모세 입양을 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 아니냐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 역시 견강부회에 지나지 않는다. 성서의 본문이 말하는 바는, 주류민족이 자기 사회 내부의 소수집단을 압제하고 인종말살로 몰고 가는 일은 옳지 않으며, 그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은 모세를 기적적으로 살려내시고, 그를 통해서 엄마의 모태로부터 출생하는 영아들을 살해하는 제국 이집트의 잔혹함을 심판하시고, 노예살이하던 히브리민족을 해방하고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이 본문은 입양하는 공주의 긍휼을 주장하고 있지 않다. 신자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제국의 공주의 비록 선하다고는 할 수 있으나 본능에 반응하는 얄팍한 긍휼을 따르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집트의 공주보다 무한히 크시고 의로우신 마음으로 가득하신 긍휼의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억압당하고 파괴되고 훼손되어 가는 사회 안에서 고통 받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에 그치는 분이 아니시고, 억압과 파괴와 훼손에 내어 몰린 사회를 해방하여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도록 재구성하시길 원하시고, 그 공동체 안에서 생모와 친자식이 생이별의 아픔을 격지 않아도 되도록 하시길 원하시며, 바로 그런 상황에서 모세와 같은 당신의 일꾼을 불러내시고 일을 맡기시는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거니와, 출애굽기 1, 2장의 모세 이야기는 해외입양이든 국내입양이든 입양을 지지하는 본문이 아니다.

한국의 해외입양 60년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가?

여기서 한국의 입양 이야기를 좀 하겠다. 우리나라는 6.25 직후부터 현재까지 약 20만 명의 아동을 해외로 입양 보낸 나라이고, 보건복지부 통계에 잡히는 국내입양도 10만에 육박하는 나라이다. 주지하는 대로 우리나라가 전통적으로 입양을 안 해온 것은 아니다. 자식이 없는 작은 아버지, 큰 아버지 혹은 친척 가정으로의 입양은 매우 상식적인 차원에서 실천되었다. 대를 잇는 일, 조상제사를 잇는 일이 결정적인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남아 입양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던 일이다. 최근에 논란이 된 박원순 서울 시장의 경우 심지어 자식이 없는 작은 할아버지에게 양자로 입적이 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해외입양으로 인해서 촉발된 서구적인 의미에서의 입양이 시작된 것은 6.25전쟁 이후이다. 전쟁고아들 특히 혼혈아동의 입양이 시작된 것이다. 문제는 6.25전쟁이라고 하는 비상상황에서의 아동복리의 긴급한 해결책으로 등장했던 해외입양이, 하나의 영구적인 아동복지제도로 이 땅에 자리잡아버린 것이다. 70대 초반 산업화 과정에 진입하면서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을 해외로 입양 보내는 산업고아의 시대가 전개되었고, 9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미혼모 아동의 해외입양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전쟁고아, 산업고아, 가부장제고아들이 자기가 태어난 땅으로부터 아동복리의 이름으로 적출되어 갔다. 그들은 혼혈아동, 극빈가정아동, 장애아동, 미혼모 아동들이었다. 사실 이런 요보호아동의 출현은 우리 사회 내부의 문제의 후과였으나, 우리는 문제를 고치려 하는 대신에, 문제의 결과인 아동을 해외로 입양 보내어 버림으로서 문제를 비가시화시켜 온 셈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를 살펴보자면,

