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국이 중동의 지옥문을 연다

[김재명의 '월드 포커스'] 트럼프의 친이스라엘 일방주의 노골화 셈법은?

이스라엘 제1 도시는 인구 90만 명의 예루살렘이고 제2도시는 지중해변에 위치한 인구 40만 명의 '텔아비브'다.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인 예루살렘과 텔아비브를 견줄 때 유대인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텔아비브에선 놀고(play) 예루살렘에선 기도한다(pray)." 우리 인간이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임을 잘 보여주는 곳이 텔아비브이다.

예루살렘과 텔아비브의 차이

예루살렘의 밤이 어두운 편이라면 텔아비브의 밤은 다르다. 중동의 라스베가스라는 이름을 얻을 정도로 온갖 유흥으로 흥청대는 환락의 도시다. 술집이나 나이트클럽의 네온사인이 곳곳에서 빛난다. 이른바 물 좋다고 입소문 난 클럽들은 발 디딜 틈이 없다. 동성애자들만 모이는 클럽들도 여러 개 성업 중이다. 대마초도 쉽게 구할 수 있고 '에스콧'이란 이름 아래 성매매 남녀도 득실댄다. 텔아비브 환락가의 시계는 밤 12시에서 멈추지 않는다. 밤이 깊어갈수록 귀청을 울리는 락 음악의 주파수는 더 높아진다.

예루살렘에서 텔아비브의 열기나 환락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어딜 가나 나이트클럽이 흔한 텔아비브와는 달리, 신시가지를 찾아가야 있고 은밀하기까지 하다. 마니아들이 알아서 가는 곳이지, 지나가다가 기웃거릴만한 곳이 아니다. 한마디로 노는 물도 다르다. 텔아비브가 노는 데 거칠 것이 없다면, 예루살렘에선 내 돈 내고 노는데도 어딘지 눈치를 보고 조심스럽다.

무엇이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환락과는 거리를 두게 할까. 그 중심엔 오랜 시간에 걸쳐 켜켜이 쌓여진 종교와 역사, 정치의 무게가 자리 잡는다. 예루살렘을 세계적인 도시로 여기는 것은 바로 이곳이 역사, 종교,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트럼프스러운' 결단

5월 14일 드디어 이스라엘 주재 미 대사관이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 남부 아르노나 지역으로 옮겨갔다. 위의 글처럼 텔아비브의 환락과 소음을 피하려 옮긴 것은 아닐 것이다. 예루살렘 대사관 문제는 가뜩이나 휘발성 높은 중동 분쟁의 뇌관에 불을 댕긴 것이나 다름없다. 극단적인 유혈사태, 이른바 테러 행위가 일어날 것에 대비해 미국과 이스라엘은 긴장 상태다. 그래서일까, 트럼프 대통령은 새대사관 개관식에 직접 참석하질 않고 비디오 녹화된 연설로 가름했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데이빗 프리드먼 미국 대사는 주로 텔아비브의 옛대사관 건물에서 일할 것이라고 한다. 예루살렘 대사관엔 50~60명 정도의 인력만 배치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대사관 직원들은 텔아비브에 머물 것이라 한다. 예루살렘 영사관으로 쓰던 건물을 대사관으로 쓰기엔 비좁다는 이유도 있지만, 중동의 흉흉한 민심을 무시할 수 없기에 조심하는 모습이다.

누가 뭐래도, 예루살렘으로의 미 대사관 이전은 큰 논란거리다. 한마디로 국제사회의 반대를 무릅쓴 트럼프의 일방적 행위이다. 이슬람권 국가들은 물론이고 유럽연합(EU) 국가들도 대사관 이전에 비판적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을 국제 사회로부터 더욱 고립시키는 행위나 다름없다는 지적을 받지만, 트럼프는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유네스코가 팔레스타인 헤브론의 구시가지를 (이스라엘이 아닌 팔레스타인의) 세계문화유산에 올리자 트럼프는 2017년 10월 유네스코를 탈퇴 선언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그런 트럼프를 믿고 정착촌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미국의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는 트럼프 행정부 들어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다.

미국 의회도 친이스라엘에 관한 한 민주당과 공화당을 가릴 것이 없다. 미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긴 트럼프의 결정에 대해 의회는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걸지 않는다. 친이스라엘 일방주의에 관한 한 미 정치권은 한목소리라 보면 된다. 기록을 보면, 이미 1995년 미 의회에서 미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가도록 규정한 법률을 압도적인 찬성표로 통과시켰었다.

예루살렘 문제가 민감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미 대통령들은 "중동평화회담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명분 아래 1995년 법률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대사관을 옮기는 것을 미루어왔다. 그런데 23년 뒤 트럼프가 실행에 옮겼다.

