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한미 FTA 개정협상의 세 가지 특징

[좋은나라 이슈페이퍼] 한미 FTA 개정협상의 특징과 과제

2018년 4월 27일. 분단의 상징 판문점에서 이뤄진 남북정상회담은 훗날 21세기의 새로운 국제질서의 서막으로 세계사에 기록될지 모른다. 조만간 있을 북미정상회담을 앞둔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의 이목이 한반도에 쏠려 있다. 그러나 이것이 당면한 여타 국내 현안을 집어 삼키는 블랙홀이 되어선 곤란하다. 그 중 하나가 한미 FTA 개정협상이다. 물론 이것도 목하 한반도의 격류와 무관하지 않으나 한국경제에 미칠 파장이 적지 않은 것이라 관심 갖지 않을 수 없다.

한미 양국의 통상당국은 2018년 3월 28일 한미FTA 개정협상(이하 개정협상)의 ‘원칙적 합의(agreement in principle)’에 이르렀다는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이제 양국은 각기 정해진 국내절차만 남겨 둔 상태다.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아직 세세한 협정문안도 공개되지 않은 현 단계에서 협상결과에 대한 본격적인 평가는 이른 감이 있다. 다만 미국의 일방적 요구(개정협상의 추진계기), TPA 부재로 한정된 협상범위(협상범위) 그리고 속전속결(협상기간)이라는 세 가지 특징을 눈여겨보면 개정협상의 구조적 제약조건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이에 이번 개정협상의 세 가지 특징을 살피고 그것에 강하게 규정받는 평가결과를 개괄한 뒤 협정문 공개 이후 본격적인 평가 시 물어야 할 질문을 과제 형식으로 던져본다. (필자)

한미 FTA 개정협상의 세 가지 특징

첫째는 개정협상의 추진계기다. 이번 개정협상은 이론의 여지없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일방적인 요구로 시작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협상이었다. 트럼프는 한미 FTA가 미국의 상품분야 대한무역적자 확대(2012년 132억 달러 → 2017년 229억 달러)를 초래한 “끔찍한 협상”이라며 한미 FTA 폐기 협박을 마다하지 않았다. 상대가 세계 1위 경제대국이자 패권국이며 우리가 안보를 의존하고 있는 나라이기에 가능한 얘기다. 트럼프는 한미 FTA와 별개인 철강규제와 환율정책을 지렛대로 판을 흔들었고 우리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당했다.

둘째는 TPA 부재에 따른 좁은 협상범위다. 미국측이 2007년 한미 FTA 체결 때와 달리 개정협상을 무역촉진권한(TPA) 없이 추진했다는 점은 개정협상의 구조적 제약조건이기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미측의 개정범위가 자국 의회의 협정문 개정이 수반되는 분야는 사실상 배제되고 양허일정이나 원산지규정의 ‘미미한 변화(narrow change)’로 국한되었다는 점을 뜻한다. 이들이 이번 협상을 ‘수정(modifications) 및 개정(amendments)’ 협상으로 규정한 연유가 여기에 있다. 그로 인해 양국은 앞으로 기술적 합의, 문안 확정, 법률 검토라는 공통된 절차를 거치나 이후는 확연히 달라진다. 한국은 통상절차법 11조에 따라 영향평가를 한 뒤 국회 비준동의가 필요한 반면, 미국측은 국제무역위원회(USITC)의 검토 뒤 의회에서 60일간 협의를 하되 비준동의는 필요 없다.

미국이 TPA 없이 중요 FTA 개정에 나선 것은 1934년 이래 처음이다. 의회전문지 Law360는 그 이유를 미 행정부가 한국 측에 관련된 분야만 개정을 요구하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TPA에 기반해 협정문을 개정해봐야 대한 무역적자 축소효과를 얻기 어려울 것이란 계산도 깔린 듯하다. TPA 시한인 2018년 7월 1일 전에 NAFTA와 한미 FTA의 동시추진은 버거워 후자의 속전속결을 원했을 수도 있다. 그 이유가 뭐든, 중요한 점은 미국이 TPA 없이 협정을 시작한 이상 유의미한 협정문 개정은 힘들었다는 것이다.