첫째, 전쟁 혼혈 고아(War mixed-blooded Orphans)에 관한 문제이다. 우리가 혼혈아동들에게 따뜻한 환대의 삶의 자리를 제공하지 못했던 이유는 우리가 인종주의에 포박된 사회였기 때문이다. 인종주의의 문제 혹은 사회적 의식의 지평에 있어서 질병적 상황에 있었던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고치려하는 대신에, 혼혈아동과 친생모를 질병적인 존재로 바라보았고, 혼혈아동들을 해외로 입양 보내어 버림으로써 우리에게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던 나라였다. 이 시기의 대통령 이승만은 당시의 한반도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 명문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고의 지성인 중의 한 사람이었고, 미국은 물론 당시 미국에 비해서 선진국의 지위에 있었던 유럽을 오가며 나름 한국의 독립을 모색했던, 그런 점에서 국제적인 경험의 폭이 가장 넓은 사람 중의 하나였으며, 심지어 자신이 오스트리아 여성과 국제결혼 가정을 이루고 있는 사람이었다. 더구나 그는 기독인이었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가 내세운 것은 '일국일민주의'였고, 그의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가 혼혈아동의 해외 적출을 정당화해주었다. 그는 한국 사회 내부의 질병적 의식의 지평이라고 할 수 있었던 한국인의 인종차별주의를 고쳐서 혼혈아동도 이 땅에서 차별 없이 환대받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일에 실패했다.

물론 그의 실패는 바로 우리의 실패였다. 문제는 이 실패를 오늘의 시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반성하고 성찰하는가 하는 점으로 귀결되는 바, 혼혈인 입양에 대해서 우리가 보이는 반응이, '그 때 당신들이 입양 보내어진 일은 당신들에게 참 잘 된 일입니다. 우리는 그 때 인종차별이 심한 사회였기 때문에, 당신들이 이 땅에 살았었다고 하면 고생이 많았을 겁니다.'라는 것이라면 이는 올바른 성찰의 방식이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 때 우리가 우리 사회를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로 만들어서 당신들이 태어난 이 땅에서 당신의 생모와 헤어지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해드려야 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그 때 우리가 제대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그래서, 아직도 이 나라는 인종차별주의에 상당히 젖어 있는 사회인데, 우리가 좀 더 치열하게 노력하겠습니다. 이 한반도에 태어나는 모든 아동은 국적이나 혈통 혹은 인종에 상관없이 행복하게 자신의 삶을 가꾸어 갈 수 있는 차별 없는 사회로 우리 사회를 새롭게 만들어 가겠습니다.'라고. 이런 반성과 헌신에의 결단이 없는 대답은 변명과 정당화에 불과하며,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여전히 가해자로 남겠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또 다른 파라오로 살겠다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비록 겉모습으로는 기독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는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는 신앙인의 마음가짐은 결코 아니다.

둘째, 산업화 고아(Industrialization Orphans)에 관한 것이다. 60년 대 후반 무렵부터 더 이상 전쟁고아가 아닌, 양부모 혹은 편모슬하의 가난한 가정 아동들의 해외입양이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아동의 해외 송출체계로서 입양기관의 총체적인 구축과 발달에 긴밀하게 관련된다. 사실상 6.25 직후에는 고아들이 넘쳐 났지만 그 아동들이 다 해외입양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입양기관의 사업체계가 정교하게 구축되고 발달되었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산업화 과정에서의 재원배분의 우선순위와 깊은 관련을 가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농촌으로부터의 이주, 도시민민의 증가, 저곡가정책과 저임금노동정책 등등은 이 땅의 농촌과 소시의 수많은 극빈가정으로 하여금 친자식 양육을 포기하도록 강제했다. 산업화 이데올로기에 스스로를 세뇌했던 국가는 가족양육체계로부터 이탈된 아동을 위한 음식과 주거나 교육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사설 해외입양기관에 떠넘겼다. 결과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는 아동의 양육을 미국과 유럽의 가정들에게 부탁한 셈이 되었다.

