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대통령이 이 나라 주인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권한을 함부로 남용해 국민들에게 혼란을 빠뜨리는 불행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엄중한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대한 첫 판결이 6일 나왔다. 징역 24년, 벌금 180억 원. 지난 2016년 가을 관련 의혹이 불거진 이후 1년 6개월여 만에 나온 법적 심판의 결과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 김세윤 부장판사는 박 전 대통령에게 제기된 18개 혐의 가운데 16개를 유죄로 판단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의 혐의에 대해 공모 관계로 지목된 최순실 씨와 유사하게 판단했다. 그러나 민간인이었던 최 씨와 달리 박 전 대통령은 공무원 신분인 점, 더욱이 국가수반인 점 등을 참작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날 선고공판은 사상 최초로 생중계된 가운데, 판결문 전체 낭독에는 2시간여가 소요됐다.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으로서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국민 전체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행사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고 운을 뗀 김 판사는 "그럼에도 피고인은 최서원(최순실 개명 후 이름)과 공모해 기업들의 출연 요구하고, 최서원이 설립 운영을 주도하거나 친분 관계에 있는 회사들의 광고 발주 등 요구하는 등 권한을 남용해 기업 재산권 경영 자유를 심각히 침해했다"며 "또 비서관 통해 장기간 공무상 비밀로 누설돼서 안 되는 대통령 일정 등 청와대 문건을 최서원에게 전달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범행이 밝혀지면서 국정질서에 큰 혼란을 초래하고 탄핵 결정으로 인한 대통령 파면이라는 사태까지 이어졌음에도 범행을 부인하면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최서원에게 속았다거나, 비서실장 등이 한 일이라고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을 하며 책임을 전가했다"고 지적했다.
삼성 뇌물 72억 ‘유죄' 인정, 승계 묵시적 청탁은 ‘무죄'
재판부는 이날 박 전 대통령에게 적용된 18개 혐의 중 16개를 유죄로 판단했다.
우선 국정농단 사태의 시발점이 된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 강요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 박 전 대통령은 16개 기업으로부터 미르재단에 486억, 15개 기업으로부터 케이스포츠 재단에 288억 원의 출연금을 납부하도록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재판부는 이 부분에 대해 박 전 대통령과 최 씨,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과의 공모 관계를 인정하면서 "피고인이 대통령으로서의 직권을 위법 부당하게 행사했다"고 했다. 또 "대통령과 경제수석의 권한을 두려워한 게 아니라면 출연 요구 취지를 검토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업들이 적지 않은 금액의 출연을 결정할 수 없었다고 보인다"면서 강요 혐의를 인정했다.
롯데그룹으로부터 K스포츠재단에 대한 지원금 70억 원을 받아낸 점, SK재단에 89억 원을 지원해달라고 SK그룹에 요구한 점은 제3자 뇌물 요구에 해당한다고 인정했다.
CJ 이미경 부회장 퇴진 요구에 대해서도 "강요미수에 대해 유죄 인정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의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 건에 대해서는 직권남용과 강요 모두 유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기업을 운영하는 이재용 부회장으로서는 박 전 대통령이 부탁하는 것을 직접 거절하는 것이 어려운 점, 박 전 대통령의 부탁을 거부할 경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할 수 있다는 점을 보면, 강요를 한 것으로 판단된다"라고 밝혔다.
삼성으로부터 뇌물을 수수한 혐의에 대해서도 유죄로 봤다. 최 씨의 딸 정유라 씨의 승마훈련 관련 선물 받은 말 3마리 구입비 36억여 원과 코어스포츠 지원금 36억여 원 등 총 72억여 원을 뇌물로 받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최 씨 재판에서도 뇌물 규모를 72억 원으로 판단했다. 이와 달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항소심 재판부는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과 최 씨에게 건넨 뇌물이 36억 원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삼성그룹의 승계 지원 작업 관련, 부정한 청탁이 있다는 혐의에 대해선 "개별 현안 청탁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무죄‘라고 밝혔다.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명단(블랙리스트) 작성과 이에 따른 실행을 지시·공모한 혐의에 대해서도 유죄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공무상 비밀 유출 혐의에 대해선, 수집된 33건의 공무상 비밀 문서가 적법하게 수집된 증거가 아니라며 나머지 14건에 대해서만 공무상 비밀 유출로 판단했다.
안종범 수첩, 결국 ‘스모킹건'으로
이날 재판부가 박 전 대통령에게 징역 24년과 벌금 180억 원이라는 중형을 선고한 것은 이른바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며 상당수 혐의를 유죄로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김 판사는 "단독면담 후 박 전 대통령이 안 전 수석에게 대화 내용을 불러줘서 받아적었다는 것은 단독면담에서 박 전 대통령과 개별 면담자 사이에 대화를 추측하는 간접 정황에 대한 증거능력이 있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날 판결문 가운데 ‘안종범 수첩에도 메달리스트 후원 내용 기재돼있음', ‘수첩이 압수됐는데 거기도 10.19 부분에 리커창 방한 시 문화재단과 중국 간 MOU라는 기재가 있음' 등 내용이 담겨있었다.
총 63권으로 구성된 안 전 수석의 업무 수첩에는 박 전 대통령의 지시사항이 세세하게 적혀있고, 각종 국정농단 재판에서 핵심 증거로 채택됐다. 그러나 이재용 부회장 항소심 재판부는 이 수첩에 대해 "기재 사실이 진실성과 관계없는, 간접사실에 대한 정황 증거라 볼 순 없다"며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 박 전 대통령은 이날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하고 재판에 나오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은 "건강 등 사유로 나갈 수 없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1심 판결대로 형이 확정될 경우, 현재 만 66세인 박 전 대통령은 만 89세가 되는 2041년까지 수감생활을 해야 한다. 또한 박 전 대통령은 현재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36억5000만 원을 상납 받은 혐의,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공천에 개입한 혐의 등으로 다른 재판을 받고 있다. 만약 국정원 관련 재판에서도 실형이 확정될 경우 박 전 대통령의 수감 생활은 더 늘어날 수 있다.
박근혜 측 "진실 언젠가 밝혀진다"...검찰 "법과 상식 맞는 결과 위해 최선"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재판부가 징역 24년의 중형을 선고하자, 국선 변호인단은 "앞으로 항소심, 대법원에서 다른 판단을 해줄 것"이라며 항소 의사를 밝혔다.
박 전 대통령 국선변호인인 강철구 변호사는 이날 오후 1심 선고가 끝난 직후 취재진에게 "이 사건은 반쪽짜리 사과와 같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판단이 가능하다"라며 "국선 변호인들이 최선을 다했지만, 선고 결과가 매우 좋지 않아 안타깝게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리라 믿는다"라고 밝혔다.
국선 변호인단은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을 지금까지 한 번도 접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강 변호사는 "항소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경로로든 박 전 대통령의 의사를 확인할 것"이라며 "차후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다"라고 설명했다.
반면, 검찰은 선고 직후 "최종적으로 법과 상식에 맞는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면서도, 항소 여부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밝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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