TPA(Trade Promotion Authority, 무역촉진권한)란 무엇인가?

미국에서 대외무역의 관세율 제정권은 본래 의회의 고유 권한이다. 그러나 1934년 미 행정부에 이를 한시적으로 위임한 호혜무역협정법(Reciprocal Trade Agreement Act of 1934) 발효 이래 의회 권한은 행정부의 협상결과에 수반한 국내 법제도 개정 즉 이행법 분야로 옮겨간다. 나아가 의회는 보다 신속한 무역협상 추진을 위해 행정부의 협상과정에서는 상호 협의하되 협상결과는 수정 없이 비준 여부만 정하는 ‘신속협상권(Fast Track Authority)’ 도입을 골자로 하는 무역법(Trade Act of 1974)을 1975년 1월 1일 발효시킨다. 그 결과 관세협정 체결 및 이행 권한은 대통령령만으로도 가능하게 되었고 2002년 ‘TPA(무역촉진권한)’으로 개명되었다. 현 TPA는 2015년 연장된 것으로 2018년 7월 1일 만료된다. - 자료: 김양희(2018. 1. 17), 미궁 속 한미 FTA 개정협상의 미국 내 절차 한겨레
셋째, 속전속결로 처리된 협상이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개정협상을 앞두고 우리도 전면개정이나 폐기가 가능하다고 배수진을 쳐 협상의 난항이 예고됐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2018년 1월 5일 1차 협상 이후 본격적인 밀고 당기기가 시작된 2차(1. 31~2. 1)에서 3차(3. 15~16)에 이르기까지 불과 50일도 못되는 기간에 양측은 타결을 선언했다. 그 배경으로 정부는 협상범위 최소화 전략을 꼽으며 개정협상 장기화에 따른 불확실성을 제거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측 협상 전략은, 미측이 우리와 관련된 협정문 개정이 필요한 요구를 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미측 관련 개정이 필요한 요구를 발굴·제시하여 미측의 우리측 개정범위의 축소 및 완화를 유도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협상범위 축소전략으로 신속히 끝냈다는 정부의 자화자찬이 혹시 협상범위 확대(TPA 필요)를 통해야 가능한 우리 요구사항은 결국 배제시켰다는 고백이 아닐까.

위 세 가지 특징을 종합하면, 이번 개정협상은 미국의 일방적 요구로 시작(협상 계기)해, 미국의 TPA 부재로 한정된 범위 내(협상 범위)에서, 신속타결(협상 기간)된 것으로 요약된다.
협상 결과 보도자료에서 정부는 농축산물시장 추가개방, 미국산 자동차부품 의무사용 등 핵심 민감분야(red-line)에서 우리 입장을 관철시켰고, 명분을 주고 실리를 확보했다고 자평했다. 그런데 보도자료 액면 그대로 주는 인상은, 우리가 아닌 미측 관심 사항부터 매우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반면 우리측 관심사항은 단 한 문장에 불과한 원론적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인상비평이 정부 평가와 상치되는 것인지 실은 위 세 가지 특징이 평가결과에 투영된 결과인지 궁금해진다. 이하에서 살펴보자.

한미 FTA 개정협상 결과
(1) 미국의 관심사항

미측은 자국의 현행 화물자동차(픽업)의 관세 25%의 철폐 기간을 발효 10년차(2021년)에서 20년차(2041년)로 연장했다. 한국의 자동차 관련 안전/환경규제는 대한수출에 용이하게 바꿨다. 기실 미국의 대한 자동차 수출확대를 위한 집요한 요구는 199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측은 같은 이유로 2011년 한미 FTA 발효 때 배기량 기준 세제(협정문 2.2조)와 일반적 예외(제23장)를 근거로 국내 자동차세제 중 지방세법 127조(세율구간 및 세율 변경)와 개별소비세법 1조(과세체계 단순화) 개정에 성공했다. 그런데도 대한무역적자가 줄지 않자 이번엔 미국 픽업시장 개방 시기를 늦추고 안전/환경기준의 추가 완화를 관철시켰다.