결국 국가는 가난한 자국민의 가정해체를 방기하고, 해체가정의 아동양육책임을 외면하고, 나아가 사설 해외입양기관에 의해서 아동이 해외로 송출되는 체계를 섬세하게 발전시키고 지원함으로써 더 많은 달러화의 유입을 도모했고, 이 달러화는 산업화의 유용한 수단이 되었다. 산업화이데올로기의 탐욕적 추구로 재벌은 성장하고 외형적 경제는 좋아졌지만 결국 이 땅의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자기 가족 중의 하나를 해외로 입양 보내야 하는 슬픔에 연루되도록 했고, 이들은 지금도 이를 가족의 실패라는 비밀을 안고 살고 있는 사회가 된 것이다. 입양인 작가 제인 정 트렌카는 특별히 자기 친생자녀를 해외로 입양을 보낸, 이 땅의 친생모들은 이 결별의 트라우마 안에서 사회적 죽음(social death)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셋째, 가부장제 고아(Patriarchy Orphans) 이다. 가부장제적 가치가 해외입양의 문제와 깊이 관련된 것은 비단 90년대 후반의 일은 아니다. 가부장제란 결국 한반도 내부의 남성권력의 관철방식과 깊이 관련된다. 이 땅의 여성들이 6.25와 그 이후 계속된 미군의 주둔과 맞물려, 혼혈아동을 출산해 왔고, 이 혼혈아동의 해외적출을 통한 비가시화 역시 이 땅의 남성권력의 실패를 은폐하는 한 방식이었다고 할 것이다. 민족주의와 맞물린 가부장제적 남성권력에게는 이 땅 여성이 하나의 영토적 개념으로 편성되어 있는 바, 혼혈아동의 출생은 혼혈아동을 출산한 여성의 실패로 간주된 동시에, 이 땅의 남성, 남성중심주의에 의해 편제된 가족 혹은 대가족 나아가 마을 공동체의 수치로 여겨졌다. 이 수치를 불러일으키는 태반(胎盤)이 바로 민족주의와 맞물린 가부장제적 의식세계라고 할 것이다. 또한 산업화 시대 역시 극빈가정, 편모가정, 혼외가정의 자식들이 해외입양에 가장 중심적으로 노출된 그룹인 바, 산업화시대의 해외입양에도 역시 가부장제적 가치의 야만성과 폭력성이 작동했다고 할 것이다.

해외입양 혹은 심지어 국내입양에 관련하여 가부장제적 남성권력의 폭력성이 극명하게 그 정체를 드러내는 시기는 9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보건복지부의 통계에 의하면 90년대와 2000년대 20년 동안 해외입양이든 국내입양이든 입양아동의 90%가 미혼모의 자녀들이다. 가부장제적 남성권력에게 있어서 미혼모의 가시적 출현은 실패의 노정이자 위장이 불가능한 수치이며, 은폐를 스스로 강제해야만 하는 위기이다. 자기 낳은 아이를 입양 보냄을 통해서 미혼모는 가부장제적 가체체계에 합당한, 그래서 외견상 소위 정숙한 여성으로 거듭나지만, 동시에 자기 자궁에서 자란 어린 생명과의 분리가 가져다 준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으로 일생을 고통하는 분열적 자아를 지닌 존재가 된다.

모세의 이야기의 빛 아래 있는 기독교는 해외입양이든 국내입양이든 입양의 지지자가 되기 어렵다. 입양은 어디까지나 입양 이전 단계의 문제의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입양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차원에서는 친생가족 간의 결별(separation)이며, 국제사회적 차원에서는 그 사회를 기득권 체제로 유지하고자 하는 강자들에 의한 배제와 박탈의 이데올로기에 따른 사회적 약자에 대한 조직적 격리(segregation)를 토대로 하고 시작되는 '모순을 안고 있는 긍휼과 사랑'에 다름이 아니다. 동시에 이는 시혜적이며 구원자적 환상을 존재의 영양가와 의미로 삼는 자들의 사려 결핍에 기초한 절름발이 '자선적 행동'에 불과한 것이다.

인종주의를 무너뜨리는 일을 통해서, 산업화의 깃발 아래에서 주변으로 내몰렸던 농민과 노동자의 삶을 옹호하는 일을 통해서, 나아가 자본주의체제의 이익 추구와 남성권력의 강화에 복무해온 가부장제의 잔혹한 작동을 해체시키는 일을 통해서, 혼혈아동도 극빈가정아동도 미혼모아동도 이 땅을 떠나지 않고 친생부모의 품에서 따뜻한 삶의 둥지를 틀 수 있도록 우리 사회를 재구성하는 일에 진력하는 일에는 미련했고, '자선적 행동'의 깃발을 높이 들고 흔드는 일에만 민활했던 기독교인들의 미천함이 드러나는 삶의 영역이 바로 아동입양의 영역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WASP 미국인 보아스 박사 이야기

