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시대, 새로운 사회를 꿈꾼 이들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저우언라이도 감동받은 3.1운동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3․1운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한 한민족의 역동적 표현의 결과물로서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3․1운동은 온 민족의 거대한 함성이자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꿔놓은 대역사였다. 뿐만 아니라 3․1운동은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였으며, 남녀노소‧계급 등의 차별을 잠식한 세계민족운동사의 보기 드문 한편의 감동드라마였다.

이에 대한 세계 각국의 언론은 예사롭지 않은 관심을 표하였다. 심지어 중국의 영원한 총리라고 칭송받고 있는 저우언라이(周恩來)도 일본에서 유학할 때 3․1의 열기를 느끼고자 서울을 방문하지 않았는가.

3.1절, 독립선언기념일

1919년 3월 1일이 가슴 벅찬 이유는 바로 그날 일제에게 넘겼던 주권을 찾기 위하여 전 민족이 독립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3․1운동에서 보여준 성숙된 민의는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성립으로 나타났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운동의 적장자이다. 임시정부는 3․1운동과 동시에 기획되고 공포되었다. 그리고 이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탄생했다. 이곳이 한국인들에게 소중한 장소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당시 민족대표 가운데 박희도는 현순을 만나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상하이에서의 새로운 주권국가수립을 독려했다. 1919년 4월 10일 상하이 김신부로(金神父路)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색채를 버리고 오직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해 열정을 불태웠다.

이들은 임시의정원(국회)을 조직하고 임시헌장(헌법)을 제정하여 국호를 결정했다. 대한제국 황제가 일제에게 넘겨준 주권을 '民'(민)이 가져와야 한다는 중론을 모아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했다.

임시헌장 10개조 가운데 제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3․1독립선언을 계승하였음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그날을 국경절로 지정했다.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 상하이 정안사로 올림픽극장에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교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교민단 주최로 제1회 3.1독립선언기념식이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여운형의 사회로 시작된 기념식은 이화숙의 애국가 선창과 임정요인들의 축사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날 도산 안창호는 기념사에서 "일본의 최대 문제는 이날(3.1)을 무효에 귀(歸)하게 함이오 우리의 최대 의무는 이날을 영원히 유효하게 함이라. 동포여 이날을 유효케 하려거든 그날을 기억하시오"라고 열변을 토했다.

도산의 말처럼 일본은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독립선언'을 없던 일로 해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독립선언 이후 비록 임시정부이지만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시간을 머금은 공간을 가다

2016년 10월 14일 대한민국 국호가 탄생한 상하이를 찾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책임지고 있는 정준표 주임은 필자를 비롯한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우리는 1990년 2월 19일에 상하이 시 정부에서 부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구지'라는 표지석을 유심히 보면서 이 건물의 연혁과 해방 이후 한국과 중국이 함께 조사하고 복구공사를 마치게 된 사연을 풀어보았다.

▲ 중국 상하이 시에 위치한 임시정부청사 유적지 ⓒ김주용

'마당로 청사'라고 불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1990년 상하이 시 노만구 구급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대외에 정식으로 개방하였다. 1989년 임시정부 청사 조사 당시 회회중로는 대부분 개발 아래 놓여 있었지만 다행히 마당로 306농 4호 건물은 철거의 바람을 피해갔다.

마당로 임시정부청사는 1920년대 건축업자가 지은 중국식 연립주택으로 복원 당시 12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독립기념관은 민간기업과 함께 1993년 청사를 복원하여 일반에 공개하였다.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청사는 정부수립지에 존재하고 있다는 상징성으로 현재도 중국 정부와의 긴밀한 협조 속에서 전시교체 및 건물 보수 등에 대해서 지속적인 관심과 협조가 진행되고 있다. 중국 측에서도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가 갖는 한중 양국간의 우호 증진이라는 측면을 쉽게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문에 마당로 일대의 1000여 평은 중국 상하이에 불었던 개발 바람에서 비켜갈 수 있었다. 그 결과 100년 전 중국의 건축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이 살아있는 교육 공간이 되고 있다. 특히 상하이를 비롯한 중원지방의 전통적인 출입문 양식인 석고문(石庫門)이 보존돼있는 이곳은 중국에게도 소중한 유적지가 됐다.

녹색 문패로 4호 대문을 지나면 태극기가 걸려 있고 왼쪽 벽면에는 역대 임시정부의 정상들 사진이 걸려 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2대 박은식 등이 일행들을 물끄러미 처다보는 듯하다. 한계단을 오르면 백범의 집무실을 재현한 곳과 마주친다. 이곳에는 부엌도 있었는데, 청사라고 하지만 일상의 생활공간이기도 했다. 2층은 각방을 터서 관람객들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의 역사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전시관 맨 끝에는 임시정부를 방문한 한국의 역대 대통령 서명판이 부착되어 있다. 한중 수교 이후 대한민국의 모든 대통령이 상하이를 다녀갔으며, 이곳 임시정부청사에서 선열들의 독립정신을 되새겼던 것이다.

관람을 마친 후 일행은 정주임에게 인사를 하고 다음 목적지인 백범 김구의 거주지인 영경방(永慶坊) 10호가 있는 신천지로 방향을 잡았다.

신천지에서 만난 김구 거주지

원래 영경방 10호는 동농 김가진(金嘉鎭)의 아들 김의한과 정정화 부부가 살았던 곳이다. 김가진이 1922년 와병으로 타계하면서 이 집은 최중호와 김구가 살게 되었다. 김구는 모친 곽낙원(郭樂園)과 아내 최준례와 아들 둘과 함께 이 집에 거주했다.

김구의 부인 최준례는 둘째 아들을 출산한 후 2층에서 낙상하여 1924년 숨을 거뒀다. 김구에게 이곳은 자신이 살아가면서 가장 부끄러운 곳이기도 했다. 아내에게 제대로 된 밥 한 끼 해주지 못했던 곳이기도 하다.

'신천지(新天地)', 말 그대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곳이라는 의미다. 왜 중국은 이 일대를 개발하면서 이러한 용어를 택했을까. 바로 중국공산당 제1차 대회가 열렸던 곳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공산당은 봉건사회를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회의를 개최했다. 지금은 커피 한 잔에 한국 돈으로 1만 원을 내야 할 정도로 물가가 비싼 지역이 됐지만, 역사성을 간과하지 않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본받을만 했다.

그들 사이를 지나쳐 김구가 거주했던 영경방 10호 건물을 찾았다. 도시개발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상하이 시가 영경방이라는 옛 표식을 그대로 둔 것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배려는 아니었을까. 신천지를 찾는 한국인이 있다면 백범 김구 가족이 자신을 버리고 조국에 대한 사랑을 펼치고자 머물렀던 영경방을 한번쯤 찾아가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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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중국문제특성화' 대학을 지향하면서 2013년 3월 설립된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은 중국의 부상에 따른 국내외 정세 변화에 대처하고, 바람직한 한중관계와 양국의 공동발전을 위한 실질적 방안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산하에 한중법률, 한중역사문화, 한중정치외교, 한중통상산업 분야의 전문연구소를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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