한미 FTA 개정협상 결과

< 미국측 관심사항 >
□ (자동차) 화물자동차(픽업) 관세철폐기간 연장, 자동차 안전/환경 기준 완화
ㅇ 미측 화물자동차의 관세철폐 기간: 10년차 철폐(‘21년 철폐) -> 20년(’41년 철폐) 연장
ㅇ 안전기준: 제작사별 연 5만대(현 2.5만대)까지 미 기준 준수 시, 한국기준 준수로 간주
- 미국산 수입차량에 장착되는 수리용 부품에 대해 미국기준 인정*
* 자동차관리법 자기인증조항(30조의 2)을 근거로 旣인정하고 있음
ㅇ연비/온실가스: 현행기준(‘16-’20) 유지, 차기기준(‘21-’25) 설정시 미 기준 및 제작사 고려
- 친환경 기술개발 인센티브인 에코이노베이션 크레딧 인정 상한 확대
ㅇ 배출가스: 휘발유 차량에 대한 세부 시험절차/방식을 미 규정과 조화
* 한미 FTA에 따라 휘발유차량 배출가스 기준은 미측과 기 조화
□ (이행이슈) 글로벌 혁신신약 약가제도, 원산지검증 관련 한미 FTA에 합치되는 방식으로의 제도 개선/보완에 합의

< 한국측 관심사항 >
□ ISDS: 투자자 남소방지 및 정부의 정당한 정책권한 관련 요소 반영, 무역구제: 관련 절차적 투명성 확보, 섬유: 일부 원료품목에 대한 원산지 기준 협정문 개정

- 자료: 산업통상자원부(2018. 3. 28) “한미 FTA 개정협상, 원칙적 합의 도출 – 협상범위 최소화로 신속히 타결 -”
환경기준 완화와 관련해 또 다른 대미무역흑자국 일본의 대응이 주목할 만하다. 일본도 TPP 협상 당시 미국으로부터 우리와 유사한 요구를 받았으나 일본은 자국과 동등한 기준 이상의 미국기준만 일본기준으로 간주하되 그 판단은 일본이 하기로 했다. 우리가 한미 FTA 발효 당시 국내 판단기준과 무관하게 25,000대까지 미국기준을 인정하기로 했는데 이번에 더 완화한 것과 대조적이다. 그러니 일본 자동차업계는 미국이 한국에 요구한 것과 동일한 기준을 일본에도 요구할까 우려하고 있다. 한편 2017년 현재 미국의 대한 자동차 수출대수가 10,000대(15억 달러, 대한수입 157억 달러)도 못되는 상황에서 이번 추가완화는 상징적일 뿐이라는 헤리티지 재단 보고서의 지적도 있다. 따라서 시장개방의 1차적 효과인 소비자후생 증감 여부, 국민의 생명안전권과 환경권 악화라는 외부경제 발생 여부, 국내 기업의 미국 픽업시장 수출 지연 혹은 대미투자로 인한 국내 생산 및 고용 감소 효과 등등에 대해 국제비교도 포함한 다각적이고 엄정한 평가가 요청된다.

정부 자료에는 상세 설명이 없어 논의가 어려우나 필히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분야가 글로벌 혁신 신약의 약가제도에 관한 것이다. 이는 한미 FTA 체결 당시에도 국민의 건강권과 건강보험 재정에 미칠 영향에 대한 우려로 지대한 논쟁이 일었던 분야 중 하나다. 이번 협상결과 건강보험 재정의 추가적 부담이 우려되는 만큼 꼼꼼한 평가가 필요하다.

(1) 한국의 관심사항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로 국내기업의 피해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우리측의 당면한 협상목표는 무엇보다 무역구제 남용 방지였다. 트럼프 이후 조사개시/규제 건수(10건)는 이전 누적건수(30)의 1/3에 달해 트럼프의 보호무역주의 남용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정작 정부 보도자료에는 무역구제의 “관련 절차적 투명성 확보”를 위한 개정을 한다는 것 이상의 구체적인 정보가 없다. 백악관 보도자료나 헤리티지 재단 보고서도 이와 관련한 언급이 일절 없다. 후자는 오히려 미 정부가 개정협상 개시 전 의회와 협의해야 하나 TPA 부재로 (의회를 배제한 채) 한미FTA공동위원회에서 협상했기 때문에 개정협상 개시 승인을 위한 의회 표결이 없었고, 미 이행법 개정도 화물자동차의 관세철폐일정 연장 관련법 개정 외에는 거의 불필요하다고 지적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TPA 없이 추진한 개정협상에서 정부가 주장하는 협정문 개정이 가능했는지, 그것이 작금의 미국의 보호무역조치 남발을 제어할 메카니즘인지 물어야 한다.