이 지점에서 미국인으로서 한국 여아를 입양해서 키운 리챠드 보아스(Richard Boas)박사 이야기를 좀 하겠다. 보아스박사는 미국 코네티컷주에서 안과의사로 일하다가 수년전 은퇴를 했다. 명망 높은 안과의사요, 상당한 재력가이자 프로테스탄트 기독인이였던 이 분이 65세에 은퇴를 하고 처음 시작한 일이, 재단을 설립해서 미국의 가난한 백인가정의 사람들이 한국 아동을 입양해서 키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자신이 한국의 여아를 입양해 키우면서 누렸던 행복을 다른 사람들도 누리게 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미국의 가난한 가정들이 3만불 내외에 달하는 입양수수료를 마련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이들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해서 아동을 입양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생각만해도 그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 사업을 펼치기 위해 수년 전 한국을 방문했고, 특별히 입양기관이 운영하는 대구의 한 미혼모의 집에 들어서서 몇 분을 지내는 동안 그는 깊은 충격에 사로잡혔다. 미국의 입양부모가 한국 아동의 해외입양에 관심이 있어서 찾아왔다고 해서, 그 미혼모 시설에 있던 미혼모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였다. 보아스박사에게 이 젊은 여성들이 느끼고 있는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 중 몇몇은 입양으로 아이와 결별로 인해 절절한 애통 아래 놓인 이들이었고, 몇몇은 출산 후 입양 보낼 요량으로 배가 산만했고, 그 마음에 깃든 혼란과 자괴감은 바다처럼 깊은 듯 했다. 말없이 그들 앞에 서 있던 보아스 박사는 자신의 딸을 입양 보낸 한국의 친생모도 이 젊은 여성들처럼 고통했으리라는 마음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윽고 그는 이 생결별의 슬픔 대신 이들이 스스로 자기 아이들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자신과 자신이 설립한 재단이 헌신하는 것이 옳다는 영감에 따른 결심과 함께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설립한 재단의 정관을 고쳐서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를 설립했다. 그의 재단 출연금은 한국의 여성재단으로 여성정책연구소로 한국미혼모가족협회로 흘러들어왔고, 한국사회의 미혼모운동이 그 처음 길을 개척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보아스 박사는 2백 년 동안 미국 주류 사회의 가치 전범으로 작동해온 전형적인 백인 엥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White Anglo-Saxon Protestant/WASP)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자신의 백인성의 든든한 토대와 개인적인 한국 아동 입양에 대한 긍정적이고 행복한 경험을 뛰어 넘어 한국의 미혼모권리운동에 충직하게 참여하고 있다.

그는 성서의 담화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이름이 보아스(Boas)인 것을. 그리고 성서의 보아스가 자연재해와 절대빈곤을 피해 인종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 베들레헴 땅으로 피난 온 이방여성 나오미를 따뜻하게 맞았던 것을. 그리고 그와 같은 보아스의 삶 안에 복음의 맹아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가부장제의 남성권력의 관철과정에서 미혼모들에게 가혹한 차별과 낙인을 가하고 있는 일을 미처 회개하기도 전에, 아니 차별과 낙인 아래에서 신음하는 미혼모들을 외면하고 그들에게서 출생한 아동들을 입양해야 한다고 요란한 소리를 높이는 천박한 기독교에 갇혀 있는 동안에, 그는 자신의 가치이자 심지어 한국의 기독교가 부지불식간에 내재화하고 있는 백인엥글로색슨프로테스탄트(WASP)의 유산과 가치체계를 훌훌 벗어 던지고 국제간 아동 입양의 배후에 깃든 가혹한 친생모와 아동의 결별(separation)과 아동복리의 이름으로 실천되고 있는 국제간의 인종적 문화적 재배치에 따르는 격리조치(segregation)의 가혹함에 대해서 발언하고 있다.