트럼프의 비외교적 기행들은 임기 초 파리기후협약 탈퇴, 그리고 최근의 이란 핵협상 파기 등으로 이미 잘 알려졌다. 공화당 출신 전임자였던 조지 부시 대통령도 망설였던 예루살렘으로의 대사관 이전은 지극히 '트럼프스러운' 결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 이스라엘 주재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공식 이전을 앞두고 대사관 이전을 환영하는 플래카드와 미국 국기인 성조기가 예루살렘 시내에 걸려 있다. ⓒAP=연합뉴스

이스라엘 로비의 승리

예루살렘으로의 미 대사관 이전은 이른바 이스라엘 로비(Israel lobby)가 이뤄낸 또 하나의 성과물이자 전리품으로 풀이된다. 미국-이스라엘공익위원회(AIPAC)와 같은 친이스라엘 로비 단체는 물론이고, 유대인 출신으로 카지노 재벌이자 공화당의 유력 기부자인 쉘돈 아델슨을 비롯한 미국내 친이스라엘 보수 강경파들의 오랜 바람 가운데 하나가 이스라엘 주재 미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트럼프는 이들의 바람을 들어주고 지지표와 정치자금을 챙기는 모습이다. 유대인이면서 트럼프의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보좌관은 미 대사관을 옮기는 것에 대해 처음엔 반대했다고 알려진다. 그가 주도적으로 맡게 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의 중동평화회담을 좌초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를 들어서였다.

하지만 유대인 네오콘답게 곧 태도를 바꿨다. 5월14일 쿠슈너는 부인이자 트럼프의 딸인 이방카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날아가 대사관 개관식에 얼굴을 내밀었다. 개관식에 참석한 미국쪽 주요 인사는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 존 설리번 국무부 부장관, 그리고 이스라엘 로비단체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아 챙겨온 미국 상하원 의원들이다. 므누신 재무장관도 유대인 출신이다.

'두 개의 국가 해법' 카드 버렸다

트럼프의 미 대사관 이전 강행은 미국이 이른바 '두 개의 국가 해법'(two-state solution) 카드를 내팽개쳤다는 것을 뜻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두 개의 독립국가를 중동 땅에 세우는 것보다 한 개의 국가 해법(one-state solution), 다시 말해 이스라엘만 인정하겠다는 얘기다.

알자지라 방송은 "트럼프가 예루살렘으로의 미 대사관 이전을 결행한 것은 미국이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를 국제법에 따라 해결하는 데 더 이상 관심이 없음을 드러냈다"고 지적한다. 미국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더 많은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고 아울러 (2개의 국가해법 대신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되도록 적게 포함된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만을 미국이 지지한다는 것을 대사관 이전으로 확실하게 보여주었다는 비판이다.

예루살렘으로의 미 대사관 이전이 현실로 나타나자, 온건파인 파타(Fatah)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미국은 중립적인 중개자가 아니다"라며 비난의 목청을 높였지만, 약자로서 무력감을 삼킬 뿐이다. 파타가 기웃거려온 이스라엘과의 중동 평화협상 테이블은 예루살렘 대사관 문제로 더욱 멀어진 상황이다.

파타와는 달리 팔레스타인 강경파인 하마스(Hamas)는 "미국이 지옥문을 열어 제쳤다"며 투쟁에 나설 채비다. 하마스는 지난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승리한 뒤 이른바 자폭 테러를 중지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또한 전략적 판단 아래 지금껏 미국인을 겨냥한 극한적 행동을 삼가왔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이 워낙 엄중한 만큼 예루살렘의 미 대사관 직원들은 비상근무 중이다.

틸러슨-매티스 우려 현실화되나

지난 3월 말 미 국무장관에서 물러난 렉스 틸러슨은 트럼프의 예루살렘으로의 대사관 이전방안을 반대했었다.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도 틸러슨과 같은 입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들의 반대 논리에는 중동 지역의 반미 정서를 자극해 해외에 머무는 군인이나 외교관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이스라엘 건국기념일인 5월 14일 다음날(5월 15일)을 해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나크바(대재앙)의 날'로 기리며 땅과 자유를 빼앗긴 울분을 곱씹어 왔다. 특히 올해는 1948년 76만 명(유엔 추정치)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집과 땅을 잃고 쫓겨났던 '나크바'가 일어난 지 꼭 70주년을 맞이하는 시점이다.

미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으로 이스라엘 뒤엔 미국이 있음이 다시금 드러났다.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를 거칠게 밀어붙이는 트럼프가 예루살렘이란 민감한 뇌관을 건드린 지금, 틸러슨과 매티스가 걱정했던 일이 자칫 현실로 나타날 수 있다. 예루살렘 대사관 문제를 투쟁 명분으로 삼은 중동 저항세력이 9.11테러에 버금가는 대형 유혈 사건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곧 듣게 될지도 모른다.

끝으로 한 가지 물음. 예루살렘 문제로 미국이나 이스라엘을 겨냥한 대형 유혈 사건이 터질 경우, 이해타산에 빠른 사업가 출신인 트럼프는 어떤 셈법을 할까. (2001년 9.11 테러 뒤 조지 부시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의 군산복합체에 '테러와의 전쟁' 일감을 몰아주고 반대급부를 챙기는 물신주의적 그림을 머릿속에 그릴지도 모르겠다. 트럼프 같은 인물에겐 전쟁은 사업 기회로 비쳐지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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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는 지난 20여 년간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시리아 등 세계 20여 개국의 분쟁 현장을 취재해 왔습니다.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중앙일보>를 비롯한 국내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미국 뉴욕시립대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민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22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저서로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 <오늘의 세계 분쟁> <군대 없는 나라, 전쟁 없는 세상> <시리아전쟁>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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