투자자-국가분쟁중재(ISDS) 메카니즘에 대해서도 정부 보도자료에 “투자자 남소방지 및 정부의 정당한 정책권한 관련 요소 반영”을 위한 개정이라고 적시되어 있는 게 전부다. 기존의 양자 FTA나 투자협정(BIT)에 포함된 ISDS에 비해 한미 FTA의 그것은 체결 당시부터 그 위험성에 대한 강한 반발을 반영해 진일보한 것이다. 즉 한미 FTA 협정문 11.20조5항 및 11.20조3항, 11.21조에 근거해 중재절차의 투명성을 높이고 부속서 11-나에서는 간접수용의 정의와 판단법리를 명확히 규정해 공공정책주권의 운신 폭을 넓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국내와 유엔국제무역위원회(UNCITRAL), EU에서 ISDS의 정책주권 침해 우려, 절차적 불투명성, 단심제 등 소위 독소조항의 개선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반영해 이번 개정협상 시에도 ISDS는 무역구제와 더불어 우리의 양대 관심사였다.

이 글을 쓰고 있던 2018년 4월 13일 공교롭게도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한국정부의 부당한 개입으로 손해를 봤다며 ISDS 중재의향서를 법무부에 제출했다. 이 사안의 파장이 만만치 않을 듯하다. 이제는 양자 BIT가 아닌, 투명성을 높였다고 하는 한미 FTA의 ISDS도 외국 투자자의 과녁에서 비껴갈 수 없음을 환기시켰기 때문이다. 보다 현실적으로는 2007년부터 우려가 컸던 ‘대우의 최소기준(11.5조)’ 위반 등을 주장하는 엘리엇에 대항해 이번 ISDS 개선조치가 정부 정책주권의 방패막이 될지 가늠할 리트머스 실험지가 됐기 때문이다. 또 소위 ‘포럼 쇼핑(Forum shopping)’ 문제에 기인하는 ISDS 개선조치의 실효성도 물어야 한다. 외국 투자자의 재판관할권이 여러 나라에 있을 경우 이 중 유리한 것을 골라 재판하는 것을 ‘포럼 쇼핑’이라고 한다. 이는 미국계 기업 론스타가 한미 FTA가 아닌 한-벨기에 BIT를 통해 한국 정부를 중재에 회부한 것에서도 잘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사실상 미국이 강력히 반대하지도 않았던 ISDS 개선과 자동차 분야 양보가 합당한 등가교환이었는지도 물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명분을 주고 실리를 얻었다는 우리 정부 주장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드러나는 건 아닐까. 우리측 관심사인 무역구제, ISDS 관련 개정은 미 의회 승인이 불가피한데 TPA 없이 진행된 개정협상에서 과연 국제법적 구속력을 지닌 협정문 및 미국법 개정이 가능한가? 또한 미국의 요구가 관철된 결과 대미무역흑자는 줄어들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미국은 다시 개정협상을 요구할까? 결국 ‘기울어진 운동장’을 벗어날 수 있는지 근본적인 질문에 다다르게 된다.