한국의 입양은 종종 아동 복리의 이름으로 선양되고 찬양되어 왔지만, 오히려 전쟁의 폭력과 산업화 주체의 탐욕과 가부장제적 가치의 단맛에 취한 한국의 남성중심주의 권력 아래에서 신음하는 여성들과 그 친생자녀들에 대한 폭력으로 읽혀질 수 있어야 한다. 잠시 꼽사리로 끼워서 하는 말이지만, 임신 중인 어머니에게 입양의 동의를 강요하는 시스템을 지난 60년간 우리는 성찰 없이 입양의 이름으로 고이 간직해온 사회이다. 남성 목사로서 혹시 이런 발언이 조심스럽긴 하나, 이것이야말로 소위 말하는 자궁에 대한 폭력이 아닐까? 입양은 친생모의 부모권, 양육권에 대한 침해에 기초해서 성립 가능한 아동복지이다. 호주의 여성 에벨린 로빈슨은 그 자신 자신의 아이를 입양 보낸 엄마이자, 현재 친생모 양육권 운동을 펼치고 있는 시민운동가이다. 그녀가 수년 전 출판한 저서의 제목이 입양 결별(Adoption Separation)이다. 필자는 여기서 한 술 더 뜨고 싶다: 입양 격리(Adoption Segregation). 입양 특히 해외입양은 격리적 아동 재배치이다. 친생가족과 출생사회로부터 아동을 격리해서 인종과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회로 재배치하는 일은 해외입양이 비록 아동 구원이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상 아동학대를 수반하는 시스템이며, 자기 사회 내부의 약자에 대한 차별적 격리(Segregation)의 한 방식에 다름이 아니다.

요셉은 어떻게 했나?

그러면 성서의 또 다른 한 담화, 요셉과 마리아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입양에 관하여 어떤 영감을 주는지를 살펴보자. 주지하는 대로, 마태복음 1, 2장과 누가복음 1, 2장은 예수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예수의 출생에 얽힌 온갖 사건들과 이야기들, 그리고 그 가운데로 개입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어 준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입양 혹은 아동권리라는 관점에 비춘 본문 읽기를 시도해 보자.

구약의 전통과 가르침이 펄펄하게 살아 있었던, 옛 갈릴리 땅 한 마을에 요셉이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아직 결혼식을 올리거나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사실상 결혼에 버금하는 틀 안에서 마리아라는 여성과 사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는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경악! 배신! 사랑하는 연인이 다른 이의 아기를 가지다니!

마태복음은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연인으로서 연인의 배신에 대해서 질투하고 분노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대신, 요셉이 이 사실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하게 수습하기로 했다고 말해주고 있다. 미혼모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그 동네에서 명예살인에 내어 몰리는 일이 없도록 조치하기로 한 것이다. 아마도 먼 도시로 보내서 몰래 아기를 출산하게 하고,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해서 돌아오도록 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일을 다 알고도 결혼을 할 수는 없으니 결혼에 관한 약속만은 폐기하기로 한 것. 이것이 요셉이 선택한 길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와 같은 요셉의 결단과 선택만으로도 우리는 요셉이 구약의 가르침을 뛰어넘는 사람, 인간애에 기초해서 시대정신을 새롭게 열어가는 사람, 그래서 마태복음이 말하는 대로 그 인격 깊은 곳에 의로운 덕망이 깃든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1950년대까지의 미국과 유럽 사회에서도 또 우리나라에서는 현재까지도 종종 그렇게 하고 있다. 미혼의 여성이 임신을 하면, 다른 도시로 가서 조용히 몸을 숨기고 지내다가, 달이 차서 출산하면 아기를 입양 보낸 후, 다시 자기 살던 곳으로 돌아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자신의 생의 길을 가도록 한다. 이것이 조용하게 수습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명예살인에 내몰려 여인과 태중의 아이의 생명이 해침당하는 일에 비하면, 비견할 수 없는 풍부한 인간성에 기초한 인본주의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책이다. 그러나 이런 삶의 방식 안에는 생모와 그 자녀의 결별이라고 하는 일생을 가름하는 상처를 남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상황에 내어 몰린 마리아와 그 태중의 아기를 염려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의로운 요셉을 감동시켜 당신의 길을 보여주셨다. 임신한 마리아를 데리고 와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살라는 것이다. 엄마와 태중의 아이가 결별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덕에, 그리고 자기의 의로움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하나님의 깨우침을 받아들인 요셉 덕분에 아기 예수는 생모와 헤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아기 예수는 의로운 요셉 덕분에 명예살인으로 인해 찾아들 태중 죽음을 맞지 않았고 조용한 수습 대신 마리아와의 결혼을 요구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생모의 가정 안에서 자신의 생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었다. 구약의 율법이 결혼 밖에서 태어난 아동에 대한 제노사이드(genocide)법이었으나, 이 인종말살로부터 그는 살아남았다. 그러나 아기 예수에게는 한 번 더 위기가 찾아왔다. 아기 예수는 베들레헴 인근에서 태어난 두 살 아래의 남아는 다 죽이라는 권력광 헤롯의 아동 학살 명령 아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자기 핏줄이 아닌 아들 아기 예수를 안고 요셉은 이집트로 향하는 먼 길 위에서 난민으로 살아야 했다. 그 후 갈릴리로 돌아온 예수의 아버지 요셉은 일찍 죽었고 한 때 미혼모였던 마리아는 싱글맘이 되어 예수와 그 동생들을 홀로 키우는 여인으로 살아야 했다.

