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전 미국 뉴햄프셔주의 한적한 휴양지 다트머스에서 청년 학자들이 ‘인공지능’이라는 생소한 개념을 쏘아 올렸을 때, 그것이 반세기 뒤 지구촌의 지정학적 판도를 뒤흔들 거대한 지각변동의 시작점이 될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최근 7월 17일, 황푸강 변 세계회객청(Grand Halls)에서 막을 올린 2026 상하이 세계인공지능대회(WAIC)는 AI가 더 이상 온전한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강대국 외교의 최전선이자 지정학의 격전장임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번 대회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던진 메시지는 명확하다. 미국의 집요한 ‘Small Yard, High Fence’ 봉쇄 전략에 맞서, 중국은 “AI 발전은 한 국가의 독주가 아닌 국제적 협력의 교향곡이 되어야 한다”며 ‘글로벌 공공재로서의 AI’라는 프레임과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연대’라는 거대한 반격 카드를 꺼내 들었다. 러시아, 브라질 등 29개국이 힘을 모아 출범시킨 ‘세계인공지능협력기구(WACO)’와 개도국 대상의 방대한 기술 원조 약속은, 선진국 중심의 진영 논리에 소외된 다수의 국가들을 자국 생태계로 흡수하려는 치밀한 외교적 포석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미·중 AI 패권 경쟁이 이제 단순히 ‘누가 더 빠른 슈퍼컴퓨터를 가졌는가’의 기술 속도전을 넘어 ‘어떤 생태계와 규범으로 세상을 통치할 것인가’의 체제전으로 완전하게 재편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G7과 서방 중심의 AI Safety Institute(AISI) 연합을 구축해 첨단 칩과 독점적 프론티어 AI 모델의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최근 미국 행정부가 안보를 이유로 외국인의 첨단 AI 모델 사용 제한까지 검토했던 사례처럼, ‘기술 오남용 방지’라는 명분 뒤에는 첨단기술 접근을 차단하고 독점을 유지하려는 셈법이 깔려 있다. 반면 중국은 ‘국산 오픈소스 모델’의 대량 보급과 UN 헌장 기반의 다자주의 거버넌스를 앞세운다. 서방의 진입장벽에 가로막힌 신흥국들에게 무료나 다름없는 오픈소스 기술과 인프라를 제공하며 기술 패권의 지형도를 바닥에서부터 흔들고 있는 것이다.
이 거대한 양극화의 균열 선상에서 대한민국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상하이에서 날아온 ‘초청장’은 한국 외교가 처한 서글픈 외줄 타기 현실을 직관적으로 증언한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이번 WAIC 행사를 앞두고 주한중국대사관을 통해 한국 정부 고위급 관료의 참석을 수차례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나 고민 끝에 상하이로 향한 우리 측 대표단은 과기부 주재관과 담당 과장 등 실무급에 그쳤다. 미국 주도의 첨단기술 협력체제인 ‘팍스 실리카’와 한·미·일 SMR 협력, 핵심광물 다자협의체(FORGE) 등에 발을 담그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의 손짓에 선뜻 고위급을 보내기엔 미국과의 안보·기술 동맹 연쇄 반응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미·중 양쪽으로부터 협력 요구를 받는 동시에 “어느 진영에 설 것인가”를 강요받는 현실 속에서, 정부는 결국 ‘몸사리기’와 ‘실무 파견’이라는 소극적 우회로를 택했다. 그러나 일방향 신호에 치중한 채 정작 미·중이 그어놓은 기술 38선 위에서 눈치보기로 일관한다면, 글로벌 AI 규범과 생태계가 두 개로 쪼개지는 대전환기 속에서 국익을 지켜낼 주도적 공간은 갈수록 아사할 수밖에 없다.
기술의 이중화 국면에서 한국 외교와 산업이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전환이 시급하다.
첫째, ‘소버린 AI(기술 자립)’를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를 위한 핵심 자산으로 키워내야 한다. 독자적인 파운데이션 모델과 국산 AI 반도체(NPU) 생태계 결합 없이는, 미국이든 중국이든 어느 한쪽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외교적 자율성과 목소리는 오직 자립적 기술 인프라라는 실재하는 힘에서 나온다.
둘째, 진영 논리를 뛰어넘는 ‘K-AI 턴키 패키지’로 글로벌 사우스와의 진정한 협력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중국의 오픈소스 무상 공세와 미국의 폐쇄적 독점 전략 사이에서, 한국은 고성능 반도체, 친환경 데이터센터, 그리고 인간 중심의 안전한 소프트웨어가 결합된 ‘신뢰할 수 있는 AI 솔루션’을 제시해야 한다. 기술 시혜를 넘어 상생의 가치를 전달할 때 글로벌 시장에서의 실질적 영토가 넓어진다.
셋째, 미·중의 극단적 대립을 완화하는 ‘중견국 AI 외교 연대(Middle-Power Coalition)’를 주도해야 한다. 영국, EU, 캐나다, 아세안의 주요 중견국들과 손잡고 기술 독점도, 기술 무기화도 아닌 ‘포용적·안전한 AI’라는 제3의 길을 열어야 한다. 단순히 초청장을 받고 갈지 말지를 고민하는 ‘수동적 대상’에서 벗어나, 미·중 양자택일의 강요를 거부하고 규범 제정자(Rule Maker)로서 교량적 역할을 선점하는 것만이 지정학적 샌드위치 신세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다.
19세기 말 세도정치와 쇄국의 그늘 속에서 산업혁명의 거대한 파도를 놓쳤던 역사의 비극을 기억한다. 2026년 상하이 황푸강 변에서 뿜어져 나온 AI 역동성과 날아든 초청장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기술이 인류의 미래를 재편하는 지금, 대한민국은 남이 그어놓은 경계선 위에서 눈치만 보는 관망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판을 만드는 담대한 선구자가 될 것인가. 미래를 대하는 우리의 외교적 결단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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