남은 과제 - ‘기울어진 운동장’ 벗어나기

이번 개정협상에서 한미 FTA는 미국의 부당한 요구를 막아주는 방패막이 역할은커녕 마냥 무기력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2004년 수립된 한국의 FTA 정책이라 할 수 있는 ‘FTA 추진 로드맵’은 FTA에 따른 수출시장 선점효과 최대화를 위해 거대경제권과의 FTA를 중시했다. 그 정점에 위치한 것이 한미 FTA이다. 하지만 이 추진논리는 거대경제권과의 FTA 체결의 사후적 효과에 가려진 협상 테이블에서의 취약한 협상력을 간과한다. 우리의 비대칭적인 대미 협상력은 2007년 협상 개시 때도, 재협상 때도 확인되었다. 마찬가지 이치로 세계 제2의 슈퍼 파워 중국과의 FTA도 협상결과를 둘러싼 논란이 제기됐고 발효 후 혹독한 사드보복에도 한중 FTA는 무기력했다. 거대경제권과의 FTA가 지닌 근원적인 한계가 노정된 것이다. 미국의 경우 한국이 안보를 의존하고 있다보니 더욱 협상력은 취약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우리측 협상수장의 상대측 ‘협정폐기 불사’에 맞불을 놓은 ‘우리도 불사’라는 패기는 감히 한미동맹에 대한 불경죄로 해석되고 말았다. 이러한 FTA 정책의 한계를 어떻게 궤도 수정해야 할까.

어찌 보면 글로벌 패자(霸者)와의 개정협상에서 양허의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이상과, 우리가 뭔가 내줘야만 끝나는 게임이라는 불편한 진실의 간극을 멀었다. 우리 협상목표가 최선은 물 건너가고 차선 아니면 차악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작금의 협상결과를 정당화시켜선 안 된다. 앞으로도 무수한 대미협상이 남아 있기에 ‘기울어진 운동장’을 최대한 평평하게 바로잡기 위한 협상전략을 강구했는지 물어야 한다.

속전속결로 개정협상을 마친 배경에 대해 정부는 “협상범위 최소화로 신속히 협상을 타결”했기 때문이라며 그에 따라 “개정협상 장기화에 따른 불확실성을 제거”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신속타결의 이면에는 역사적 전환기를 맞은 한반도에서 어느 때보다 한미동맹 강화와 긴밀한 대북공조 필요성이 작동했을지 모른다. 애초 TPA가 없는 상황에서 대폭개정은 협상 장기화로 이어질 개연성이 크다. 그럼에도, 신속타결 배경이 우리의 탁월한 개정범위 축소전략 덕분인지, 사실상 개정 의도도 가능성도 없는 미국이 우리와 관련된 개정만 요구했는데도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마다하기 힘들었기 때문은 아닌지 묻고 싶다.

미국이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해 안보상의 이유로 안보동맹국산 철강 수입품에 고관세를 부과하려고 하자 한국은 완전면제를 받는 대가로 한국산 철강재의 대미수출을 15~17년간 평균 수출량(383만 톤)의 70%(268만 톤)에 해당하는 쿼터(17년 대미수출 362만 톤 대비 74% 수준)를 설정했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엄밀하게는 이와 무관한 개정협상에서 반대급부를 내줬다. 따라서 먼저 WTO가 금지하는 수출자율규제(Voluntary Export Restraints, VERs)의 일종인 철강쿼터(철강 TRQ도 아닌)를 수용한 것이 WTO 규범 위반소지가 없는지 점검해야 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WTO 제소는 불가능했는가 하는 것이다. WTO 틀 내에서 미국에 위축효과를 주는 국제공조로 다자주의 복원에 노력하는 것은 마냥 비현실적인 얘기일까. 트럼프의 보호주의는 예측가능성과 투명성을 떨어뜨리고 국제질서를 훼손시킬 뿐 아니라 글로벌 밸류 체인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미국에도 이롭지 못하다.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은 어떨까. TPP에 미국과 함께 가입해 미국의 영향력을 TPP 내에서 공동견제하는 건 불가능할까. TPP 가입 후 회원국 간의 양자 FTA는 점진적으로 해체시키면 우리의 대미 협상력은 지금보다 커질 수 있지 않을까. 더 멀리는 ‘평화, 새로운 시작’을 남북경제통합으로 맺는다면 기울어진 운동장은 지금보다야 평평해지지 않을까. 단, 이 여정은 우리 모두 가보지 않은 길이니 그리로 인도하는 나침반부터 철저히 새로이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어차피 아무도 가지 않을 길을 가야 한다면 발칙한 상상의 나래를 맘껏 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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