미혼모의 품에서 생명의 씨앗을 틔운 예수는 명예살인의 위기와 아동학살의 위기를 넘겼다. 그는 죽음 아래 놓였으나 요셉과 요셉에게 영감을 주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죽지도 입양 보내지지도 않았고, 결국 친생모와 함께 일생의 길을 함께 걸을 수 있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의 이야기 안에, 그들이 살아간 삶의 여정의 편린 안에 하나님의 마음과 구원의 경륜이 새겨져 있다. 엄혹한 구약종교의 비인간성을 타파하고 사람과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애가 깃든 생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태중의 아기로부터 하나님의 자애를 입고 삶의 여정을 시작했던 그의 삶은 결국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지가 되었다.

국제간의 아동입양, 서구 근대가 고안한 부작용이 큰 아동복지프로그램

부작용(side effect)이 큰 약은 섭취에 매우 조심할 필요가 있다. 6.25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긴급재난구호로 시작된 국제간의 아동입양은 제 3세계에 대해 우월적 지위에 젖은 서구 근대의 구원자적 환상(Savior's Fantasy)에 기반을 두고 시작되었다. 한국에서의 성공적인 모델은 이후 미주대륙과 유럽대륙을 한 편으로 하고 그 나머지 대륙과 국가에 속한 아동들의 국제적인 이동을 촉진시키는 발판이 되었고, 지난 60년 간 국제적인 아동입양산업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유엔아동권리협약과 국제간의 아동입양에 관련한 헤이그협약은 아동의 친생가족보호가 최우선이며, 이를 위해 국가와 공동체는 최우선적인 노력을 경주해야 함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한국의 기독교 목사들과 기독교적 메시지의 아이콘들은 남의 아이를 나의 가슴으로 낳은 사랑을 설파하고 있다. 그 사랑을 실천하는 동안 자기 자궁에서 자라고 출생한 생명과의 결별을 겪은 여성들은 원초적 상처(primal wound)를 안고 살아간다. 엄마의 품을 떠난 아동들은 일생동안 애착부적응(adjustment disorder)에 시달린다. 모세의 이야기에서도, 요셉과 마리아의 이야기에서도 하나님이 아동의 결별(separation)과 격리(segregation)를 지지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없다. 아니 그 반대의 길 안에 구원과 복음의 길이 나있음을 볼 뿐이다. 예수의 복음은 '비상상황이 아니라면' 우리 사회를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도록 재구성해서 이 여성들과 아동들이 결별(separation)과 격리(segregation)의 고통을 겪지 않고 자연스럽게 친생가족과 친생사회의 생태체계 안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라고 영감을 주고 있다. 필자가 기독교인들 특히 목사들이 나서서 복음의 이름으로 아동 입양을 외치는 일이 불편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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